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이제 많이 했다 (4)
수혁은 물 뜨러 가는 척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이 테이블 사람들은 다 꽐라가 된 터라 별 어려움이 없었다.
비록 영업 사원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긴 했지만, 그는 지금 하윤과 함께였다.
“아, 아! 우창윤 교수님 따님이시구나!”
공교롭게도 아선 병원과 태화 의료원 담당자가 같은 사람이었다.
워낙에 거리가 가까운 데다가, 아선 병원 교수 중에 태화 의과대학 출신들이 많아서였다.
보통 태화를 잡으면 아선도 잡는다, 뭐 이런 말이 공공연히 돌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창윤은 얘기가 좀 달랐다.
자존심이 세서 그런가, 태화에서 쓴다 그러면 다른 약을 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별명이 난공불락이었는데, 그분이 애지중지하는 따님이 앞에 있었다.
“네, 뭐. 만나 보신 적 있으세요?”
“네? 네. 그렇죠. 만나 주기는 하세요. 약은 안 써 주시지만.”
“저희 아빠가 좀 고집이 세죠.”
“그러…… 아니, 아뇨. 훌륭하신 분이죠.”
해서 영업 사원은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확실히 영업 사원은 다르네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업을 하네요.]
‘그러니까.’
[잘된 일이죠.]
‘그렇지. 우리한테는 잘됐지.’
수혁은 잠깐 다른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서효석의 뒤로 돌아갔다.
서효석은 만취를 넘어 거의 마취 상태였기 때문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전화만 걸고 있을 뿐이었다.
“이 새꺄……. 그거 어떻게 보전할 거야. 어? 너 사기로 건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격양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젠 거의 핸드폰을 부술 거 같은 분위기였다.
“사기라뇨? 형님이 알아서 투자하신 거잖아요?”
그렇다 보니 상대방의 목소리도 상당히 컸다.
수혁이 딱히 귀를 가까이 댈 필요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냥 뒤에 서 있기만 해도 마치 도청이라도 하는 듯 죄다 들렸다.
“이 새꺄! 너가 100% 오른다고 했잖아!”
“왜 이렇게 화를 내요? 술 먹었어요?”
“안 먹게 생겼냐? 내가 오늘 푼돈 그거……. 그거 해 보겠다고 하다가 시발 욕먹었는데?”
“그러니까 왜 그 돈을 다……. 코인에 넣으셔 가지고…….”
코인이라.
수혁은 2, 3년 전 광풍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던 사태를 떠올렸다.
그때 수혁은 학생이기도 했고 또 워낙 그런 부류의 재테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몰랐지만.
동기 중에는 마이너스 통장으로 몇천씩 날린 친구들도 있었더랬다.
[코인에 대체 얼마를 태운 걸까요?]
‘모르지, 그야. 일단 들어 보자. 뭔가……. 냄새가 나.’
[그렇죠?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수혁과 바루다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서효석의 외침은 계속되었다.
특히 방금 상대방의 말이 자극되었는지, 목소리가 더더욱 커져 있었다.
“너, 너! 너가 만든 거잖아! 된다며!”
“형님, 저도 털렸어요. 아니, 제가 제일 많이 털렸어요……. 그리고 그건 형님 책임이죠. 괜찮다고 했잖아요.”
“기획재정부 의견은 그랬어! 그걸 법무부가 나설 줄 누가 알았나?”
“아무튼, 털린 건 털린 거죠. 정확히 얼마라고요?”
“10억.”
“허이구. 10억.”
10억이라는 숫자에 상대방의 입에서 히익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쳤나?’
[코인에 10억을 태워요?]
수혁이나 바루다의 반응도 비슷했다.
세상에 10억이라니.
수혁 생각엔 10억이 있으면 딱히 돈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그걸 더 벌겠다고 코인에 다 태우다니.
“그거……. 아버지는 아직 몰라요?”
“몰라, 아직은. 근데 이제 시간 문제야……. 집 팔고 다른 데 가신다잖아. 담보 대출받은 거 알게 되면…….”
게다가 얘기를 들어 보니 자기 돈도 아니고 은행 돈이었다.
그것도 지 명의로 빌린 것도 아닌 거 같았다.
진짜 미친놈인가 싶었다.
“그거 말려는 봤고요?”
“말려 봤지? 근데 노인네가 이제 은퇴할 때가 되니까 전원생활이 하고픈지……. 아무튼, 팔긴 팔 거야.”
“음…….”
“그러니까 좀 수 좀 내 봐. 너……. 너 내가 진짜 어? 많이 도와줬잖아!”
“알죠, 아니까 이렇게 고민하죠. 제가 형님 덕에 수주한 게 얼만데…….”
수주라.
뭔가 서효석이 힘을 쓴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녹음기 온.]
‘오케이.’
이대로 두고 있으면 점점 수상한 얘기가 흘러나올 거 같았다.
오히려 너무 수상해서 수혁이 고대로 말을 전달한다 해도 아무도 믿을 거 같지 않은 그런 얘기들이.
해서 수혁은 바루다의 조언을 듣고는 슬며시 핸드폰 녹음 기능을 켰다.
순간 효과음이 울렸지만, 스피커 쪽을 잘 막아서 주변으로 번지진 않았다.
아마 울렸어도 사실 별 상관은 없을 터였다.
안대훈의 코골이 소리가 가려 줬을 테니까.
서효석은 정신이 거의 다 나가 있었고.
“그래, 그러니까 좀 쥐어짜 봐.”
“근데 연구비……. 그거 안 돼요? 여태 잘했잖아요?”
“생명에서 나올 때야 쉬웠지. 그거 어차피 우리 꼰대가 결재하는 거라 감사도 없었고.”
서효석이 하는 얘기는 거의 몇 년 전에나 통용되었던 얘기였다.
당시 태화 그룹은 태화 의료원을 국내 최고로 만들고, 그 브랜드 가치를 무기로 태화 생명에 보험을 들어야 진료 볼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자 했었더랬다.
이를테면 미국처럼 의료 민영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는 얘기.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흐지부지되고 만 옛날 꿈이었다.
1등 자리도 위태로운데 어느 세월에 제도를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아, 그때 좋았죠. 형님 덕에 현금 많이 만졌지.”
“그거 나 좀 꿔 줘.”
“제가 5억까지는 해 드린다니까요? 근데 왜 10억이야. 왜 이렇게 많이 태웠어요.”
“에이 시발. 내가 제일 속 쓰려.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어요. 알았어. 음……. 5억……. 하, 5억. 이건 쉽지 않은데.”
말이 쉬워 5억이지, 진짜 많은 돈이었다.
태화 의료원이 다른 대학 병원들보다 연봉이 후한 편에 속하는 데도 5억이면 이현종 원장 연봉보다도 더 많았다.
세계 최고의 심장 내과 의사 연봉도 넘는 돈이라는 뜻이었다.
“아, 맞아.”
상대방은 잠시 한숨만 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술에 취한 서효석은 졸다가도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번쩍 눈을 떴다.
어찌나 황급히 눈을 뜨는지 수혁은 그가 술에서 아예 깨는 줄 알았더랬다.
“왜, 왜.”
물론 그건 아니었지만.
잠시 후 서효석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로 상대방에게 절박한 어조로 물었다.
상대방은 몇 번인가 헛기침해 대고는 입을 열었다.
“아직……. 아버지 이사잖아요?”
“그렇지. 우리 꼰대 여전하지. 왜 이사 가려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아직 몇 년은 너끈할 텐데.”
“태화 의료원에 그 융합의학센턴가 뭔가. 그럼 아직 거기 승인 위원회 위원이시죠?”
“어? 어, 그렇지?”
“그럼……. 연구비 좀 부풀려서 받는 거 어때요? 다른 데로 갈 거……. 가라로 프로젝트 올려서 이쪽으로 돌리는 거지. 그쪽 연구원들한테 약도 좀 쳐 놨다고 하지 않았나?”
“야, 그게 되겠냐? 가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상대방은 꽤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했지만.
서효석이 볼 때는 영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상대방보다는 서효석이 내부 사정에 대해 더 밝아서였다.
가라 프로젝트라니.
아무리 교수라고 해도 될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는 법이었다.
“안 돼요?”
“안 돼.”
“그럼……. 아, 그래. 뭐 최근에 통과됐거나, 통과될 만한 프로젝트 있어요?”
“통과된 프로젝트……?”
서효석은 이제 거의 눈을 감고 있었다.
워낙 술을 급히 많이 먹은 탓에 정말 힘든 모양이었다.
‘그……. 오늘……. 뭐더라. 그래 신현태 그 새끼가 낸 거……. 그럴싸하다고 하긴 했었지.’
어찌나 그럴싸했는지, 통과시키면 자르겠다는 말을 들은 연구원이 따로 전화를 걸어 왔을 지경이었다.
이건 무조건 될 거 같은데 정말 반려하냐고.
그땐 너무 화가 나서 당연히 반려하라고 했었는데.
아무튼, 워낙에 연구에 관심이 없이 살다 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프로젝트는 그거 하나뿐이었다.
“하나 있긴 있어.”
“그거 예상 비용이 얼마예요?”
“몰라. 뭐……. 간이 처리로 올린 거라 2, 3억 정도 될걸?”
“그거……. 그거 일단 꿍쳐 두면 안 되나?”
“꿍쳐? 돌았니?”
서효석은 인성이 개차반이긴 했지만.
아주 멍청한 인간은 아니었다.
해도 되는 나쁜 짓과 할 수 없는 나쁜 짓을 구분할 수는 있단 얘기였다.
“아니, 형님 일단 들어 봐요.”
“알았어, 얘기나 해 봐.”
하지만 상대방의 말을 아주 끊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둘이 작당해서 해 먹은 것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대방의 조언을 따랐던 모양이었다.
“그거 연구원한테 얘기해서 무조건 올리라고 하고. 형님이…… 따로 아버님한테 말하세요. 무조건 되는 거라며?”
“뭐…….”
연구원 의견은 그랬더랬다.
무조건 될 거라고.
“수익성도 있대요?”
“응. 뭐, 아주 큰 돈은 안 되겠지만.”
“우린 당장 돈이 필요한 거잖아요. 시간 있으면 뭐, 형이나 나나 10억 그거 못 막나?”
“그야……. 그야 그렇지.”
사실 서효석이나 상대나 유흥에 내던진 돈만 좀 아꼈어도 10억 그까이 거 싶었을 터였다.
그만큼 둘이 지금까지 이런저런 루트로 해 먹은 돈이 적지 않았다.
“그니까……. 그거 어필해서 2억짜리면 한 5억으로 얘기해서 받아 봐요. 루트를 형님이랑 아버님 통하게 해서.”
“음……. 뒷구멍으로?”
“네. 어차피 교수들 솔직히 다 순진하잖아. 서류만 바꿔도 모를걸요? 그리고 차익금만 빼돌리는 거니까, 일이 안되지도 않을 거잖아.”
“흠…….”
“나중에 이거 넘기고 나면 그때 채워 주면 되지. 착오가 있었다고 하면서. 형 그런 거 잘하잖아요.”
“칭찬이냐, 욕이냐?”
어떻게 들어도 욕 같았지만.
서효석은 워낙에 모럴 해저드가 심한 놈이라 이렇게 물었다.
“칭찬이죠. 우리나라에서 뻔뻔한 건 강점이에요.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건……. 그것도 그렇다.”
유유상종이라.
상대방 또한 서효석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될까?”
“제가 서류 작업 도와드릴게요. 아버지만 구워삶아 봐요. 형네 아버지는 그래도 말 좀 통하잖아요.”
“음, 뭐. 내 말 잘 듣지.”
“그러니까. 한번 해 봐요.”
“알았어. 나머지는 네가 좀 해 줘.”
“알았어요, 알았어. 대신 은혜 잊으면 안 됩니다?”
“인마. 보채지 마. 어련히 알아서 해 줄까.”
서효석은 좀 흡족해졌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대화가 끝나 가는 느낌이 들었다.
해서 수혁은 핸드폰을 갈무리한 채 슥 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어차피 얼굴은 한 잔만 마셔도 빨개지는 사람이라 만취한 채 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끊어. 이 새끼들 다 뻗었네.”
덕분에 전화를 끊은 서효석 눈에는 젊지만, 술로는 자기를 못 이기는 레지던트 둘만 보이게 되었다.
돈도 해결됐겠다, 애들은 술로 죽였겠다.
여러모로 기분 좋아진 서효석은 껄껄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야, 야!”
그리곤 영업 사원을 불러 널브러진 둘을 가리켰다.
“얘네 둘 알아서 챙겨. 난 택시 타고 집에 간다.”
“아, 네. 교수님!”
“그……. 우창윤 교수님 따님 먼저 데려다주시고. 알았어?”
“네.”
“그래, 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