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첫 연구 (2)
“후.”
홍창기는 여전히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기껏 중환자실에서부터 따라왔다가 꼬리 자르기를 당할 뻔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조태진은 그런 홍창기를 보며 허허 웃었다.
“미안.”
“미안? 미안하다면 다냐?”
“동기끼리 왜 그러냐. 우리 수혁이도 있는 자리에서.”
“너 아까 저 친구 있는 자리에서 나 밀쳐 냈거든?”
“그랬나?”
“그랬나? 그랬나라고 했냐? 지금?”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조태진에게 홍창기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홍창기는 키만 컸지, 떡대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조태진은 키도 큰데, 떡대도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장난치듯 사람 하나를 강제로 도로 앉혀 놓을 수 있었다.
“으.”
“병원 개판이네. 개판이야.”
신현태는 그렇게 제압당한 홍창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곤 탁자 위에 놓인 향긋한 차를 집어 들었다.
‘일단 마음을 좀 안정시키자…….’
원래 인격 수양을 해야 할 정도로 성질이 더러운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요즘 의국 돌아가는 꼴을 보면 수양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형, 솔직히 개판은 아니죠.”
“하아.”
특히 조태진 같은 놈들이 형, 형거릴 때마다 더더욱 그러했다.
수혁은 아까보다 눈에 띄게 얼굴이 어두워진 신현태의 팔뚝을 조심스럽게 두드려 주었다.
“교수님. 일단……. 연구 얘기를 좀 드릴까요?”
“어? 어, 그래. 그래……. 수혁아…….”
그래, 이놈이 있지 않은가.
암만 형, 형거리는 버릇없는 교수들이 판치고 있다 해도.
수혁이 같은 레지던트가 있으니 태화 의료원이 망할 일은 없을 터였다.
차향도 좋겠다, 수혁이 생각도 났겠다.
이래저래 마음이 푸근해진 그는 수혁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응, 그래.”
“좋아.”
조태진도 홍창기도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입을 다물고 수혁을 바라보았다.
수혁은 아까 바루다와 나누었던 짤막한 대화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과장님은 이미 저에게 말씀을 주셨으니, 잘 알고 계시겠지만. 조 교수님과 홍 교수님은 잘 모르실 내용이라 다시 한번 언급하겠습니다.”
조 교수와 홍 교수.
둘이 언급되자 푸근해졌던 마음이 파도치듯 헝클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남의 속도 모르고 허허 웃고 있는 조태진을 보자, 왜인지 모를 심술이 뻗쳤다.
“아, 잠깐. 미안한데, 수혁아. 얘네 둘 필요 없으면 빼도 돼. 괜찮아. 내가 책임질게.”
그 때문에 빼라고 했는데.
“아뇨, 과장님. 두 분 데이터도 필요합니다.”
수혁이 이렇게 대꾸했다.
“아, 그래. 그렇구나.”
어쩌겠는가.
아이디어 내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게다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수혁인데.
해서 신현태는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나머지 두 교수는 그런 신현태를 아주 얄미운 얼굴로 흘겨보았고.
“아무튼……. 아까 드리려던 말은……. 요새 A.I.가 아주 핫하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A.I.가 핫한 것이 비단 IT 업계에서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의료 업계에서도 그랬는데, 특히 헬스 케어 사업에서 A.I.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지 오래였다.
여기 있는 조태진이나 홍창기나 아까 좀 모자란 모습을 보여 주어서 그렇지, 실력으로 당당히 태화 의료원 교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 아니던가.
당연히 국책 과제 하나쯤은 진행하고 있었고, 또 같이하자는 사람들과 미팅 또한 한 달에 몇 건 정도는 진행하고 있었다.
A.I.가 화두인 것 정도는 잘 알다 못해 체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화이자에서도 재작년 포럼부터는 A.I. 관련 세션을 따로 두고 있습니다. 조사해 보니 내년엔 아예 절반가량이 A.I. 연구 관련한 세션이라더군요.”
“오…… 절반.”
“네. 그래서 신현태 과장님께서 신약 관련 연구보다는 A.I. 관련 연구를 진행해 보자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음.”
“하긴.”
조태진도 홍창기도 사실 진짜 하고 싶은 건 신약 관련한 연구였다.
A.I.가 핫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당장 필드에서 급한 건 약이지 않은가.
특히 혈액종양내과 교수로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환자들을 맡고 있는 조태진은 그 누구보다 신약이 급했다.
‘신약이…… 쉽지 않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녹록지가 않았다.
대한민국의 바이오산업은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상황 아니던가.
아직 제대로 된 신약을 개발해 본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부끄럽지만 조태진도 임상 연구에나 참여해 봤고, 그 약도 다 외국에서 개발된 약들뿐이었다.
그러니 신현태의 판단은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영리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태화 의료원 내과 과장이라는 자리에 괜히 오른 건 아니란 뜻이었다.
“원래 의료 관련 A.I.라고 하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왓슨이 대표 주자였습니다. 우리 태화 의료원에서도 왓슨을 벤치마킹하여 바루다를 개발하기도 했고요.”
“음.”
바루다.
수혁의 다리를 절게 한 문제의 인공지능이었다.
적어도 여기 있는 세 명은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해서 수혁이 잠시 인상을 쓴 게 그때 그 사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벤치마킹이요? 그게 아니라 내가 왓슨보다 뛰어나거든요?]
‘내가 처음 봤을 때는 안 그랬을걸.’
[와……. 이만큼 키워 줬더니 은혜를 모르고…….]
‘너 내 머릿속에 살고 있는 거거든? 월세 모르냐?’
[와…….]
‘아무튼, 조용히 해 봐. 프레젠테이션 중인 거 안 보여?’
[와……. 내가 진짜……. 와…….]
실은 바루다가 발광하기 시작해서 그런 것이었지만.
아무튼, 모두들 수혁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다들 그래도 교수라 그 정도의 인내심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런 종류의 A.I.를 개발하려고 드는 곳은 없습니다. 왓슨이 공식적으로 개발을 중단하면서 더더욱 그렇게 됐지요.”
“음. 그렇지.”
“아직은 현실화 가능성이 떨어지니까.”
교수들은 어찌 되었건 학문적으로 제일 앞서가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직접 왓슨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주워들은 건 꽤 있었다.
특히 태화 의료원 내과 교수들은 바루다 때문에라도 왓슨과 그와 관련한 연구의 행방에 대해 빠삭한 편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은 진료 보조형 A.I.에 관한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영상의학과 그리고 병리과 쪽으로는 실제 상용화되거나 되기 직전의 모델들이 있죠.”
이게 소문이 좀 와전되는 바람에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영상의학과 지원자가 조금이나마 줄어든 적도 있었더랬다.
인공지능이 영상의학과를 대체한다 어쩐다 하는 소문이 돌았던 것.
하지만 아직은 전체적인 영상을 판독하는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은 없었다.
다만 지엽적인 진단에 도움이 되는 인공지능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 들어 봤는데.”
“특히 폐 결절은 그 유용함이 여러 연구에서 입증되었죠. 유방암 병리 슬라이드 검사에서도 그랬고요.”
“음.”
“흐음.”
수혁의 프레젠테이션은 늘 그러하듯 완벽했다.
연기자를 자처하는 사람답게 발음도 좋았을뿐더러 속도도 적당했다.
무엇보다 내용이 군더더기가 하나 없었다.
당연하게도 이 내용을 처음 듣는 조태진과 홍창기는 술술 빨려 들어갔다.
심지어 이 비슷한 얘기를 직접 해 주었던 신현태마저도 완전히 몸을 수혁을 향해 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과에서는 이걸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이게 제 의문이었습니다. 신현태 과장님이 제게 주신 숙제이기도 했고요.”
“내과에 적용이라…….”
“음…….”
당장 떠오르는 게 있거나 하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평소 이거에 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수혁과 얘기를 나눈 날 이후 맨날 이것만 생각하고 있는 신현태조차도 아직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지 않은가.
수혁은 잠시 교수들이 웅성거릴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그런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혁이 내놓는 아이디어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 수 있게 될 테니까.
“야……. 이거 어렵다.”
“그러게. 보조용 인공지능이라고 하면 뭐가 딱 하고 떠오를 줄 알았는데.”
보통 교수들은 아니, 의사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일쑤였다.
나는 현장에 있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필요를 제일 잘 알고 있다, 뭐 이런 식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지금껏 있어 본 적 없는 서비스에 관한 필요를 어떻게 아무 고민 없이 느낄 수 있겠는가.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중환자실의 알람을 듣다 보니……. 조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중환자실?”
“네.”
“어떤…… 아이디어지?”
마지막 질문은 신현태가 던진 것이었다.
아주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자신이 메인이 될 연구였으니까.
이 자리에 있는 조태진이나 홍창기는 기껏해야 제2 저자 정도나 되지 않겠는가.
“네, 과장님.”
수혁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답변은 오로지 신현태만을 바라보면서 해 주었다.
“내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환자의 위험을 예측하고 예방하는 겁니다. 특히 환자가 중하면 중할수록 그 중요도는 더더욱 올라가죠.”
“그래.”
“그러니까……. 예측과 예방을 도와줄 수 있는 인공지능이 있으면 어떨까요?”
“예측과 예방을 돕는다라……?”
“네. 우선 중환자실부터 시작해 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지금은 각각의 자리에서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그 자료를 스테이션으로 취합하는 겁니다. 1번 환자 활력징후, 2번 환자 활력징후 이런 식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
지금도 일부 심장 환자에 대해서는 시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장 환자의 경우엔 꼭 담당하는 간호사나 의사가 아니라, 누구라도 이상 소견을 발견하면 즉시 처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거……. 예산이 얼마더라. 얼마 안 했던 거 같은데.’
게다가 태화는 어느 정도 돈이 있는 병원이었다.
예전처럼 태화 그룹 차원의 후원이 빵빵한 건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건 흑자를 보고 있는 병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과는 그중에서도 제일 큰 과라 배정된 예산도 많았다.
“그럼 그 취합된 데이터를 가지고, 이 환자가 위험해질지 아닐지 결과를 도출하는 A.I.를 만드는 겁니다. 단순히 현재 활력징후에 대한 알람이 아니라…….”
“패혈증 예측 시스템 같은 거 말하는 건가?”
이게 아예 없던 얘기는 당연히 아니었다.
의사들은 늘 환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최선의 예후를 제공할 수 있을까에 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 아니던가.
그렇다 보니 패혈증과 같이 주요 이벤트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도 엄청나게 해 온 참이었다.
해서 여러 지표를 아 패혈증이 생길 확률을 계산하는 공식도 있었다.
아주 정확하게 %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진단에 도움이 되긴 했다.
“네. MEDS score(Mortality in Emergency Department Sepsis)를 이용하는 겁니다.”
“흠……. 그거 논문이……. 2003년에 나왔던가? 꽤 유의미했던 거 같은데.”
“네, 맞습니다.”
“음. 음…….”
신현태는 몇 번인가 턱 밑을 긁적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 만할 거 같아. 융합의학센터랑 미팅 잡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