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융합의학센터 (2)
‘미쳤나?’
홍창기는 수혁의 뒤쪽에 자리한 이래로 거의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식으로 피피티를 만드는 건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미 정해진 스크립트가 있는 것처럼 너무 빨랐다.
‘에……. 어디까지 했지?’
[‘진료 보조 형식의 인공지능이 필요하다’까지.]
‘아, 오케이. 좋아. 자료는…….’
[이쪽 자료는 여기 저장되어 있어요. 그래, 거기. 4번 폴더.]
‘좋아, 좋아.’
사실 스크립트가 이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바루다가 줄줄 읊어 대고 있었으니까.
수혁의 머릿속에 자리한 이래 계속해서 성장해 온 바루다는 이제 거의 종합 인공지능으로서의 능력을 거의 다 갖추고 있었다.
비단 진단뿐 아니라, 거의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사진을…… 다 갖고 다니는 건가……?’
홍창기는 툭툭 완성되어 가는 피피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말해서 세련되었다거나, 화면이 화려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투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 화면만 봐도 내용이 그려지는 피피티였다.
심지어 홍창기는 사실 진단 보조용 인공지능에 관해서는 오늘 처음 듣는 것인데도 그러했다.
이 말은 곧 수혁이 오늘 발표할 내용에 관해 꿰뚫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 다했다.”
홍창기의 벌어진 입술이 슬 말라가기 시작할 때쯤, 수혁이 툭툭 노트북을 두드렸다.
그러자 서효석과의 통화를 끝으로 쭉쭉 결재하던 신현태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 그래? 그럼 이제 전화해서…… 약속 잡을까?”
“네.”
“이게 생각해 보니까 오늘 안 될 수도 있는데……. 아까 전화할 걸 그랬나.”
융합의학센터란 곳이 예전에는 정말이지 열린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닫힌 공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문턱이 높아져 있었다.
바루다의 실패 탓이라고 하니, 내과로서는 별로 할 말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의사들이 또 어디 가서 인공지능 관련 연구를 할 수 있겠는가.
당장 C 언어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만 있는데.
어떻게든 도움을 받긴 받아야 된다는 뜻이었다.
따르릉.
아무튼, 신현태는 전화를 걸었고, 곧 상대가 응답했다.
“네, 태화 융합의학센터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내과 과장 신현태입니다.”
“아……. 네, 과장님. 오랜만이에요.”
공교롭게도 전화 받은 사람이 신현태와 함께 바루다 연구에 관여했던 연구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거 어그러지고 한 번도 전화 안 했네.’
신현태는 조금은 민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전화를 걸었으니 용건은 전달해야 하지 않은가.
심정 같아서야 그냥 끊고 싶었지만.
수혁이 보고 있었다.
‘수혁아…….’
아들 같은 녀석을 실망시킬 수야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수혁은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아예 단 한 번도 없었다.
“어, 다름이 아니고요. 이번에 새로 제안할 게 있어서요.”
“아, 새로요?”
연구원의 말이 마치 ‘바루다는 버렸나요?’ 등으로 들려왔다.
신현태는 워낙에 인격자인 데다가, 남들에게 싫은 소리도 잘 못 하는 사람인지라 상당히 곤욕스러웠다.
하지만 수혁이 보고 있었다.
‘수혁아…….’
신현태의 수혁에 대한 애정은 본성을 거스를 정도였다.
“네, 새로. 인공지능 관련한 건데.”
“아……. 인공지능이요?”
공교롭게도 바루다와 같은 인공지능인지라, 연구원의 가시가 돋친 말투는 계속되었다.
그 연구원 또한 바루다 건이 무너지면서 한직 비슷하게 떨려 난 입장이라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이미 작정한 이상 멈출 수는 없었다.
“네. 진단 보조 목적이요.”
“음…….”
“돼요, 안 돼요? 지금? 그것만 알려 줘요.”
“어…….”
연구원은 신현태와 꽤 오래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신현태가 저 혼자 알아서 수혁의 시험대 위에 올랐다는 건 전혀 몰랐기에, 그저 이 사람이 진짜 급하고 어쩌면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되……. 됩니다. 저 말고요. 다른 연구원이 있어요.”
“좋아요. 그럼 지금 바로 갈게요.”
“피피티 미리 안 보내시고요?”
“저 내과 과장입니다. 제 선에서 오케이 떨어진 연구 계획서예요. 계획서까지 미리 점검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맞는 말이긴 했다.
융합의학센터장이라고 해 봐야 신현태보다 기수도 아래였고.
연구원은 아예 직급으로는 비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그저 신현태가 지금까지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굴었을 뿐.
힘의 논리로 밀어붙인다면, 이러한 요구를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아무튼, 가겠습니다.”
해서 신현태는 반강제적으로 미팅을 성사시킨 후 전화를 끊었다.
나 잘했지? 라는 얼굴로 수혁을 돌아보면서였다.
[누군 아이디어 내고 발표 자료까지 만드는데, 이것도 못 하면 죽어야죠.]
바루다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수혁은 그러지 않았다.
‘넌 사람도 아냐, 정말.’
[저 사람 아니죠.]
‘하.’
일단 바루다에게 핀잔을 한번 날려 준 후, 신현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정말 대단하세요, 과장님.”
“아, 아냐. 이 정돈 해야지. 아무튼, 이제 가자. 아, 조 교수는…….”
신현태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회진 잠깐 돌고 온다던 조태진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워낙에 덩치가 큰 탓에 있으면 보여야 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시야에 안 보인다는 건 여기 없다는 뜻이었다.
“버리고 가죠.”
조태진의 동기이자, 꽤 친하게 지내는 교수 중 하나인 홍창기가 매몰하게 말했다.
신현태는 그런 홍창기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교수가 교수한테 버리고 가자니…….’
통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체 언제 태화 의료원 내과가 이렇게까지 개판이 되었단 말인가.
‘이게 다 현종이 형 때문이야…….’
그 인간이 체통 못 지키고 팔불출처럼 돌아다니니까 이렇게 된 거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진짜 이제 가야 될 거 같은데요? 가면서 전화드릴까요?”
“어? 어. 수혁아, 그럴까?”
하지만 수혁의 말을 듣고 보니 통탄이고 나발이고 다 잊혔다.
그저 자신이 욕했던 이현종보다 더한 팔불출이 될 뿐이었다.
해서 수혁은 두 교수와 함께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조태진에게 전화를 걸면서였는데, 웬일인지 받지를 않았다.
쿵쿵쿵쿵.
대신 얼마 지나지 않아, 융합의학센터로 향하는 복도 전체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미친놈이 병원에서 이렇게 뛰…….”
역정이 난 신현태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달려오는 이가 조태진이었다.
“이 치사한 놈들아! 조금 늦었다고 바로 버려?”
쩌렁쩌렁 소리치며 달려오는 꼴이 꼭 멧돼지 같았다.
하지만 신현태나 수혁이나 딱히 그렇게 경계를 높이진 않았다.
신현태는 조태진보다 한참 윗사람이었고, 수혁은 조태진이 애정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억.”
그러니 분노를 받은 사람은 역시나 홍창기 하나뿐이었다.
“이 새꺄. 너가 그랬지?”
“억.”
억울하진 않았다.
버리고 가자고 한 장본인이었으니까.
“어어, 그러다 사람 죽어, 조 교수.”
“이런 놈은 죽어도 돼요.”
“병원에서……. 교수가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지.”
“아, 그런가?”
“그런가는 무슨 놈의 그런가야. 그만해, 이제. 어어, 진짜 CPR 쳐야 될 거……. 휴.”
조태진은 그 우람한 팔뚝으로 홍창기의 목을 걸어 잠그고 있다가, 홍창기의 숨이 꼴깍거리기 시작할 때쯤에서야 놓아주었다.
그 여파로 홍창기는 비틀거리며 뒤처졌지만.
신현태나 수혁이나 딱히 보폭을 맞춰 주진 않았다.
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조태진이 쉬지 않고 입을 놀려 댔기 때문이었다.
“왜 늦었는지도 안 물어봐요?”
“어? 회진 돌다 늦은 거 아냐?”
“아뇨, 아뇨. 지금 환자분들 다 좋아요. 요새 이상하게 좋아, 진짜.”
조태진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 댔다.
진정성 있어 보이기도 했고, 그 목이 지나치게 두꺼워 보이기도 해서 신현태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설마하니 형을 치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 그래. 그럼 왜 늦었는데?”
“그……. 재수가 없으려니까.”
“왜, 왜. 왜 그렇게 인상을 써.”
“서효석 교수 만났어요. 뭐가 잘못된 건지 화를 엄청 내더라고요.”
“아.”
서효석의 악한 인성에는 딱히 신현태가 책임이 없었지만.
지금 서효석이 화가 단단히 난 데에는 신현태의 책임이 지대하지 않은가.
당연하게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뭐래?”
“뭐, 잘은 모르겠어요. 개새끼 어쩌구 하면서 누굴 욕하는데.”
“개새끼? 이 새끼가.”
“아니, 제가 형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알아, 그건. 아무튼, 욕만 해?”
“아뇨. 한참 그렇게 욕하다가…….”
“욕하다가?”
신현태의 말에 조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걸음을 조금 늦추면서였는데, 그제야 홍창기는 일행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후.”
조태진은 홍창기가 몇 번인가 캑캑거릴 때까지도 말을 하지 않다가, 신현태가 한 번 더 캐묻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디 가냐고 하더라고요?”
“어디 가냐고? 아, 조 교수?”
“네. 그래서 융합의학센터 간다고 했죠.”
조태진은 그랬을 터였다.
생긴 거 만큼이나 성격도 우직했으니까.
거짓말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위인이었다.
“음.”
“그랬더니, 왜 가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말했어? 우리 지금 가고 있다고?”
“네. 말했죠.”
“하.”
신현태는 뭔가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자신의 장인이 끗발 날리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점잖아도 너무 점잖았다.
신현태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이니, 그 장인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점잖을지는 쉬이 예상이 갈 터였다.
‘하지만 서효석 그쪽은…….’
서효석 인성이 어디 괜히 튀어나왔겠는가.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말을 그보다 더 부정적으로 잘 보여 주는 사례도 없을 거란 얘기가 공공연히 돌 지경이었다.
둘 다 자신이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 잘 알았고.
그 힘을 너무 잘 휘둘렀다.
“그랬더니, 뭐래?”
“뭐라고는 안 하고……. 바쁘니까 가라고 하면서 웃더라고요. 바쁘긴 젠장. 바쁜 사람 잡아 놓고 욕해 댄 게 누군데.”
부끄러운 말이지만 서효석이란 인간이 병원에서 바쁠 일은 없다고 보면 되었다.
어지간하면 환자를 그 사람에게는 보내질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진료를 못 하면 연구라도 잘해야 되는데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이놈이 바쁘다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밖에 안 되었다.
“이런.”
“왜요?”
“아냐, 일단 가자.”
“네, 형.”
“과장이라고 해 줄래?”
“사석이잖아요.”
“병원이야.”
“아…….”
“아는 개뿔이…….”
신현태는 그리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저어 댔다.
시선 구석에 걸친 수혁을 힐끔거리면서였다.
‘이 자식이 깽판을 쳐 놨으면……. 이거 어쩐다?’
발걸음은 여전히 경쾌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