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슬슬 (2)
“아, 네. 김다현 이사님……. 전화 되죠.”
수혁은 자신의 핸드폰을 슬쩍 내려다보며 답했다.
아주 긴밀한 사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려웠지만.
그래도 전화를 씹지는 않을 거란 확신은 가질 수 있었다.
김다현 이사는 감사를 잊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제 분석 결과 100% 확실합니다.]
‘제발 그러길 빈다.’
물론 그 근거 중 하나가 바루다의 분석이라는 건 좀 문제였지만.
그래도 최근 바루다의 사람 자체에 대한 분석이 꽤 빛을 발하고 있기는 했다.
거기에 더해 수혁은 김다현 이사에게 감사 편지까지 받은 몸이었다.
그냥 편지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안에는 상당한 재화가 들어 있었더랬다.
정확한 액수는 아무에게도 밝힐 수 없으나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신뢰감이 팍팍 쌓이는 정도라고 보면 되었다.
“그래, 그럼 해 보자.”
수혁의 자신 넘치는 얼굴을 보며 신현태가 허허 웃었다.
뒤에 있던 이현종도 마찬가지였다.
“부탁 좀 하자, 수혁아. 언제까지 서효석 새끼를 밑에 두고 있어야겠냐. 우리 병원 망신이야, 망신. 그래, 우리 병원이 요새 밀리는 게 다 그놈 때문이라니까.”
“아니, 형. 그건 아니지……. 서효석이 뭐라고 병원 전체가 흔들려요.”
“너 지금 그 새끼 편드냐? 편들어? 뒷구녕으로 뭐 받아먹은 거 아냐, 이거?”
“뭔 말을 못 해. 나도 서효석 마음에 안 들고, 자르고 싶지. 근데 형이 너무 비약하니까…….”
“에에이. 됐어. 됐어. 최근에 그거 때문에 회의도 늘어 가지고 가뜩이나 열 뻗치는구만.”
이현종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손을 훠이훠이 저어 댔다.
신현태는 그런 이현종을 보면서 이럴 때야말로 원장이 회의에 들어가고 좀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그런 걸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현종은 경영가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의사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원장도 어쩌다 보니 된 거지, 이 인간은 단 한 번도 보직 욕심을 내 본 적도 없었다.
이현종이 병원에서 부린 욕심이란 그저 환자 욕심뿐이었다.
“아무튼……. 수혁아 미안하다. 우리가 체통을 못 지켜서.”
해서 신현종은 이현종과 쓸데없이 다툼을 이어 나가는 대신 다시 한번 수혁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현종이야 혼자 열 뻗쳐서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수혁은 이미 그런 이현종에게 익숙해진 지 오래라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아까부터 대기하고 있던 손가락을 놀려 김다현 이사에게 전화를 걸 뿐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이수혁 선생님.”
따로 뿌리는 명함에는 없는 개인 번호라더니.
비서에게 연결되는 게 아니라 바로 김다현 이사에게 연결되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건강히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분석 결과 입원해 있을 때보다 확실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바루다도 그렇게 판단한 거 같기는 한데.
사실 이럴 때마다 수혁은 이놈이 정말 분석이라는 걸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약을 파는 건지 좀 의심스러웠다.
[약이라뇨? 저 바루답니다. 세계 최고의 진단 및 치료 목적 A.I. 근거 중심 의학의 화신이라고요.]
‘그 근거라는 게 좀……. 뇌피셜 아냐?’
[무슨 그런? 지금까지 수혁이 마주친 수백 명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수집한 데이터를 근거로 말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 그래 뭐. 일단 좀 조용히 해 줄래? 난 슬슬 바쁠 예정이거든.’
사실 의학 연구에서 수백 명은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다.
연구 계획이 정말 잘 짜여 있다면야 한 자리 숫자로도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 게 논문이었지만.
지금 바루다가 하는 방식의 연구에서는 글쎄 싶은 숫자였다.
해서 수혁은 애써 전에 받았던 감사 편지를 떠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네, 잘 지내고 계시죠?”
“네네. 약 먹으면서는 정말 아무 문제도 없어요. 제 동생도 괜찮아졌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아뇨.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상당히 가증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제 수혁은 자신이 의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렇지 못한 의사들도 있으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한 의사라고도 생각하고 있기는 했다.
당연히 그걸 입 밖에 내놓지는 않았고.
“어……. 근데 무슨 일……. 아, 혹시 그때 그 연구 건 때문인가요? 제가 일단 빨리 처리하라고 말은 해 두었거든요.”
김다현 이사는 갑작스러운 전화에도 마냥 반가워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입사 처음에만 해도 낙하산이다 뭐다 하는 말이 많았으나 그 모든 논란을 실력 하나로 잠재운 사람답게 얼마 전 있었던 수혁의 부탁을 용케 기억해 냈다.
거의 일의 해일 속에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것이었다.
“네, 이사님. 맞아요. 그거 승인되었습니다.”
“아하.”
다현은 자신이 입원해 있던 당시 지정의로 되어 있던 서효석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다소 비스듬히 앉아 있던 자세까지 고치면서였다.
원래 전자 사람으로서, 프로젝트 바루다가 엎어진 이후 그룹의 서자 취급도 못 받게 된 병원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막상 입원하고 보니 병원 이거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
사람 생명과 인생에 관여하는 곳이 아니던가.
‘그 인간……. 진짜 별로라지?’
비단 수혁에게 전해 들은 것으로만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일 잘하는 사람답게 따로 뒷조사까지 시켰는데, 평판이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람이 교수가 되고 또 유지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정말 본사에서 병원에 신경을 안 쓰고 있긴 해…….’
아마 전자였다면, 부장이나 이사 평판이 그 모양이 되도록 절대 두고 보지 않았을 터였다.
“얼마로 메일이 갔죠? 입금은 됐나요? 연구 계좌에?”
다현은 절로 찌푸려진 인상을 애써 피며 말을 이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면서였는데, 그 어딘가에 수혁이 부탁한 일과 관련한 서류가 놓여 있었다.
딱히 업무적으로 볼 때는 책상 위에 놓아둘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었으나.
사적인 의리로 따져 보면 이것보다 중요한 일도 당장은 없었다.
‘서류상으로는 5억이고……. 생명에서 기안해서 올렸어.’
기안자는 연구자도 아니고, 연구 책임자도 아니고, 심지어 심사자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서효석의 아버지였다.
“네, 저희가 원래 올렸던 대로 2억 들어왔습니다. 승인 메일도 2억으로 왔고요.”
“그래요? 2억이에요? 확실하죠?”
“네.”
“승인 메일은 그럼 혹시 어디서 보냈죠?”
김다현은 손가락으로 두드려 대던 것을 멈추고, 서류를 뒤로 넘겼다.
메일 발신자 이름이 나와 있었는데, 김다현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남지연 부장이었다.
김다현이 들어오기 전부터 태화 전자의 모바일 쪽을 담당하고 있던 인물인데 아버지 쪽 사람이기도 했더랬다.
“태화 생명 우자원 부장입니다.”
“우자원이면 서 이사 쪽 사람이네요. 이것 봐라……? 진짜로 횡령을 했네?”
“아, 그런가요? 이것만 들어도 아실 수 있나요?”
“물론 정황 증거일 뿐, 물증은 없습니다만…….”
이만하면 사실 물증도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워낙에 조심성이 있는 성격이라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일 뿐.
“감사 팀을 보내 보면 모두 확실해지겠죠.”
감사 팀이라.
수혁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어쩐지 오금이 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병원 내에도 자체 감사 팀이 있지 않은가.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대개 병원 내 감사 팀이 하는 일은 의료 사고 관련한 일이라,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효과가 있었다.
때문에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목소리를 떨었다.
“아……. 그럼 어떻게 일이 진행되나요?”
“선생님께서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그야말로 확실하기 그지없었다.
최근 들어 이토록 신뢰감이 확 드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을까?
[왜 자꾸 절 잊으세요? 제가 조언할 때 신뢰 팍 들지 않습니까?]
‘어,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래, 바루다의 말마따나 환자 진단할 때 말고는 단연코 없었던 거 같았다.
그리고 요새 수혁과 바루다 콤비 진단 성공률은 100%였다.
[그렇다고 둘을 연결 지을 근거는 없는 거 같은데.]
‘초 치지 마, 자꾸.’
[언제는 근거가 중요하다고 하더니?]
‘사람 기분이라는 게 또 다른 거야.’
[누가 보면 이현종 친아들인 줄 알겠어요. 어쩜 성격이 이렇게 닮아 간담?]
‘뭐 인마?’
아무리 그래도 사람한테 이현종 닮았다는 말은 좀 실례이지 않은가.
의술이라면 또 몰라도.
인성은 안 될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더욱 화를 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다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감사 팀 업무는 사람 살리는 일하고는 무관하거든요. 환자 보시느라 바쁘실 테니, 저는 결과만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뭐……. 걱정할 일은 안 생기겠죠?”
“바라시던 대로 될 겁니다. 아, 연구비도 늘어날 수도 있겠네요. 일단 집행한 건 처리하는 게 보통이거든요.”
“네? 정말요? 이거 연구비가 5억이 된다고요?”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겠습니다.”
다현은 딱 거기까지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인사도 못 하고 끊어진 바람에 다시 걸까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으나, 바루다가 분석 운운하면서 말려 대는 통에 관두었다.
“뭐, 뭐래?”
“나 대강 들었는데. 감사 팀? 감사 팀 얘기 한 거 아냐?”
게다가 다시 전화를 걸 틈도 없었다.
신현태는 물론이고 딴청 피우는 것 같던 이현종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잠시만요.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정리를 좀 하려 했으나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신현태보다는 역시 이현종 때문이었다.
“천천히는 지랄. 빨리 말해.”
“형, 제자한테 지랄이라뇨……. 우리 수혁이 상처받아요.”
“아들인데 뭐 어때.”
“아니, 누가 보면 진짜 아들인 줄 알겠어.”
“그렇게 알아야지, 그럼. 어? 진실이 밝혀져야 속이 시원하냐?”
“그건……. 그건 아니긴 하죠.”
희한하게 내가 맞는 거 같은데 이현종하고 대화하다 보면 납득이 되고 마는 신현태였다.
아무튼, 그렇게 하도 재촉을 해 대는 바람에 수혁도 서둘러 말을 옮겨 주었다.
“그러니까……. 일단 김다현 이사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고? 감사 팀 얘기도 했고?”
“네. 정황 증거로 볼 때 횡령이 확실하다고도 했어요.”
“좋아. 근데……. 그 서효석도 그렇지만 우자원? 그놈도 능구렁이거든. 지금도 봐 서 이사 모르게 아들내미 똥 닦아 주잖아. 감사 시작되면 어디서든 3억 구해다가 일단 메워 놓을 수도 있어.”
“아…….”
“그래도 김다현 이사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면 뭐 알아서 하겠지. 몇 번 회의하면서 봤는데, 그래도 김 이사가 하는 말은 영양가가 있더라고.”
모르는 사람은 별 느낌이 없겠지만.
이현종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방금 이 말이 얼마나 대단한 칭찬인지 딱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영양가라니.
그 말은 곧 이현종이 그 사람이 말할 때 졸지 않았다는 뜻이지 않은가.
그것도 무려 회의실에서.
이것만 봐도 김다현 이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어, 지금 생명에 있지?”
한편 수혁과의 통화를 마친 김다현 이사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긴장한 기색도 없이 그 전화를 받았다.
“네, 이사님.”
“병원도 가 있고?”
“네. 팀 나눠서 왔습니다.”
“그럼 자네가 우 부장 맡아. 병원 측은 서효석 맡고. 서 이사 눈치채기 전에.”
“네, 이사님.”
“이번 일 잘되면 알지? 서 이사 나가리 되면 이제 생명도 내 입김이 좀 닿을 거야.”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