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43화 (143/1,303)

143화 이제 많이 했다 (1)

“약속……. 약속하신 겁니다?”

연구원은, 그러니까 후에야 자기 이름이 구성민이라고 밝힌 연구원은 연신 신현태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인격자인 신현태도 짜증이 날 정도로 끈질겼지만.

이해는 갔다.

밥줄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그렇다니까 그러네. 애초에 요새 이사라고 남 함부로 막 자르고 그럴 수도 없어요. 알잖아요. 병원만 봐도 딱 느껴질 텐데?”

그 옛날 한 과의 과장이라는 사람이 가지는 권력이란 건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사람 말 한마디에 온 의국이 벌벌 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지던트 자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후의 앞길까지 가로막을 수 있었더랬다.

하지만 이제 그런 소리 어디 가서 했다간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일 안 하고 개판 치는 레지던트도 못 자르는 마당에……. 허물없는 정직원을 어떻게 잘라요.”

“그…… 그래도 미운털 박히면.”

“그 털은 걱정 말고. 여기 뽑아 줄 사람 많아요. 여기 수혁이 원장 아들에 김다현 이사랑 누나 동생 하는 사이라니까?”

사실 누나 동생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김다현 전무 이사가 퇴원하면서 남긴 편지에는 도움을 청하면 친누나처럼 도와주겠다는 말이 적혀 있기는 했더랬다.

이현종 원장 아들로 알려졌지만, 실은 고아원 출신이라는 걸 그녀의 비서가 알아낸 탓이었다.

그러니 거짓말하는 건 아니라고, 신현태는 자기 최면을 걸고 있었다.

“오……. 그렇군요.”

설마하니 태화 의료원 내과 과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거짓말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구성민 연구원은 그저 좋아할 따름이었다.

아까 서효석 교수한테 전화 왔을 때만 해도 참 곤란하기 짝이 없었는데.

일이 이렇게 돌아가게 될 줄이야.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구성민 연구원의 어깨를 이번엔 조태진이 두드렸다.

솥뚜껑만 한 손이 쾅쾅 두드려 대는 통에 심장이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진행하는 겁니다?”

“아, 네. 그럼요.”

“근데 어떻게 진행이 되는 거예요? 대강 프로세스가 어떻게 돼요?”

신현태야 이 병원에 오래 있었고, 바루다의 태동부터 함께했지만.

조태진은 그렇지가 못한 상황이었다.

그가 교수 되고 정신 차려서 바깥세상에 고개를 돌릴 만한 여유가 생겼을 땐, 이미 바루다가 터져 버린 후였다.

“아……. 우선적으로 제가 검토한 사항을 이 연구 발표와 함께 다듬어서 계획서 형태로 센터장에게 올립니다. 센터장님이야 연구 못 도와줘서 안달 난 분이라 단 한 번도 거기서 리젝트 당한 적은 없고요. 그럼 관련 그룹 계열사 연구 센터로 전달이 되는데, 이 경우에는 이제 전자죠.”

만약 신약 관련한 연구 계획서였다면 태화 바이오로 연결이 될 터였다.

바루다로 큰 실패를 겪은 태화 전자와는 달리 바이오는 이렇다 할 이벤트는 없어서 제법 잘 받아 준다는 소문이었다.

다만 큰 금액을 할당해 주지는 않아서 앞으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긴 어려울 거 같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전자라. 거기서 만약 안 받아 주면 어떻게 돼요?”

“안 받아 줄 거 같진 않은데…….”

구성민 연구원은 사실 전자 쪽 전공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연구 설계 관련한 박사라고 보면 되었다.

직접 연구에 참여한 건 박사 과정 이후론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이건 딱 될 물건이었다.

완벽한 계획에 전자만 끼얹으면 될, 그런 물건.

“만약에 말이죠. 만약에.”

“그럼 본교 R&D 센터랑 협력하에 할 만한 회사를 물색하게 됩니다. 만에 하나 전자 심사에서 떨어지더라도……. 이만한 계획서면 달려들 회사는 많아요.”

“그렇군요. 다행이네. 우리 수혁이 헛고생시키면 안 됩니다, 연구원님.”

“어……. 네네.”

구 연구원은 대체 수혁이 이들에게 뭘까란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 아들이라 잘해 준다기엔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그가 아는 대학 병원 교수들은 자존감 하나로 똘똘 뭉친 사람들 아니었던가.

회장 아들 아니고서야 그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할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똑똑하긴 하던데…….’

발표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우수한 사람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교수들이 다들 발 벗고 나설 정도인가?

저거 혼자 한 것도 아닐 텐데.

뭐 이런 생각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사이 신현태와 수혁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센터를 빠져나왔다.

“근데 말이에요, 현태 형.”

조태진은 그 센터가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될 때쯤 입을 열었다.

평소와는 달리 퍽 심각한 얼굴이었다.

“왜. 그리고 과장님이라고 좀 해 줄래?”

“사석인데요, 뭐.”

“아니……. 여기 병원이고……. 옆에 병원 사람들이…….”

신현태는 말을 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태진 나이가 몇 갠데 사석과 공석의 차이를 알려 줘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조태진은 당당하기만 했다.

“우리 다 가족 같은 사이 아닙니까? 홍창기 교수님 빼고요. 야, 넌 귀 막어.”

그는 홍창기의 귀를 강제로 막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호칭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튼, 형.”

아무리 봐도 쉬이 바꿀 거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더 실랑이하기도 귀찮았고.

해서 신현태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너 마음대로 해라. 뭔데.”

“서효석 교수님 말이에요. 그 사람 그거 이대로 둬도 되겠습니까?”

“아……. 그 자식. 하……. 진짜 어이가 없긴 해, 그치?”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더니.

지금도 태화 의료원 내과 망신은 다 시키고 다니는 주제에 이런 갑질까지 해?

뭐 좀 잘난 구석이라도 하나 있으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요. 뭐 좀……. 알아볼까요?”

“뭘 알아봐.”

“자를 만한 건수 있는지 없는지요.”

“네가 무슨 수로 알아봐. 친해?”

“그 인간 친한 사람 병원에 없죠.”

“거봐.”

신현태라고 해서 그 생각 안 해 봤겠는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벌써 열 번은 더 잘랐을 터였다.

하지만 건수가 있어야 했다.

아까 말했든 레지던트 하나 자르는 데에도 그 근거가 어마무시하게 필요해진 세상 아니던가.

하물며 교수는 오죽할까.

“그냥 똥이라고 생각해. 구 연구원한테 피해는…….”

신현태는 잠시 융합의학센터를 돌아보았다.

저길 설마 건들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다.

아마 정상인이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었다.

막말로 이 회사가 자기 건 아니지 않은가.

‘아냐……. 그 자식은 가능해.’

하지만 서효석이란 인간은.

아니, 그 집안사람들은 죄다 좀 이상했다.

“내가 단도리 할게. 장인어른이랑 오랜만에 술 한잔해야겠네.”

“아, 네. 뭐……. 알겠습니다.”

“행여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괜히 어? 뒤 캔다고 소문이라도 나 봐. 그 자식 절대 가만 안 있을걸.”

그래 봐야 신현태에게는 흠집 하나 내지 못하겠지만.

조태진에게는 아마 꽤 타격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아무튼, 이 태화 의료원 자체가 태화 생명의 자회사 격이었으니까.

“그리고 인제 그만 놔 줘. 홍 교수 그러다 죽겠다.”

“아……. 네.”

신현태의 말에 조태진이 팔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그러자 귀가 틀어막힌 채 버둥거리던 홍창기 교수가 마치 버드나무라도 되는 듯 휘청거리며 비틀거렸다.

하도 세게 틀어막힌 까닭에 귀의 압력이 변한 탓이었다.

“이, 이 무식한 놈아! 아파!”

“아팠어? 그러라고 한 건 아닌데, 미안.”

“이……. 이…….”

“미안. 이따 밥 쏠게. 그리고 이거 끼워 줬잖아. 아무리 봐도 큰 건인데.”

“그…….”

홍창기는 저도 모르게 수혁의 눈치를 보았다.

이게 어딜 봐서 조태진이 끼워 준 거란 말인가.

수혁이 끼워 준 거지.

[자, 지금입니다. 준비했던 멘트 쏘세요.]

바루다는 그런 홍창기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수혁의 병원 내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서였는데, 수혁도 동의한 바 있었다.

“홍 교수님. 조 교수님. 연구 통과돼서 진행하게 되면 환자 정보 얻는 것도 도와주세요. 감사드립니다.”

[캬 좋다. 이렇게 겸손하고 인성이 너그러울 수가 있는 건가!]

바루다마저 몸서리칠 정도로 훌륭한 인사였다.

당사자인 조태진과 홍창기가 감동 먹은 얼굴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과장도 아니었고.

“오……. 그래. 그럼. 성심성의껏 도울게.”

“물론이지. 나도 도울게. 우리 호흡기내과 중환자실 데이터 다 줄게. 동의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어, 어! 나도 동의서 알아서 해결할게. 절대 우리 수혁이 귀찮게 안 할게.”

“나도. 우…… 아니, 이수혁 선생 귀찮은 일 없을 거야.”

홍창기가 얼떨결에 우리 수혁이라는 실로 이상한 호칭을 따라 할 뻔할 지경이었다.

신현태는 그런 둘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쓰게 웃었지만, 다행히 이 이상한 시간이 무한정 길어지지는 않았다.

다들 바쁜 사람들인 덕이었다.

삐삐삐.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여기저기서 전화가 울려 댔다.

제일 먼저 달려나간 것은 홍창기였다.

“이런 망할. 어제 입원한 환자네. 나 가 볼게요!”

ARDS.

Adult Respiratory Distress Syndrome(성인 호흡 곤란 증후군) 또는 acute respiratory distress syndrome(급성 호흡 곤란 증후군)으로 불리는 병으로 진행한 환자였다.

처음부터 태화 의료원에서 봤으면 좀 달라졌을 수도 있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못했다.

“아, 나도. 아……. 이 환자분 오셨네…….”

다음은 조태진이었다.

아무래도 혈액종양내과 중에서도 주로 혈액암을 보는 사람이다 보니 환자들이 아무래도 상태가 급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 온 환자도 ALL(Acute lymphatic leukemia: 급성 림프성 백혈병) 환자로 잘 관리되던 환자였는데 재발했는지, 출혈 경향을 보이며 왔다고 했다.

워낙에 외래 볼 때도 신경 쓰던 환자라 그런지 조태진 또한 나는 듯이 사라졌다.

“음. 나도 오늘 좀 신경 쓰이는 패혈증 환자가 있어서 가 볼게. 수혁이 너도 오후 회진 돌아야지?”

“아, 네. 과장님. 오후 회진…….”

수혁은 말끝을 흐렸다.

지금 수혁은 다름 아닌 서효석 교수 밑에서 내분비내과를 돌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환자 관리야 수혁이 완벽하게 하고 있으니 상관없긴 했지만, 그래도 환자들은 불만이 있었다.

대체 날 입원시킨, 아니면 입원시키라고 한 서효석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일관성 있게 환자를 안 봤으면 잘렸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나 말이야…….’

이 나쁜 놈이 눈치 하나는 또 기가 막히게 빨랐다.

해서 환자 중에 VIP가 있거나 하면 그 사람만큼은 극진히 보살폈다.

그 때문에 윗선에서는 서효석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그저 일부에서나 도는 소문이라고 일축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아, 맞아. 서효석이지. 그래……. 힘내라.”

신현태는 그런 수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자리를 떴다.

수혁은 그 길로 내분비내과 병동으로 돌아와 회진 돌 준비를 했다.

교수 회진이 사실상 없었기에 회진은 수혁, 안대훈, 우하윤 이 셋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면 되었다.

보통은 그랬다.

한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 수혁이 형.”

“왜?”

“서 교수님 오셨는데요?”

“응?”

고개를 들어 보니 정말로 서효석이 있었다.

그것도 잔뜩 똥 씹은 얼굴로.

그는 쿵쿵 발소리를 내며 스테이션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야, 이수혁. 너네 아직 내분비 돌면서 회식 안 했지?”

“아, 네. 교수님.”

“오늘 하자. 30분 안에 준비해서 1층으로 와. 오늘 술 좀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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