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융합의학센터 (1)
융합의학센터.
태화 그룹에서 다른 분야 사람들과의 연구를 더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설립한 센터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태화 그룹 내 다른 계열사들과의 연결을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프로젝트 바루다도 융합의학센터를 통해 발전한 프로젝트였다.
“이렇게 그냥 바로 하실 생각이세요?”
얘기가 나오자마자 바로 핸드폰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신현태에게 조태진이 물었다.
융합의학센터는 병원 내에 조성되어 있는 조직이기는 했지만, 위치만 병원 안에 있을 뿐 실은 태화 생명 소속이었다.
당연히 아이디어 하나만 덜렁 가지고 가서는 얘기가 되질 않았다.
“어? 어……. 좀 그런가?”
신현태 또한 몇 번 융합의학센터 갔다가 별 성과 없이 돌아온 경험이 있었기에 바로 조태진의 말을 알아먹었다.
“요새 걔들 눈 높아져 가지고요. 어지간한 거로는 그룹 내 매칭은 꿈도 못 꿔요.”
홍창기 또한 조태진의 의견에 한마디 거들었다.
실제로 최근 융합의학센터에서 태화 전자나 바이오로 매칭해 준 사례는 거의 전무하다 싶을 지경이었다.
같은 그룹끼리 너무 하는 거 아니냔 말이 나올 정도로 까다로워졌더랬다.
‘눈이 높아진 게 아니라…….’
신현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잠시 수혁을 돌아보았다.
‘바루다의 실패 때문에 그렇지…….’
프로젝트 바루다.
세계 최고의 진단 목적 인공지능 개발 프로젝트.
당시만 해도 태화 의료원은 압도적인 차로 국내 제일을 달리고 있었고, 태화 전자도 의욕적이었더랬다.
그 때문에 투입된 자산이 거의 천억 가까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국내외 홍보 비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막판에 이르러서는 폭발 사고 무마하는 데 들어간 돈이 태반이 되고 말았지만.
아무튼, 바루다는 융합의학센터의 존폐를 위협할 정도의 흑역사가 되고야 말았고 이제 융합의학센터는 최대한 보수적인 접근만을 하고 있었다.
“일단 제가 자료 만들어 보겠습니다.”
모두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따지고 보면 이 사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수혁이 입을 열었다.
[새끼들이. 나 만들었으면 성공 아닙니까?]
바루다의 투덜거림을 들어 가면서였다.
“오, 그래? 네가 만들어 볼래?”
그 말에 신현태가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대꾸했다.
여태 수혁이 발표해 왔던 거의 모든 자리에 함께했던 그가 아니던가.
당연히 수혁이 얼마나 발표 자료를 잘 만들고, 또 그 자료를 활용한 발표를 잘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 제가 만들겠습니다.”
“일주일 정도 주면 될까?”
하지만 아직 이현종처럼 그 자리에서 뚝딱 만드는 걸 본 적은 없었더랬다.
만약 지금 NEJM에 실린 논문이 앉은 자리에서 나온 거라는 걸 두 눈으로 봤다면 일주일 운운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튼, 수혁은 신현태의 말에 딱히 기분 나빠하거나 하진 않았다.
자신이 이상한 거지 이 사람이 이상한 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일주일도 상당히 촉박한 것이었다.
대학 병원 생활이라는 게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뇨. 한 시간 정도면 됩니다.”
“어, 그래. 일……. 응?”
“한 시간이면 됩니다.”
“한 시간? 수혁아 융합의학센터 만만한 곳이 아닌데…….”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거 보시고 결정해 주시면 안 될까요?”
신현태는 자신만만해 보이는 수혁의 눈을 마주 보았다.
수혁을 잘 모르는, 그러니까 다른 레지던트들은 그가 거만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편이었지만.
실제 그와 부대껴 본 사람들은 오히려 수혁이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워낙에 실력이 뛰어나서 도드라져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
적어도 수혁을 좋아하다 못해 거의 사랑하고 있는 신현태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얘가 이렇게 나온다는 건…….’
단순히 자신감의 발로도 아닐 터였다.
그냥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 따름이리라.
“그래. 그럼 해 봐. 다들 한 시간 괜찮아?”
신현태는 그렇게 판단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과장으로서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있어 지금 해 버릴 요량이었다.
“네, 뭐. 회진만 다녀오죠.”
조태진 또한 수혁의 실력에 대해서,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한 시간 후라면 아마도 이현종이 들어갔던 회의가 끝날 거라는 점이었다.
‘현종이 형까지 오면 아수라장인데, 진짜.’
어떻게든 회의 끝나기 전에만 자료를 만들어 주길 바랄 따름이었다.
아무튼, 조태진은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후루룩 사라졌다.
그에 반해 홍창기는 좀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뭔……. 발표 자료를 한 시간에 만들어?’
아마 자기 혼자 있는데 이런 얘기 하는 레지던트를 봤다면 뒤집어엎었을 터였다.
학회 발표에 인이 박였다고 할 수 있는 자신도 발표 있으면 대개 일주일은 잡고 준비를 하거늘.
감히 융합의학센터같이 거대한 조직에서의 발표를 한 시간 만에 만든다고 해?
이건 좀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근데 그걸 믿어 줘?’
그를 더 황당하게 만드는 건 신현태와 조태진의 태도였다.
신현태야 워낙에 인격자로 소문난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잘못된 걸 그냥 넘어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서효석 교수와 싸우지도 않았을 터였다.
‘게다가 저 조태진이……?’
지금이야 나이도 들고, 또 미국도 다녀오고 하면서 매우 부드러워졌다고 해도.
레지던트 땐 실로 악마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았던 인간이었다.
또 그때만 해도 어느 정도의 체벌이 용인되던 시절 아니었던가.
티 안 나게 잘 때리는 레지던트가 일 잘하는 레지던트란 평도 들었던 시절이었고.
그런 측면에서 조태진은 거의 최고의 레지던트였더랬다.
근데 그 조태진이 이런 말을 듣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믿는 건가……?’
홍창기는 자신도 모르게 이제 막 노트북을 켜고 열중하고 있는 수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였는데, 그걸 신현태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야, 미심쩍으면 넌 빠져. 어차피 적으면 점수도 더 높고 좋아.”
“네? 아, 아뇨.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럼 그냥 믿어. 수혁이 믿어도 돼.”
“어……. 네.”
당황한 나머지 네라고 하면서 고개도 끄덕이긴 했지만.
여전히 미심쩍기는 했다.
해서 일단 여기서 좀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핑계 대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도 교수가 된 사람이니만큼 그 정도의 잔머리는 있었으니까.
“저…… 여기서 우리 환자 차트 좀 봐도 되죠? 1시간이면 다녀오기가 좀 그래서.”
“응? 얼굴 안 보고?”
“아까 다 보고 간 거예요. 검사 낸 사람들이 있어서 그것만 확인하면 됩니다.”
“그래? 그래, 뭐.”
홍창기면 그래도 고객의 소리의 단골손님은 아니지 않은가.
사실 태화 의료원 내과는 이상하게 꽤 성격 좋은 교수들이 많아서, 서효석 말고는 대개 다 괜찮은 편이었다.
환자들이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욕먹는 교수는 없었다.
‘서효석 빼고 말이지.’
생각하니까 또 열이 뻗친 신현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서류를 내려다보았는데, 또 서효석의 이름이 보였다.
‘내가 미쳤나?’
처음에는 그놈이 미워서 생긴 착각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실제 서효석이 올린 결재 서류였다.
무려 뭘 사 달라는 요청 서류였는데, 당연하게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나 진료를 활발히 하는 사람이라면야 뭐가 자꾸 필요하겠지만.
이놈은 아니지 않은가.
‘뭐야……. 뭘 사 달라고……. 음.’
물품 자체는 아주 특별할 건 없었다.
현미경과 그에 들어갈 시약 그리고 슬라이드 비용.
현미경은 진료할 때 필수적인 건 아니라 해도 연구할 때는 필수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걸 올린 놈이 서효석이라는 게 좀 이상했다.
“어, 서 교수.”
해서 전화를 걸었다.
정말 여기 써 있는 대로 연구에 쓰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서효석은 신현태가 알기로 제힘으로 논문 쓴 지가 벌써 10년은 된 사람이었다.
아니, 그전에도 그 논문들이 정말 제힘으로 쓴 건지 아니면 권력의 힘으로 쓴 건지 알 수 없었다.
“어? 네, 과장님.”
“이거 결재 올린 거 말야. 현미경.”
“아, 네. 그거 필요해서요.”
“어…… 그게 진짜 그냥 필요하다고만 써 있네?”
“원래 연구용 자재는 그렇게 사는 거 아닌가요?”
서효석은 꽤 당당했다.
신현태는 이게 아마도 그의 무식함에서 발로했을 거로 생각했다.
“그……. 그건 본인한테 할당된 연구비가 있을 때 얘기지. 서 교수는 없잖아, 연구비.”
실제로 연구비를 받은 사람은 연구비를 활용해 무언가를 살 때, 아주 세세한 내역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할당된 연구비지 않은가.
그나마 결재를 받게 만든 것은, 정말로 너무 엉뚱한 곳에는 쓰지 않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과에 할당된 공동 연구비를 쓰려고 할 때는 그보다 훨씬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했다.
“저 지금 연구비 없다고 무시하는 겁니까?”
“무시하는 게 아니라, 없는 걸 없다고 하는 거야. 서 교수.”
“하.”
서효석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실 그 나이 또래에서, 그것도 태화 의료원처럼 큰 병원 교수로 있으면서 연구비 한 푼 없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터였다.
당연하게도 열등감의 요인이었는데 그걸 건드렸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물론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면 기분 나빠하기 전에 반성부터 했겠지만.
“그래서. 그거 못 사 준다고요?”
“아니,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는데.”
“지금 그렇게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아니, 아냐. 제대로 된 이유가 있으면 사 주지. 어차피 현미경은 한 번 사 두면 다른 교수들도 쓸 수 있으니까.”
“그럼 그냥 사 주면 안 됩니까?”
“그게……. 그러기엔 이거 좀 고가야.”
적어도 신현태가 쓰는 현미경보다는 훨씬 비싸 보였다.
모델명에 대해 빠삭하지 않다 보니 뭔 기능이 더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500이 넘어갔다.
아무리 태화 의료원이라고 해도 공동 연구비 조로 주는 돈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이런 돈을 팡팡 쓰는 건 좀 문제가 있었다.
‘이걸로 어? 과 발전 모임도 해야 하고……. 엠티도 가야 하고……. 그렇단 말이지.’
그 소중한 돈을 다른 놈도 아니고 서효석한테 써?
수혁이라면야 까까 사 먹는다고 해도 쌈짓돈까지 얹어서 주겠지만.
이놈은 안 됐다.
“아……. 그래서 안 돼요?”
“아니, 이유를 말해.”
“연구요.”
“무슨 연구.”
“그……. 뭐 당뇨.”
“당뇨? 당뇨 무슨 연구 하고 있는데? 자네 아직 연구 계획서 낸 것도 없잖아?”
원래 이쁜 놈은 대강 넘어가도, 미운 놈은 까다롭게 굴게 되는 법이지 않은가.
가뜩이나 형, 형거리는 놈들 때문에 오늘 심기가 좀 불편하기도 했고.
이래저래 서효석은 잘못 걸린 셈이었다.
“아……. 그……. 좀 그냥.”
“안 돼. 이거 다시 내.”
“하……. 나 원.”
서효석은 그런 말을 끝으로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놈 봐라, 이거. 과장 전화 탕탕 끊고. 하……. 나……. 이 새끼 이거.”
해서 신현태는 자신의 핸드폰을 노려볼 정도로 화가 뻗쳤다.
심지어 욕까지 해 댈 지경이었는데, 인격자로 소문 난 그로서는 너무하다 할 정도로 특별한 일이었다.
하지만 홍창기는 딱히 거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수혁의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한 시간도 안 걸릴 수도……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