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48화 (148/1,303)

148화 우선은 기다려 (2)

수혁은 전일 하윤과 입을 맞춘 대로 일단 신현태와 이현종을 찾아갔다.

둘 다 어마무시하게 바쁜 양반들이었기에, 만난 시각은 모든 일과가 대강 마무리된 오후 8시 경이었다.

사실 아직 둘 다, 그리고 수혁도 남은 일이 있었지만 있는 일을 뒤로 미뤄 둔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원래 대학 병원 일이라는 건 끝나는 게 아니라 뒤로 밀릴 뿐이란 게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웬일이냐? 네가 우리 둘을 불러 모으고.”

이현종은 원장실 소파에 앉은 채 수혁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중국에서 물 건너왔다는 아주 오래된 찻잔이 들려 있었다.

언젠가 술 먹고 떠드는 걸 들어 봤는데, 중국과 수교 열리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산 물건이라고 했더랬다.

당시엔 중국 정부가 문화재 유출에 아예 신경을 못 쓰고 있어서 싸게 명나라, 청나라 때 물건은 물론이고 수, 당 심지어 한나라 물건까지 엄청나게 풀렸다는 얘기도 들었었다.

[저건 송나라 백자라고 했나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랬던 거 같아.’

이제는 범죄라 드러내 놓고 마시진 못했지만.

이렇게 다 아는 사람들만 왔을 땐 매일같이 자랑하는 게 일상이었다.

“형, 그거 비싼 거라면서요. 깨지면 어쩌려고 거기다 차를 마셔.”

물론 신현태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특히 얼마 전 이현종이 들고 있는 저런 상태의 찻잔이 대체 얼마인가 하고 소더비를 뒤져 본 이후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대체 저게 얼마짜리 물건인데 이렇게 함부로 쓴단 말인가.

“찻잔에 차 마시는 게 잘못이냐?”

하지만 이현종은 지극히 뻔한 논리로 대꾸했다.

맞는 말이기는 해서 신현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찻잔 따위가 아니지 않은가.

수혁이 둘을 불렀다는 게 중요했다.

적어도 이 녀석이 레지던트 들어온 이후 이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약간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필……. 미국 다녀와서 이러네.’

만사태평한 이현종보다는 신현태가 특히 그랬다.

‘설마 미국 가서 레지던트 하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얘기 들어 보니까 미국 가서도 어마어마한 활약을 한 모양이던데.

언어에도 전혀 막힘이 없었던 거 같고.

거기서 부른다 해도 별 이상할 게 없었다.

“아, 네. 과장님. 그…….”

게다가 수혁은 어딘지 모르게 뭔가 망설이는 것으로 보였다.

말하기 아주 껄끄러운 내용을 꺼내기라도 할 것처럼.

‘어쩌지?’

[어쩌긴요? 혼자 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무조건 말해야죠.]

해서 속으로 바루다와 대화 중이었는데, 이게 신현태의 불안감을 가중했다.

그런데 먼저 입을 연 건 의외로 신현태가 아니라 이현종이었다.

“수혁아……. 어디 간다는 얘긴 아니지?”

이제 보니 그 비싼 찻잔 든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무리 이현종이라 해도 수혁을 상대로는 불안한 모양이었다.

이놈이야말로 자신의 뒤를 잇는 천재 내과 의사가 아닌가.

이런 생각하는 게 신현태한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놈들은 다들 손색이 조금씩은 있었다.

‘이놈은 아냐. 달라. 다르다고.’

오히려 자신보다도 훨씬 뛰어난 의사가 될 터였다.

100%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은 이 나이 때 결코 이렇게까지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까.

“네?”

물론 수혁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벌써 3년 중에 절반을 했는데.

피 같은 1년 반을 날리는 건 그저 미친 짓일 따름이었다.

“아, 아냐?”

“아니구나. 그럼 뭐든지 좋으니까 얘기해 봐.”

아무튼, 수혁이 그런 얘기를 하고 나자마자 둘의 얼굴이 다소 편안해졌다.

어디 딴 데 가는 것만 아니라면야 무슨 얘기든 다 괜찮을 거 같았다.

“서효석 교수님 때문에요.”

“아.”

하지만 수혁의 입에서 서효석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다시금 불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 수혁이 그 자식하고 돌고 있지 않은가.

또 무슨 짓을 해서 우리 수혁이 심기를 거슬렀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술 먹인다고 잘라 달라고 하면 곤란한데.’

‘우리도 자를 수 있으면 자르고 싶다, 수혁아.’

둘 다 이 비슷한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이현종, 신현태라고 하면 그래도 이 바닥에서 엄청 깨끗한 축에 속하는 의사들 아니던가.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어물전 망신시키는 꼴뚜기 꼴인 서효석 자를 생각이야 수도 없이 해 왔더랬다.

하지만 대학 병원에서 교수 자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의료 사고라도 있으면 또 몰라…….’

‘환자를 봐야 사고를 치지, 그 새끼.’

의외로 하는 일이 없다 보니 잘못하는 것도 없었다.

실적이 개판이긴 했지만, 실적 안 좋다고 자르는 건 모양새가 너무 별로지 않은가.

다른 병원도 아니고, 태화 그룹에서 사회 환원 격으로다가 지은 병원인데.

‘어쩌나……. 어떻게 우리 수혁이를 달래나.’

‘욕이나 시원하게 해 줘야지. 뭐…….’

따라서 이현종과 신현태는 수혁 몰래 눈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텔레파시도 아니고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싶겠지만.

둘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어 보면 알 터였다.

대강은 뜻이 통할 수 있다는 걸.

“일단 이거 들어 보시죠.”

“그래, 수혁아. 그 새끼 화나지. 화……. 응? 뭘 들어?”

“형 가만히 있어 봐요. 이거 녹음 파일인데?”

“네. 녹음 파일이에요. 한번 들어 보시죠.”

수혁은 당황하는 둘을 향해 자신의 핸드폰을 툭 하고 밀어 넣었다.

서효석은 당시 완전히 술에 취해 있었고, 그래서 말이 지리멸렬했는데.

그래서 수혁은 좀 더 뜻이 명확하게 전달되도록 약간의 편집을 거친 참이었다.

[500 그거 안 됐다니까? 그거 시작으로 이거저거 돌려치려고 했더니.]

그중엔 당연하게도 서효석이 신현태를 속여다가 가라 연구비를 후려치려고 했던 정황도 담겨 있었다.

[10억 코인에 꼬라박았지.]

코인, 그것도 이름도 처음 들어 보는 이상한 코인에 무려 10억을 잃은 것도 있었고.

[그 신현태 올린 연구비 조작해서 3억만 후려치자.]

마지막엔 연구비 얘기까지 빠짐없이 담겨 있었다.

“이런 개새끼가?”

다혈질에 참을성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현종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 귀한 송나라 찻잔을 쥔 채였는데, 어찌나 힘을 줬는지 살짝 삐걱거리는 소리마저 들었다.

다행히 깨뜨리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금전 감각 부족한 이현종이라도 이게 얼마짜리 명품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그는 조심스럽게 잔을 내려놓은 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런 개새끼가?”

마치 이번이 처음이라는 듯, 천연덕스럽게 욕을 아까와 같은 톤으로 내지르면서였다.

“이게…… 이거 정말이야?”

반면 신현태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인격자인 그의 상식으로는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다는 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교수가 다른 교수의 연구비를 떼어먹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 연구가 다른 연구도 아니고, 사람 생명 살리는 데 쓰일 연구인데.

“네, 정말이에요.”

“언제……. 언제…… 언제 이걸…….”

“어제 회식 갔었어요. 서 교수님하고.”

“아, 회식? 가서 별일은 없었고?”

신현태 또한 과장으로서 서효석의 품행에 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망할 놈이 스트레스 쌓이거나 했을 때 정말이지 비열하게도 레지던트와 영업 사원들에게 푼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대상이 수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감히 원장 아들에 자신의 최애로 유명한 수혁까지 회식에 끌고 갔을 줄이야.

“아, 네. 별일 없었습니다.”

“너 술 잘 못 먹잖아? 그 새끼……. 술은 잘 먹는데.”

이현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또한 수혁과 몇 번인가 술을 먹어 본 적이 있지 않던가.

그 결과 수혁하고는 딱히 좋은 술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녀석은 어떤 술을 먹어도 금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뿐더러, 무슨 술이건 마치 일처럼 마시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서효석은 어떠한가.

‘아마 그 나이 또래 의사 중에서는 원 톱일걸.’

앉은 자리에서 3병 정도는 너끈히 해치우지 않던가.

의사로서 정말 적절치 못한 일이었는데, 녀석은 그걸 자랑처럼 여기는 놈이었다.

“아, 좀 버렸죠.”

“버려? 아……. 이야. 어떻게 그러지? 걔 작정하고 먹이려고 간 걸 텐데?”

“다 방법이 있었습니다.”

“역시…… 역시 너는 대단한 놈이다.”

하나가 이뻐 보이면 다른 것도 다 이뻐 보이는 법일까.

이현종과 신현태는 교수가 주는 술을 버렸다고 하는 수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천재야, 천재.”

심지어 이현종은 엄지까지 내둘러 댔다.

천재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원래 수혁이 천재인 건 맞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참 민망하기 짝이 없는 말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럼 이거 서효석 교수가 한 말이라 이거지? 내 이 자식을 그냥.”

이현종이 그렇게 수혁을 두고 어화둥둥 하고 있을 무렵, 신현태 또한 몸을 일으켰다.

이현종이 그랬던 것처럼 화만 낸 것이 아니라, 발걸음을 문 쪽으로 옮기면서였다.

아무래도 이대로 서효석한테 직행할 거 같았다.

[말려요, 말려. 하여간 저 양반도 순진해.]

‘어, 알았어.’

그랬다간 말짱 꽝일 터였다.

징계 위원회 정도는 열리겠지만.

대학 병원 교수란 자리는 이런 일로도 자를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감봉 정도?

그렇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 과장님.”

해서 수혁은 필사적으로 신현태를 불렀다.

수혁이 부른다면 똥 마려운 와중에도 뒤를 돌아볼 위인이 바로 신현태 아니겠는가.

“응, 왜.”

당연히 슥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사람의 눈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 서효석 교수님 말이에요. 이거 말한다고 해도……. 별다른 징계는 없겠죠?”

“응? 그야…….”

신현태는 교수 회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명백한 사법 처리 감이 아닌 경우엔 교수가 잘리는 경우는 없다고 보면 되었다.

만장일치가 되어야 자를 수 있는데, 다음번에 자기가 걸릴지도 모르는데 어느 누가 만장일치를 바라겠는가.

게다가 끼리끼리 논다고, 서효석도 병원 내에 같은 편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안 되지. 감봉 정도?”

“그걸로 충분할까요?’

“응?”

신현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마 둘이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된 때였다면 수혁의 진심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신현태는 수혁과 벌써 1년이 넘은 사이인 데다가,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아, 얘……. 서효석 보내고 싶구나.’

해서 수혁의 진심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도 날리고 싶다, 수혁아. 혹시 뾰족한 수가 있는 거니?’

그리곤 눈빛을 날렸는데,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앉아 보시죠. 좋은 수가 있어요.”

“오.”

신현태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하지만 아직 의구심은 남아 있었다.

아무리 수혁이 천재라지만, 이런 정치질까지 잘할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그때 수혁이 말을 이었다.

“하윤이가 알려 준 건데. 우창윤 교수님한테 배운 거래요.”

“그래? 그럼 믿을 만하지.”

세상에 우창윤이라니.

국회로 나갔어도 한자리 꿰찼을 거란 얘기가 있는 양반 아닌가.

그 사람에게 배운 방법이라면 들어 봄 직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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