130화 VIP (4)
[시바, 이거 너무한 거 아냐? 뭔 놈의 의사가 이렇게 연기를 잘해?]
바루다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지 다시 한번 수혁이 짓고 있는 표정을 점검했다.
방금 수혁이 내뱉은 말투와 대조하면서였는데, 하면 할수록 감탄만 나오는 모양이었다.
[미쳤네. 아카데미 상 받겠네.]
바루다가 이럴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환자복을 입고 있지만, 실은 태화 전자의 전무 이사인 김다현 또한 깊은 감명을 받은 참이었다.
‘설마설마하고 있었는데. 진짜 모르고 있던 건가?’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이나 수혁의 연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김다현으로서는 고마운 마음이 배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VIP라 대우해 준 것이 아니라, 그냥 환자에게 이만큼 해 준 셈이었으니까.
정말이지 훌륭한 의사 아니던가.
“아……. 이수혁 선생님. 정말 대단하시군요.”
따라서 김다현은 아까보다도 더 감명받은 얼굴이 되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마음 같아서는 더 깊이 숙이고 싶었지만, 방금 목을 수술받은 참이라 이게 한계였다.
“아, 아뇨. 저는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반면 수혁은 계속 모르쇠를 치고 있었다.
여전히 연기력은 훌륭한 데다가, 이미 확 넘어온 상황에서 이어지는 대화였기에 김다현은 홀랑 빠져들고 말았다.
“정말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세요. 저……. 인사가 좀 늦었습니다.”
해서 김다현은 태도를 달리 한 채, 핸드폰에 끼워 둔 자신의 명함 한 장을 수혁에게 건네주었다.
명함에는 태화 전자 전무 이사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수혁은 여기서 매우 놀라야 하나 아니면 얼떨떨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얼떨떨! 얼떨떨로 갑시다! 그게 지금 톤에서 자연스러워!]
다행히 바루다가 있었다.
녀석의 분석을 100% 신뢰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의학 외적인 부분에서도 어느 정도 실력이 늘고 있지 않은가.
“어……. 이게…….”
“안녕하세요, 태화 전자 전무 이사 김다현입니다. 오랜만이네요, 신 과장님.”
김다현은 얼떨떨해 하고 있는 수혁을 향해 아주 자연스럽고 또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뒤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신현태를 힐끔 바라보면서였는데, 그제야 신현태도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다.
“아, 네. 전무님.”
“어…….”
“제가 도울 일 있으면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이수혁 선생님.”
[지금! 지금 당황하면서 알아보는 척해요!]
“아, 네. 네! 아, 전무 이사님이시구나……. 그룹……. 아, 네.”
수혁은 실로 적절한 때 크게 놀란 표정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누가 봐도 순진한 젊은 의사 같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전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처구니가 없어 돌아가실 지경이 되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흐뭇하게 웃어 줄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수혁아, 진짜 높은 분이셔. 아버지는 잘 계시죠?”
“아, 네. 아직도 현역이시죠.”
“그러니까요. 진짜 대단하셔요.”
김다현의 아버지, 김범준 부사장은 70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경영 일선에서 뛰고 있었다.
그냥 평범한 부사장이 아니라 등기 이사라는 뜻이었다.
저 거대한 태화 전자의 일정 지분을 들고 있는.
태화 일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일종의 준재벌급은 된다고 보면 되었다.
그룹 전체에 대한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은 수준이라 알아 두면 무조건 도움이 될 터였다.
그 연줄을 눈 뜨고 뺏긴 최낙필은 아주 복잡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마 자신이 데리고 있었다면 진단명을 맞추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터였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자신의 행보는 어찌 될까.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까운데…….’
수혁은 최낙필의 복잡미묘한 눈빛을 애써 받아넘겨 가며 입을 열었다.
“아, 아. 맞다.”
연기하느라 놓친 멘트가 있어서였다.
모두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곧 모두가 반응했다.
“네, 선생님.”
“어, 수혁아, 왜.”
원래 이수혁 처돌이라 할 수 있는 신현태는 물론이고, 새롭게 그 길에 들어서게 된 김다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좋구만. 아주 좋아요.]
바루다는 그들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까 쌍둥이 동생분이 있다고 하셨죠?”
“아, 네.”
“말씀드렸다시피 환자분의 질환은 유전병입니다. 쌍둥이 동생분도 아마 같은 병을 앓고 있을 겁니다.”
“아, 아!”
김다현은 명함을 건네준 후로는 줄곧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동생 얘기가 나오자 더는 그러지 못했다.
수혁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다현을 향해 말을 이었다.
“한번 검사받아 보도록 해 주시고, 치료 시작하시도록 해 주시죠. 치료만 받으면 골절 없이 지내실 수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부터 바로 처방 드리도록 할게요. 이미 발생한 골절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약 드시기 시작하면 이제부터 발생할 골절은 예방할 수 있을 겁니다.”
“네, 네.”
다현은 그 후로도 몇 번인가 더 감사를 표했다.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돕겠다는 말도 몇 번 더 덧붙였는데.
이젠 아까와는 달리, 아버지의 얘기도 끼어 있었다.
[김범준이면 상당히 유명 인사죠.]
다현을 병동에 보낸 후, 바루다가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김범준은 현 태화 그룹 내의 실세 중 하나였다.
그런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수혁아, 이번에도 역시 잘했다.”
신현태 과장 또한 김다현 환자가 병실로 돌아갈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수혁은 짐짓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우연히 아귀가 맞았습니다.”
“우연은 무슨. 이거 이렇게 빨리 진단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되겠어? 대단한 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잘됐어. 회장님 일가 제외하면 제일 힘 있는 집안이야. 어차피 너 교수 되는 거야 확정이긴 했는데……. 이걸로 100%네.”
신현태는 그런 말을 하면서 괜히 서효석 쪽을 돌아보았다.
잘났다 싶은 신임 교원이 있으면 일단 시비 거는 게 일상인 인간이어서 그랬다.
자신이 못 가진 걸 가진 사람이 있으면 부러워하거나 배우려고 하는 게 성숙한 사람의 자세일 텐데.
이 인간은 그저 질투하고 깎아내리려고만 했다.
“그, 그렇죠. 100%죠. 축하해, 이수혁 선생.”
물론 서효석은 인성과는 별개로 상당한 눈치를 탑재하고 있었다.
원장 아들인 것만 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거기에 더해 저런 백까지 생긴 마당 아닌가.
여기서 뻗대 봐야 입지만 더 좁아질 뿐이었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 지내는 게 나았다.
“감사합니다.”
수혁은 딱히 서효석과 잘 지낼 마음일랑 없었지만, 아직은 위치가 위치였기에 좋게 받았다.
“거참. 아까 그 병 이름 뭐라고?”
반면 최낙필은 아직도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데리고 있어 봐야 진단은커녕 사고만 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아……. 네 오토조말 도미넌트 하이포포스패테믹 리케츠(Autosomal dominant hypophosphatemic rickets)입니다.”
“어 그래, 그 오토조말. 음. 그래, 뭐. 음.”
원래 여기 화내러 온 참이 아니던가.
최낙필은 참으로 난감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심정상 화를 내고는 싶은데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알고 데려온 게 아니라……. 이건데.’
아까 그게 연기일 리는 없지 않은가.
그게 연기면 의사가 아니라 저기 어디 충무로에 가 있어야 할 거 같았다.
까맣게 속아 넘어갔다는 뜻이었는데, 그래서 더 화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려운 환자 같아서 데려와서 맞췄다. 이거잖아, 지금.’
칭찬을 해 줘야 마땅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후.’
게다가 수혁은 원장 아들임과 동시에 막강한 백을 거느린 사람이 된 참 아니던가.
서효석처럼 백이 좋은 게 아니면서도 위로 올라가고 싶은 최낙필로서는 어떻게든 연줄이 필요했다.
수혁이 그 연줄이 되어 줄지는 의문이었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간에 잘 보여 두면 좋을 거 같았다.
해서 그는 성질을 좀 접어 두기로 결심했다.
“이수혁 선생, 고마워. 어려운 환자인데……. 진단 잘해 줬어.”
“아, 감사합니다. 과장님.”
물론 수혁은 딱히 최낙필의 감사 인사에 의미를 두진 않았다.
원래도 머리가 좋은 편인 데다가, 바루다가 데이터화해서 저장해 두고 있는 탓에 최낙필이 자신을 두고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력은 있는 사람이니만큼 서효석처럼 병원에서 내쫓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잘해 주고픈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럼, 난 환자가 있어서.”
최낙필은 다시 한번 손 인사를 한 후 자기네 병동으로 돌아갔다.
“어……. 나도 뭐……. 그……. 연구! 그래 연구가 있어서.”
서효석은 여기가 자기 병동임에도 불구하고 회진도 안 돌고 스리슬쩍 빠져나갔다.
신현태는 그런 서효석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아, 저 새끼 잘라야 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옆에 수혁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금세 다른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아무튼, 연구 거리는 생각해 봤니?
다행히 수혁이랑은 하도 자주 보는 사이라 얘깃거리는 참 많았다.
수혁 또한 어색해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얼굴로 대꾸했다.
“아, 네. 해 보긴 했는데, 아직은 딱히…….”
“그렇지? 아무래도. 나도 생각해 봤는데 이게 딱 떠오르진 않더라.”
“그러니까요.”
“흠.”
신현태는 얼굴 본 김에 다시 생각이나 해 보겠다는 듯 턱 밑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아이디어가 턱턱 나오면 세상에 논문 못 써 머리 쥐어 싸매고 있는 사람이 왜 있겠는가.
신현태는 잠깐 그렇게 있다가 이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올 때만 해도 어중간한 시간이었는데, 이젠 밥 시간이 되어 있었다.
“배 안 고파? 안 바쁘면 같이 먹을래? 현종이 형이랑 약속 있는데.”
“아……. 저야 좋죠.”
“그래, 그럼 가운 벗어. 내려가자.”
“가운? 밖으로 나가요?”
“응. 현종이 형 취미가 제철 음식 먹는 거잖아. 요새 뭐 기깔 나게 맛있는 집이 생겼다더라고.”
“오……. 알겠습니다.”
이현종은 상당히 입맛이 까탈스러운 편이었다.
그 사람이 맛있다고 하면 무조건 맛있다고 보면 되었다.
[빨리, 빨리!]
맛있는 음식이라면 거의 걸귀가 되는 바루다가 지랄을 해 대는 통에 수혁은 신현태와 함께 서둘러 1층으로 향했다.
중간에 신현태가 전화를 받았는데, 이현종은 벌써 식당으로 가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해서 둘은 급히 택시를 타고 식당으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기와지붕이 인상적인 식당이었는데, 강남 언저리에 이런 집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마당이 크고 넓었다.
“재벌 집 회장님들도 와서 먹고 그러는 집이라더라. 어마어마하게 비싸, 예약 잡기도 힘들다더라. 원래 이하언 교수 오기로 했었는데 못 와서 자리 난 거야.”
“아……. 네, 감사합니다.”
신현태는 놀란 얼굴의 수혁에게 부연 설명을 해 준 후, 예약한 자리로 향했다.
“어어, 왔어?”
이현종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상당히 심각한 얼굴이었다.
자세히 보니 통화 중이었는데, 환자 얘기인 듯했다.
“아니, 인마. 너는 우리 과 병도 아닌데 물어보면 내가 아니? 나는 알 줄 알았다고? 미친놈이 내가 무슨 A.I.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