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슬슬 (3)
‘시발……. 시발…….’
서효석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욕만 되뇌고 있었다.
위기를 맞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생산적인 활동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뭐 달리할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재미난 일을 벌이셨던데.”
그를 불러 놓고는 한참이나 세워 두기만 했던 김다현 이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현의 사무실이 아닌, 통창을 통해 광화문이 내려다보이는 회의실에서였다.
상당히 규모가 있는 회의실이니만큼 이 안에는 단지 그 둘만 있는 건 아니었다.
서효석의 아버지도 와 있을 뿐만 아니라 우자원 부장까지 끌려와 있었다.
물론 전자 측에서도 김다현 외에 다른 인물들이 나와 있었다.
구석진 곳에는 무려 이현종과 신현태도 있었고.
“그…….”
말하자면 이번 일과 관련된 모든 이들이 참석한 자리란 뜻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천하의 말종 서효석이라고 해도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지금 김다현 하나만 있다 해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터였다.
전형적인 강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소인배지 않은가.
“할 말이 별로 없으신가 본데, 그럼.”
김다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서효석을 그대로 세워 둔 채, 자신의 심복이자 이제 곧 서 이사의 자리를 꿰차게 될 남지연 부장을 바라보았다.
남 부장은 그것을 신호 삼아 피피티를 띄웠다.
태화 전자 본사 건물답게 모든 것이 최신식인지라 화면도 큰데 화질도 좋았다.
“보시면 이게 태화 생명 우자원 부장 이름으로 올라온 연구 기안입니다. 분명히 필요 연구비에 5억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까? 서 이사님?”
남지연 부장은 노안이 온 눈이라고 해도 다 보일 만큼이나 선명한 화면을 가리켰다.
레이저 포인터마저도 최고급이었기에 도무지 지금 안 보인다고 하는 건 무리였다.
물론 서 이사는 무척 억울한 상황이었다.
“맞기는……. 하지만. 나는 진짜 이 건과는 무관하네. 모르는 일이야.”
“모른다고요?”
“정말이네.”
“그런데 왜 이 기안서에 서 이사님 직인이 찍혀 있습니까?”
“그건…….”
서 이사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는 우 부장을 바라보았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시선을 옮긴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둘 다 그게 아니란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우 부장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서 서 이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쩌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정말이지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던 일이었더랬다.
방금 서 이사가 말한 것처럼 서 이사도 모르게 진행되지 않았던가.
관련자라고 해 봐야 우자원 부장 본인과 서효석 둘뿐이었다.
“설마 서 이사님쯤 되시는 분이 직인을 우 부장에게 맡기고 있다, 뭐 이런 말씀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아니,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서 직인을 찍은 겁니까?
“그건…….”
“모두 녹화되고 있습니다. 제대로 답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서 이사님.”
“너…….”
서 이사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남 부장을 노려보았다.
말이 좋아 이사지, 그룹 서열로 따지면 어지간한 계열사 사장보다도 위인 게 서 이사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노려보면 쫄 법도 하건만.
남 부장은 그저 담담히 마주할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건수는 커도 너무 큰 건수였다.
게다가 뒷배도 든든했고.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지만 일단 넘어가죠.”
그 뒷배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김다현 이사가 입을 열었다.
서 이사야 당연히 그걸 원하지 않았지만.
남 부장은 마치 김다현 이사의 목소리만 들리는 사람인 듯 명을 받았다.
“네. 다음은 우리 전자 측 알앤디 부서에서 받은 기안 문서입니다. 보시다시피 생명에서 올린 문서와 동일합니다. 검토 결과 해당 연구 계획서의 완성도는 훌륭했으며 충분히 상품성과 공익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요청한 5억에 대해 승인한 바 있습니다. 이는 알앤디 부서 김승욱 부장 및 황윤석 이사의 직인입니다.”
남 부장은 예의 그 또박또박한 발음과 말투로 발표를 이어 나갔다.
다음으로 든 화면은 이체 목록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전자 알앤디 부서에서 생명 알앤디 부서로 이체한 기록이었다.
한 번에 5억.
대기업답게 돈을 쓰기로 한 이상에야 별 망설임이 없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실 딱히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안이기도 했다.
“근데…… 이 사안에 정확히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
그리고 그건 현 전자 사장이자 태화 그룹의 회장이기도 한 이유원이 부사장 김범준을 돌아보았다.
김범준 부사장이 비록 이 사안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김다현 이사의 아버지 아닌가.
뭐라도 알고 있을 거 같았다.
게다가 이 정도 사안에 굳이 오라고 부른 것도 김범준 부사장이기도 했고.
하지만 김범준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을 뛰는 사람답게 의뭉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는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딸을 띄워 주기를 더 원하고 있었다.
“그건…… 김 전무에게 묻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사장님.”
얼핏 듣기에 따라서는 사장이 좀 기분 나빠할 만한 답변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기업의 처음과 함께 여기까지 달려온 김범준에게는 사장의 말에 감히 토를 달 자격이 차고 넘쳤다.
이유원 사장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의견을 받아들였다.
김다현을 바라보았다는 뜻이었다.
“네, 사장님. 말씀해 주신 대로 지금 이 과정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즉 생명 알앤디 부서와 전자 알앤디 부서 사이의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명 알앤디와 태화 의료원 사이에서 발생했습니다. 우선 이 자료를 보시죠. 이게 원래 의료원에서 올린 기안입니다.”
김다현 이사의 말에 남 부장이 즉시 화면을 바꾸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신현태, 이수혁 그리고 나머지 교수들이 올린 기안서였다.
신현태와 이현종의 직인도 찍혀 있었다.
“보시면……. 이 연구 계획서에서 요청한 금액은 2억입니다.”
“5억이 아니라?”
“네. 틀림없는 2억입니다.”
“연구 계획서를 올리고 자금 조달 계획이 바뀐 건가?”
이유원 사장의 눈이 이현종과 신현태를 향해 돌아갔다.
목소리야 부드럽지만, 실상은 그런 인간은 아니지 않던가.
이유원이라고 하면 거의 뭐 지금의 태화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직 개편 당시 대들다가 목 날아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 소문이 있었다.
아니, 적어도 이현종과 신현태는 그 현장을 옆에서나마 지켜본 바 있었다.
“힉.”
해서 상대적으로 심약한 신현태는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뇨, 회장님. 그런 적 없습니다.”
그에 반해 딱히 권력에 굴종하고픈 마음이 없는 이현종은 딱 잘라 말할 수 있었다.
신현태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르면서였는데.
상당히 아팠지만, 신현태는 감히 신음도 내지 못했다.
“그럼 이게 어찌 된 거지?”
3억이 비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유원 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연간 100조가 넘는 매출을 일으키는 기업에서 3억이면 뭐 작은 거 아니겠나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해 가지고서는 절대 이만한 기업을 굴릴 수 없을 터였다.
“다음 자료를 보여 드리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남 부장은 애써 이유원의 눈빛을 피해 가며 입을 열었다.
제아무리 떳떳한 상황이라 해도 그룹 회장의 화난 눈을 쳐다보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서효석이나 우자원 부장 그리고 서 이사가 고개를 더더욱 푹 숙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실제 생명 알앤디에서 의료원 기안자 신현태 내과 과장 연구 계좌로 들어간 금액입니다.”
“2억이네. 여전히 3억이 비는데. 다른 계좌로 들어간 돈은 없나?”
“나머지 3억은……. 이 계좌로 들어갔습니다.”
기업이라는 게 그렇게 널널하게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한두 푼도 아니고 억 단위의 돈이 넘나드는데 기록이 아예 안 남기는 어려웠다.
물론 감사에만 걸리지 않았다면야 아무도 모르게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흘러나간 돈을 추적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예금주가 우자원. 우자원 부장이라고 했었나? 아까?”
이유원은 해당 계좌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자원은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정수리만 대 놓고 있었다.
기나긴 사회생활 탓에 비어 버린 정수리가 애처로움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빈 금액에 대한 분노가 잠잠해질 정도는 아니었다.
“자네가 빼돌린 건가? 고개 들고 대답해.”
이건 부탁이나 회유가 아니라 그저 명령이었다.
우자원으로서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이유원은 그야말로 호랑이나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예 비화를 모른다면야 다른 동물을 떠올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껏 이유원이 그룹을 키워 온 방식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호랑이 말고 다른 동물을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
하지만 그런데도 선뜻 답을 하지 못한 건, 이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서 이사와 서효석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다.
‘뒤집어쓰면, 자리부터 네 앞으로 생활까지 다 책임져 줄게.’
감방 들어갈 수도 있는 사안이었지만.
그것도 다 책임져 준다는 말을 들은 참이었다.
우자원은 그간 뒤치다꺼리하면서 알게 된 서 이사의 재산이 적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민이 되긴 했다.
‘역시 내가 뒤집어쓰는 게…… 낫겠지?’
그럼 어찌 되었건 뒷배만큼은 살려 두게 되지 않겠는가.
난파선이라고 다 같이 가라앉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거 같았다.
어차피 개인 계좌 송금 내역도 가지고 있겠다, 협박할 거리도 있었고.
해서 뒤집어쓰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 나가려는데, 이유원이 재차 입을 열었다.
“똑바로 대답해. 3억 횡령도 중죄지만, 나한테 거짓말하는 건 더 큰 죄야. 법이 그렇든 그렇지 않든. 나는 그렇게 판단해.”
“아.”
하지만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도무지 뒤집어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 법이 다 무슨 소용이야…….’
저 사람이 마음먹고 인생 조지려고 한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적어도 이 대한민국에서는 발붙이고 살지 못하게 될 터였다.
아니, 외국으로 간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원이 키워 낸 태화는 세계적인 기업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결국, 우자원 부장은 서 이사와 서효석을 한 번씩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아, 안 돼!”
그 표정을 본 서 이사가 급히 말리려 했으나,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거기, 조용히 해.”
이유원이 으르렁거리듯 서 이사의 입을 닥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서 이사도 감히 이유원에게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기에 우자원은 마음속으로 정해 놨던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3억은……. 서효석 교수에게 보냈습니다. 나중에 채워 놓으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해서……. 정말 횡령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서효석이라.”
이유원은 아직도 서 있는 서효석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교수라고 해 봐야 병원에서나 잘났지, 그룹 차원에서 보자면 티끌이었으니.
서 이사라면야 얘기가 조금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조무래기에서 벗어나긴 어려웠다.
그런 놈이 감히 자신의 그룹을 가지고 놀려고 하다니.
“그래, 어디……. 왜 그랬는지 들어나 볼까.”
이유원은 물어뜯기 전에 자비나 베풀 요량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그의 오랜 버릇이란 걸 잘 알고 있는 김범준 부사장은 하마 그 모습을 보기가 두려워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시원한 광화문 광장이 보기 좋았다.
“네, 네. 회장님.”
그에 반해 이유원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서효석은 동아줄이라 여긴 후 부지런히 혀를 놀려 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