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슬슬 (1)
수혁은 근본적인 치료를 하지 못해 낙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자의 증상이 호전되지 않은 건 역시나 아니었다.
“배가 하나도 안 아파요. 설사도 없고……. 혈변도 없어요.”
어찌 되었건 크론에 대한 치료와 비타민 k 결핍에 대한 치료는 효과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외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안으로는 치료가 되고 있는 셈이었다.
“아, 다행이네요. 약 바꾼 게 좀 더 효과가 있는 거 같아요.”
수혁은 덕분에 비로소 웃는 낯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계속 얼굴 한구석이 어두웠던 터라, 다른 이도 아닌 바루다가 반가워했다.
[그래,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지. 왜 못하는 걸 가지고 시무룩합니까.]
‘넌 기계라 몰라서 그래. 환자한테 공감할 줄도 알아야 좋은 의사가 되지.’
[공감만 하는 것보단 저처럼 그냥 치료하는 게 환자한테는 더 좋은 의사일걸요?]
‘넌 꼭 그렇게 싸가지 없게 답하더라?’
[누누이 말하지만 제 유일한 입출력자는 수혁…….]
‘아, 됐어. 시끄러워.’
티격태격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아까보다 좀 더 기운을 차린 수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환자의 치료 계획을 떠올렸다.
‘이제 CDAI는 40점대로 내려왔어.’
CDAI.
Crohn’s disease activity index.
크론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지침이 되어 주는 지표라고 보면 되었다.
이게 40점이라는 건 비활동성 중에서도 꽤 좋은 상태라는 뜻이었다.
때문에 바루다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약은 Pentasa 1g Tid로 유지해야겠군요.]
‘다른 약은 추가할 필요 없을까?’
[다른 약이요?]
‘뭐 많잖아. 스테로이드나 아자티오프린 같은 것들.’
[아, 고려해 볼 수 있죠. 그래도 일단은 지금 이 약만으로도 잘 유지되고 있으니 지켜보는 게 어떨까요?]
수혁은 바루다의 의견에 잠시 더 고민을 이어나가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크론은 완치가 가능한, 그러니까 여기서 끝낼 수 있는 질환이 아니지 않은가.
크론병 치료는 마라톤과 같아서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급하게 마음먹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아, 그리고……. 안과랑 심장 내과 협진 결과 혹시 들으셨나요?”
머릿속으로 치료 계획을 얼추 잡은 수혁은 만들어진, 그러나 환자를 안심시키기에는 충분한 미소를 지어 가며 환자에게 물었다.
혹시나 서효석이 다녀갔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뇨.”
하지만 역시나 서효석은 환자가 입원해 있는 이 5일 동안 단 한 번도 들러 보지 않았더랬다.
‘진짜 미친놈이라니까.’
[표정 관리는 하시고요. 환자 앞이에요.]
‘아, 참 그렇지. 하, 이 새끼 이거…….’
[뭐 곧 걸려들겠죠.]
바루다는 잠시 일정을 셈해 보았다.
태화는 대기업치고 워낙에 일이 빨리빨리 돌아가는 기업이었다.
현임 회장이 취임하면서 조직을 잘게 쪼개 둔 덕이었는데, 그걸 감안해서 생각해 보며 지금쯤 연구 자금 승인이 나야만 했다.
바루다는 그게 오늘 아니면 내일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튼, 이건 바루다의 얘기였고 수혁은 환자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눈도 괜찮으시고. 심장도 문제없으세요. 미리 치료하거나 할 필요는 없고……. 정기적으로 검진만 받으시면 됩니다. 내일 퇴원하실 때 같은 날짜로 저희 외래랑 심장 내과, 안과 외래 잡아 드릴게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그래도 병명이 뭔지도 알게 되고, 치료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혁의 말에 옆에 잠자코 있던 어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그간 겪었던 속앓이를 대변하는 듯했다.
어머니도 이럴 정도니, 환자 본인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벌써 한참 전부터 울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뭘 잘못 먹거나, 뭘 잘못해서 피부가 이렇게 된 줄 알았어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유전자 변이 때문이라니까, 기분이 훨씬……. 나은 거 같아요.”
환자의 말을 들은 수혁은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환자 중에 지금 이 환자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어떤 커다란 병에 걸리게 되면 그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다.
가령 흡연은 폐암을 일으키고, 음주는 간암을 일으키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건 의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지, 이미 발명한 환자에게까지 자꾸 주지시킬 문제는 아니었다.
적어도 환자는 그저 위로받고 치료에 전염해야 한다고.
수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네, 환자분 잘못이 아니에요. 그냥 병이 나쁜 거죠. 일단 치료할 수 있는 병에 집중하겠습니다. 또 예방 가능한 합병증 또한 최선을 다해서 예방하고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수혁은 연신 고개를 숙여 대는 환자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얼굴은 앳되기 그지없는, 불과 20대 후반의 레지던트였지만.
방금 그 모습은 여느 교수 못지않은 관록이 느껴졌다.
특히 그가 뭘 해도 꺄륵거리는 대훈과 하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진짜 멋지네요, 선생님.”
“사진기 들고 다닐걸. 아깝다.”
해서 복도에서 수혁을 향해 엄지를 휘둘러 댔다.
누가 봐도 주접이었지만.
기분은 썩 좋았다.
“그, 그랬어?”
“네, 선배. 진짜 멋졌어요. 환자분 잘못이 아닙니다. 캬, 저도 그런 말 한 번만 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특히 하윤이 이럴 때면 광대가 쭉쭉 승천하는 기분이었다.
[휴, 제발 체통 좀…….]
바루다가 쉬지 않고 타박을 해 댔지만.
별 소용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뭔가 다른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에는 모든 것이 무효했다.
우웅.
우우웅.
한동안 더 광대를 올리고 있으려니, 가운 호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있던 핸드폰이 울려 댔다.
[전화 옵니다.]
바루다야 그 즉시 수혁에게 알려 주었지만.
수혁은 한창 하윤과 웃고 떠드느라 바로 받질 못했다.
[전화 온다고.]
[야, 전화.]
[안 받냐?]
[전화 왔다고 귀에 뭘 처박…….]
물론 바루다의 입에서 별별 소리가 다 나왔을 땐 수혁도 어쩔 수 없었다.
“어, 미안 잠깐만.”
해서 우선 하윤과의 대화를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어, 수혁이니?”
수화기 너머 전화를 건 인물은 다름 아닌 신현태 과장이었다.
늘 그렇듯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다정했는데, 평소보다는 말이 좀 빨랐다.
“네, 교수님. 무슨……?”
“어. 우리 그때 연구비 신청했던 거, 인가됐어.”
“아, 어떻게 됐어요?”
“보통은 이게 이메일이 우리한테 연구비를 인가해 준 곳에서 오거든? 이번 같으면 당연히 태화 전자겠지?”
“아, 네.”
수혁이 제아무리 바루다를 데리고 있다 한들, 아예 겪어 보지 못한 일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건 아예 다른 세상일이었기에 수혁도 바루다도 귀를 기울였다.
“근데 생명에서 왔어. 포워드 형식으로.”
“아……. 발신인은…….”
“서중길 이사. 서효석 교수 아버지지.”
“입금은요?”
“입금이야 제대로 들어오긴 했지. 우리가 올렸던 금액 그대로.”
그 말인즉슨 2억이 들어왔다는 얘기였다.
이제 원래 태화 전자에서 집행한 금액이 얼마인지만 알아내면 될 일이었다.
“일단 방으로 올래? 현종이 형도 와 있어.”
“아, 네. 교수님. 방금 회진 끝나서 바로 가면 됩니다.”
“그래, 기다릴게.”
아무튼, 이렇게 복도에서 막 처리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여기 있는 이 둘이야 뭔 얘기를 들어도 절대 누설하지 않겠지만.
심지어 하윤은 어느 정도 관여가 되어 있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복도는 좀 아니지 않은가.
“교수님이 불러서, 나는 먼저 갈게. 아마 서 교수님 회진은 없을 테니까……. 대강 정리하고 마쳐. 하윤이는 내가 제일 처방 더 정리해 놨으니까 6시 반쯤에 나오면 될 거야.”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런 식이니 둘이 수혁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느 아래 연차가 일 줄여 주는 위 연차를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수혁은 일만 줄여 주는 게 아니라 그 일을 보람 있게 만들어 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아무튼 간에 수혁의 손을 탄 환자 중에 현대 의학의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 말고는 좋아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한계가 명확한 사람들마저도 일정 부분은 좋아진 채로 퇴원 결정이 나고 있었다.
“역시 이수혁 선생님은……. 멋있어.”
때문에 대훈은 수혁이 사라져 간 곳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대훈처럼 완전히 뿅 간 얼굴은 아니었지만.
타닥.
타닥.
수혁은 그런 둘을 뒤로 한 채 과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거의 20분은 더 걸렸을 길을 10분도 채 안 걸려서 가고 있었다.
그만큼 지팡이가 익숙해졌다는 뜻인데, 이걸 상기할 때마다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안된 일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잘된 일이죠. 어차피 아직 치료 방법도 없는데요.]
바루다야 늘 그렇듯 딱 잘라 말할 수 있었지만.
수혁은 인간이지 않은가.
게다가 본인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지 마, 인마. 희망은 가져야지.’
[의사가 그런 말을 해도 되나?]
‘난 환자기도 해!’
[아, 뭐……. 그래도 이해는 안 갑니다.]
‘어차피 나도 깡통이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어.’
해서 이 주제가 나올 때마다 티격태격하게 되었다.
물론 그 티격태격이 매번 오래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무용한 싸움이라는 걸 수혁도 바루다도 잘 알고 있는 데다가.
늘 뭔가 다른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똑똑.
이번에도 그러했다.
어느새 과장실에 도착한 수혁은 문을 콩콩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 있던 사람이 문을 열어 주었는데, 의외로 비서가 아니라 이현종이었다.
“잉.”
“아, 비서분은 가셨어. 오늘 조퇴.”
“아……. 그렇다고 원장님이 문을 열어요?”
“저놈이 지 방이라고 유세 부려서. 너도 알잖아, 저놈이 겉으로만 그러지 나랑 있을 땐 제일 나쁜 놈인 거.”
이현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신현태를 가리켰다.
그러자 신현태가 세상 억울하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와, 와! 말을 그렇게 해요? 똥 싸고 방금 들어와서 거기 있다가 열어 준 주제에?”
“야, 뭔 말을 그렇게 상스럽게 하냐. 똥이 뭐야, 똥이. 과장이라는 놈이.”
“구라를 치니까 그렇지?”
“구라는 또 뭐야. 어휴……. 하여간 수혁아 내가 이러고 산다. 원장한테 이렇게 바락바락 대들고. 어, 앉어. 거기. 편히 앉어.”
“자기 사무실처럼 쓰지 말라고요. 아니, 대체 왜 원장실 놔두고 맨날 여기서 보는 거야?”
신현태는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다른 병원처럼 어디 지하 구석에 숨은 것도 아니고.
경치도 좋은 데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현종은 아주 당당했다.
뭔가 아주 합리적인 이유라도 있는 사람처럼.
“지금은 못 가.”
“지금은……. 형 설마……. 오늘 회의 또 빠졌어요? 땡땡이치느라 못 가는 거야?”
“땡땡이라니……. 별로 중요한 회의도 아닌데 자꾸 오라니까 그렇지.”
“아니, 병원장 회의 중에 안 중요한 회의가 어딨어? 이러니까 요새 우리가 다른 병원에 밀리는 거지.”
“야, 말은 바로 하자. 돈 때문에 밀리는 거야.”
“말이나 못 하면…….”
신현태는 한숨을 푹 쉬다가, 이내 수혁이 앉아 있음을 확인했다.
보통 이런 일에 있어서는 교수들이 할 일이 있어야 정상이겠지만.
수혁은 정상적인 레지던트가 아니지 않은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키는 수혁이 쥐고 있었다.
“아, 맞아. 수혁아. 너 김다현 이사님 전화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