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첫 연구 (1)
홍창기는 앞장서서 걷고 있는 수혁과 신현태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왔다.
정교수는 아니더라도 이제 부교수는 단,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쓰기에는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묘사였지만.
정말로 홍창기는 쫄래쫄래 쫓아오고 있었다.
[화이자가 크긴 크네요.]
바루다는 그런 홍창기를 떠올리며 혀를 츠츠 찼다.
수혁은 화이자 학회라는 게 얼마나 큰 모임인지 대강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까지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수많은 펀드가 조성되고, 또 기라성 같은 연구실끼리의 협력이 이루어지는 곳 아니던가.
처음 비아그라로 돈 긁어모을 때는 그야말로 ‘개같이 버는구나’라는 말이 어울렸지만.
그 돈을 정승처럼 쓰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누구도 화이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못했다.
현시점, 의학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집단 중 하나였으니까.
“여기야, 홍 교수.”
신현태는 수혁의 발걸음 속도에 맞춰 걷다가, 병실과 병실 사이에 난 문을 가리켰다.
원래 과장이라고 해도 다른 교수들과 같은 연구실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내과는 예외였다.
워낙에 과가 덩치가 크지 않은가.
그렇다 보니 과에 딸린 일도 많아서 비서까지 하나 두고 있었다.
일종의 예우라고 보면 되었다.
“아, 알죠. 과장님 방인데.”
“아깐 형이라고 했다가, 이젠 또 과장이라고 했다가. 왔다 갔다 하네?”
“과장님 편하신 대로 부르겠습니다.”
홍창기는 환자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능글맞은 태도로 굽신거렸다.
신현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다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럼 사석에서는 형이라고 해. 원장님한테 나도 형이라고…….”
그리곤 문을 열다가, 멈칫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안에 미리 와 있던 조태진이 그를 붙잡았다.
“형. 어디 가요.”
“아, 자꾸 형이라고 하지 마. 여기 병원이야.”
“아까 현종이 형한테 얘기 다 들었어요. 수혁이 눈 이상하다고.”
“뭐? 그건 뭔 소리야.”
환자가 왔다거나, 뭔가 재미난 일이 있다면 모르겠는데.
애 눈이 이상하다니.
신현태는 자신도 모르게 수혁을 돌아보았다.
그냥 평소의 수혁일 따름이었다.
‘원래 좀 이상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
신현태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조태진이 그 곰 같은 손으로 신현태를 붙잡아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신현태도 그렇게 덩치가 작은 편은 아니었으나, 조태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자, 너도 들어와. 나 빼고 비밀 얘기할 생각하지 말고.”
그는 다른 한 손으로는 수혁 또한 잡아당겼다.
가뜩이나 한쪽 다리가 불편한 수혁 아니던가.
씨름이 계속 유행했으면 아마 씨름 선수가 되었을 거란 소문이 무성한 조태진의 힘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어어.”
“야, 인마. 애 넘어져!”
“에이……. 제가 다 알아서 하죠.”
조태진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신현태에게 눈웃음을 치고는 수혁을 완전히 연구실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어, 잠깐.”
그리고 홍창기가 미처 따라오기 전에 문을 닫았다.
“너 뭐 하…… 냐?”
신현태는 놀란 표정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는 홍창기를 간유리 너머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시야가 흐릿한지라 표정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예상은 가능했다.
아마도 황당하다는 얼굴일 터였다.
“섭섭합니다, 형.”
조태진은 그런 신현태를 향해 적반하장 격으로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너도 인마, 이수혁.”
조태진은 심지어 늘 우리 수혁이라고 부르던 수혁에게 성까지 붙여 불렀다.
이게 어느 정도로 이상한 일인고 하니.
[뭔가 크게 잘못한 모양인데요?]
바루다가 긴장을 다 할 지경이었다.
‘그러게, 뭐지?’
수혁으로서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신현태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쾅쾅.
그사이 밖에서는 홍창기가 문을 두드리기까지 해서 상당히 정신이 없었다.
신현태는 혹여 문이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서인지 문 쪽에 육중한 몸을 기댄 채 말을 이었다.
“원장님 촉 좋은 거 아시죠?”
“그거…… 거야 알지?”
촉 좋다는 말은 당연히 비과학적으로 들리겠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의사들보다도 과학적이라 할 수 있는 내과 의사들이 제일 많이 쓰는 말이었다.
심지어 칭찬으로 쓰였다.
“그래서 그러신가……. 우리 수혁이에 관해서도 그렇단 말이에요?”
“수혁이……?”
신현태는 자신도 모르게 수혁을 돌아보았다.
수혁은 정작 자신은 모르는 얘기였기에 어깨를 으쓱해 보일 따름이었다.
[뭔 개소리일까요?]
심지어 바루다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다른 사람들이 바루다를 못 본다는 사실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노골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도 대강 알죠? 얘…… 가끔 허공 보거나 눈 감고 이상한 곳으로 고개 돌리는 거.”
“알지. 가끔 그러지.”
신현태는 조금 격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자신이 눈 감을 때 고개가 이상한 쪽으로 돌아간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휴……. 눈만 감으라니까…….]
바루다의 핀잔을 들어 가면서였다.
“보통은 환자 볼 때 그러는데……. 얘가 다른…… 연구 주제나 발표 전에도 그런단 말이에요?”
“어……. 그걸 현종이 형이 봤어?”
“아까 회의 들어가려다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귀찮아서 중환자실 중앙쯤에서 밍기적대고 있었나 봐요.”
명색이 원장인데 회의가 싫어서 밍기적거리고 있었다니.
이거야말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현종이다 보니 신현태도 수혁도 모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워낙에 기인 아니던가.
환자 안 보는 것만 빼고는 뭔 짓을 해도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 밍기적…….”
“근데 그때 딱 수혁이가 눈 감고 이상한 데 보기 시작하는 거죠. 어? 그 무슨…… 거 뭐야. 그래, 신기. 신기 있는 사람처럼.”
“수혁이 그런 식으로 모독하지 마…….”
“아무튼, 알죠? 그거.”
“알긴 알아.”
신현태는 아까보다 복잡해진 얼굴로 수혁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조금씩 안타까움이 깃들 때마다 바루다의 핀잔은 더해져만 갔다.
[이럴 거면 차라리 눈을 뜨지. 하다 하다 신기 소리를 듣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대 과학의 결정체인 바루다가 고대 미신으로 오인되고 있었으니까.
물론 수혁도 할 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네가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이렇진 않았지.’
[세련? 세에려언? 지금 그런 말을 입에 올립니까?]
‘그 왜 있잖아. 두뇌 오버클로킹이라도 하란 말이야. 시간을 멈추게 하고 대화를 나누던지.’
[미친…….]
바루다는 지금 수혁이 어떤 걸 참고 자료 삼아서 얘기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았다.
근 1년간 수혁이 잠들 때마다 수혁의 머릿속에 저장된 모든 것을 헤집고 다녀서였다.
[만화 같은 소리 하지 마요.]
‘안 돼? 그런 거?’
[두뇌 오버클로킹이라니. 뭔……. 터보 엔진이라도 답니까?]
‘안 되면 그냥 이대로 살어, 불평하지 말고. 네가 못하는 거니까.’
[와…… 이걸 내 잘못으로 몰고 가네. 하라는 의학 공부는 안 하고 이런 것만 느네, 아주.]
‘뭔 소리야. 이번 연구 아이디어 누가 냈어.’
[허.]
기가 막히는 말이긴 한데, 동시에 맞는 말이긴 했다.
바루다라고 해서 철면피는 아니었기 때문에,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덕분에 수혁은 다시 신현태와 조태진 둘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간혹 밖에 덜렁 남겨진 홍창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방해하긴 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종이 형이 그러던데, 그때 이미 환자 진단 다 하고 치료 들어갔을 때라면서요.”
“현종이 형이 회의 들어가야 했을 시간이니까……. 음……. 그랬지.”
“수혁이 성격에 거기서 또 환자 진단에 관해 생각했을 건 아니라던데……. 그 후에 바로 연구실로 간다고 한 거 보면 역시 연구 거리라고 판단하신 거죠.”
“아, 현종이 형…….”
사람이 머리가 좋아도 좀 정도껏 좋아야지.
기껏해야 회의 안 들어가려고 밍기적거린 주제에 이런 걸 다 예측하면 어쩐단 말인가.
신현태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넌 여기 왜 왔어.”
“전화 해 줘서 왔죠. 자긴 회의 가야 되니까, 뭔 얘기 하는지 들어 보라고 해서. 마침 제가 오늘 외래가 없었거든요.”
“프락치야?”
“프, 프락치라뇨. 저도 엄연히 수혁이 보호잔데. 수혁이 연구면 들을 자격이 있죠.”
“보호자……?”
“그럼요. 저, 얘 미국 다녀올 때 용돈도 줬어요.”
조태진은 자신의 말이 맞지 않냐는 듯한 얼굴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약간 턱 끝을 세우고 있어서 뭔가 으스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양반도 참 주책이에요.]
‘주긴 줬잖아.’
[많이 줬죠. 그 정도면. 그래도 그걸…….]
수혁은 조태진이 출국 전날 따로 불러다 건네준 천 달러를 기억했다.
말이 천 달러지 한화로 따지면 100만 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비록 조태진이 꽤 유복한 사람이라지만, 생판 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턱턱 줄 수 있는 금액은 아니란 뜻이었다.
그 말은 곧 조태진이 수혁의 보호자라고 말하는 것이 영 얼토당토않은 얘기도 아니란 뜻이기도 했다.
“네, 엄청 많이 주셨죠.”
“과에서 주는 거 말고 또 줬어?”
“네. 한 천 달러.”
“천 달러? 야, 그거 뇌물 아냐?”
신현태는 이제 교수들이 하다 하다 수혁이 꼬시려고 돈까지 쓰는구나 하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조태진은 당당하기만 했다.
“현종이 형은 더 줬다는데요, 뭐.”
“그 인간은 더 줬어?”
“에이……. 그래도 원장님한테 그 인간은 좀 심했다, 형.”
“하.”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형, 형거리고.
원장이라는 놈은 레지던트가 자기 숨겨 둔 자식이라고 하질 않나, 돈을 주질 않나.
‘내 대에서 태화 의료원 내과가 끝장나는 거 아냐?’
머리가 어찔해진 신현태는 이런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과장님. 근데……. 연구 얘기는 안 하는 건가요?”
“아. 수혁아.”
하지만 이 수라장이 있게 한 수혁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그래, 얘가 있지. 얘만 있으면…….’
다른 놈들이 아무리 병신 짓을 해도 절대 태화 의료원이 망할 일은 없을 터였다.
압도적인 실력이 있으면 조금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다 용납이 되는 법이니까.
마치 이현종이 그 나사 빠진 성격을 하고 있어도 태화 의료원 순환기내과가 여전히 세계 최고인 것과 같은 이치였다.
“얘기…… 해야지. 그래, 음. 저기 앉자.”
“네, 하하.”
“조태진……. 너는 왜 앉아?”
“저도 들어야죠. 하하.”
신현태는 잠깐 부들대다가 수혁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수혁의 아이디어이니, 수혁의 의사가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조태진 교수님도 도와주시면 더 빨리 되긴 할 겁니다.”
“음, 그래. 그럼. 앉아.”
“역시 수혁이. 네가 최고다!”
그렇게 수혁까지 자리에 앉고 나자, 비로소 연구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었다.
“야! 문 열어! 조태진! 문 열어!”
두런두런 진행되는 이야기의 배경음처럼 홍창기의 발광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