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우리 편 (1)
“그래, 그래서 그렇게 했다?”
이유원 사장은 서효석의 말을 듣고는 즐거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 이사는 차마 더 못 보겠다는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전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것은 오직 한 명, 서효석뿐이었다.
“네, 사장님. 채, 채워 넣으려고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뭐, 그 말은 지금 들어 봐야 별 의미 없겠지. 나가 보게.”
“네?”
“나가라고.”
이유원의 목소리에 짜증이 뒤섞이자, 대기하고 있던 보안 요원들이 서효석을 끌고 나갔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서 이사와 우자원 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유원은 쾅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가 무섭게 김다현 이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김 이사는 이걸 어떻게 안 거지? 저만한 인력이 붙으면……. 알아채기 쉽지 않았을 텐데.”
최초 기안자가 병원 사람이 아니라 다른 계열사 사람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병원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교수들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누군가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영영 몰랐을 게 뻔했다.
아예 애초에 들어오기로 했던 금액의 절반만 들어왔다고 해도 납득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유원이 관심을 가지고 진행했던 프로젝트 바루다에 참여했던 의대 교수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제보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유원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병원 측에서 알아서 한 일이 아니라, 김다현이 애초부터 관여한 일일 거라고.
이유원의 속내는 김다현 또한 눈치채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늘어놓진 않았다.
이리나 승냥이를 대할 때는 거짓을 고해도 좋을 테지만.
호랑이를 앞에 두었을 때는 주의에 주의를 거듭하는 게 좋았다.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목을 물릴 테니까.
“제보라. 누구로부터?”
김다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수혁의 이름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지금 나간 저 셋은 나가리 될 것이 뻔한 상황 아니겠는가.
이 자리에서 제보자의 신상을 밝히는 것은 도리어 그 제보자에게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진 않을 터였다.
‘혹 누가 건들면 내가 보호해 주면 돼.’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였는데, 당연하게도 이유원은 레지던트 이수혁에게 관심을 표했다.
“레지던트 2년 차? 내가 익숙지가 않아서 그런데……. 교수는 아니지?”
“네. 전공의입니다. 3년을 마치고 나면 전문의가 됩니다.”
“전문의도 아니야?”
이유원의 질문에 옆에 있던 비서가 재빠르게 병원 직위에 관해 설명했다.
간결하게 요약을 하자면 2년 차 전공의 이수혁은 28살이고, 회사 직급으로 하자면 이제 막 신입 사원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네.”
“근데 어떻게 이런 제보를 했지? 아니지. 왜 했지?”
“연구 계획서 기안자 중 하나입니다. 아마 이 연구의 아이디어를 이수혁 선생이 냈을 겁니다.”
“제대로 심사했을 때 5억 인가를 받을 연구 계획서를 28살짜리가 냈어?”
“네.”
“이전에도 연구를 좀 해 봤던 친군가?”
이제 이유원의 시선은 김다현 이사가 아닌 이현종과 신현태를 향하고 있었다.
사실 수혁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아는 건 과장 신현태였지만.
그는 눈빛을 받자마자 숨이 넘어갈 거 같은 모양새가 되고야 말았다.
이현종은 아끼는 동생의 한심한 모습에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아뇨, 처음입니다. 논문을 쓴 적은 있어도……. 연구에 참여한 적은 없습니다.”
“흐음……. 그런데, 5억을 승인받았다라.”
이유원은 의학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아니, 사실 전자에 관해서도 그렇게까지 잘 알진 못했다.
아마 그보다는 김다현 이사가 훨씬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경영자로서의 감은 있었다.
‘전자 계열이 아니라……. 병원 계열에서 올라온 연구 계획서에 5억이 떨어진다. 음.’
불과 한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꽤 흔한 일이었더랬다.
미래 먹거리가 바이오에 있다고 봤으니까.
하지만 프로젝트 바루다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제 병원 쪽 연구는 거의 외주로 돌려진 상황이었다.
그걸 뚫고 5억이 떨어졌다는 건 그만큼 연구 계획서가 상당히 치밀하고 또 실용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재밌을 거 같은데. 그거 사본 있으면 나한테 좀 보내 줄 수 있나?”
“네?”
천하의 이현종마저 당황시키기에 충분한 제안이었다.
대체 이유원이 누구란 말인가.
태화를 세계 재계 서열 10위권에 안착시킨 괴물이었다.
그런 사람 입에서 고작해야 레지던트가 낸 연구 계획서가 재밌겠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보내 줄 수 있나?”
“아……. 네. 물론입니다. 제가 비서 통해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현종도 만만한 사람은 아닌지라 금세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버버.”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신현태가 딸꾹질을 하게 된 것은 난데없는 부작용이긴 했지만.
다행히 이유원은 그것을 끝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김다현 이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저런 인간들을 남겨 둘 수는 없지. 싹 다 자르고…….”
“고소도 진행할까요?”
“고소? 아니. 소란 일어나면 태화 신뢰도만 깎이지. 자르기만 해. 관련 업계에 경고는 하고. 어떤 식으로든 태화랑 업무적이든 뭐로든 엮이는 일 없도록.”
이 말은 곧 재취업의 길을 가로막겠다는 뜻이었다.
설마하니 이유원쯤이나 되는 사람이 저런 잔챙이들의 앞길을 더 두고 보지는 않겠지만.
이런 말 한마디가 새어 나갔다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이었다.
현시점에서 태화와 굳이 척을 질 만한 기업은 국내외 어디에도 없었으니.
게다가 서 이사를 제외하면 그렇게까지 유능한 인간들도 아니지 않은가.
“네, 사장님.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좋아. 이걸로 끝인가?”
“아……. 감사 건은 끝입니다만, 따로 발표할 내용이 있습니다.”
“응? 아, 그거. 그거 여기서 바로 하나?”
“네. 병원 측 인사 자리 비우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지, 그럼. 시간이……. 조금 오버된 거 같은데.”
그 말에 이현종과 신현태는 썰물처럼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신현태는 몰라도 이현종은 세계적인 의사인데 대접이 좀 박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여긴 병원이 아니라 기업인데.
사람 살리는 게 아니라, 돈 많이 버는 부서가 최고였다.
게다가 여전히 태화 의료원이 사람 살리느라 발생하는 적자를 태화 그룹이 지탱해 주고 있지 않은가.
해서 이현종은 딱히 불만 같은 게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휴. 어휴휴. 어유유유.”
신현태는 불만이고 자시고 내뱉을 정신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현종이 운전석에 앉혀 줄 때까지 내내 이상한 말만 하고 있었다.
“자, 안전벨트 매고. 아, 이거……. 내가 할까 그냥.”
심지어 그 이현종이 운전을 대신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 나 언제 여기 왔어요?”
“언제 오긴. 노인네가 돼 가지고 너 끌고 왔어, 인마.”
“아…….”
“너 그래 가지고 원장 할 수 있겠냐? 그래도 매달 이유원 사장 아니면 김범준 부사장 봐야 되는데.”
“안 할래요.”
“어휴, 이 새끼 이거.”
“왜요. 언제는 자리 욕심내지 말고 환자나 보래 놓구선?”
“네가 지금. 어? 네가 지금 그럴 처지냐?”
이현종은 지는 운전도 안 하고 옆 좌석 뒤까지 쫙 당겨서 누운 주제에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내기 시작했다.
신현태는 얼떨결에 액셀을 밟아 나온 와중이었기에 그런 이현종을 향해 적극적으로 화를 내진 못했다.
그냥 이 인간이 또 왜 이 지랄인가 싶을 뿐이었다.
“처지? 뭔 처지요. 과장 잘하고 있구만.”
“넌 애가 왜 이렇게 이기적이냐.”
“와……. 지금 그게 옆 좌석에 누워 가지고 할 말이요? 형이 돼 가지고 못 하는 말이 없네.”
이현종이 경우 없는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좀 심하단 생각에 신현태도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면서도 안전 운전은 하고 있었는데, 그의 인격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이현종은 그런 모습에 전혀 감화되지 않았다.
“인마 너가 그래도 어? 원장 해야. 수혁이 뒤 봐줄 거 아냐. 오늘도 봐라. 걔 연구 계획서 사장이 가지고 갔어.”
말이 좋아 사장이지.
사실상 회장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회장 이장복은 대외 활동을 하지 않은 지 10년이 더 넘었으니.
“아…….”
“원래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야. 너무 뛰어나, 수혁이는. 알아서 잘할 거 같아도 도와줘야 해.”
“그거…….”
이현종의 입에서 이렇게 사려 깊은 말이 흘러나올 줄이야.
신현태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정면 주시하느라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그니까 원장 하려면 담력 좀 키워. 애도 아니고 가서 벌벌 떨고 뭐 하는 거야. 누가 보면 네가 감사 대상인 줄 알겠어.”
“그런 자리 처음이니까 그렇죠.”
“모르긴 해도……. 이수혁이가 왔으면 너보단 태연했을 거다.”
“그…….”
신현태는 습관적으로 아닐 거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까 수혁은 어찌 된 놈이 1년 차 때부터 당당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나나 현종이 형한테는 장점이었지.’
둘은 천생 학자이면서 동시에 스승 아니던가.
우수한 제자를 보면 질투심이 난다기보다는 그저 기특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수혁의 잘남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사실 지금도 많지.’
감히 원장과 과장이 싸고도는 사람을 앞에서 까는 놈은 없지만.
레지던트들만 해도 뒤에서 수군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긴 했다.
그게 비단 병원 안에서가 아니라, 병원 밖까지 번진다면 어찌 될까.
제아무리 수혁이 뛰어난 녀석이라 해도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원장 할게.”
“누가 시켜 준대?”
“무슨 장단에 춤춰야 해? 아까는 원장 하려면 잘하라며?”
“그건 되고 나서 일이지. 그래도 뭐…….”
이현종은 여기 오기 전 김다현 이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차기 원장은 신현태 과장으로 하죠. 잘하시겠죠?’
모르긴 몰라도 서 이사를 내치면서 자기 사람을 꽂을 생각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태화 의료원 내 인사는 태화 그룹 전체의 일이라기보다는 태화 생명에서 주관하지 않던가.
그 말은 곧 생명을 장악하게 되는 사람이 의료원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제 생각에는 바루다 프로젝트 후유증, 오래 안 가요. 아마 곧 다시 병원이 주요 사업 중 하나로 부상할 겁니다. 제가 이 연구 계획서 보니까 딱 그런 느낌이 들어요.’
김다현은 바로 그 자리를 원했고, 수혁에게 은혜 갚는 겸해서 바로 치고 들어온 참이었다.
죽 쒀서 김다현에게 다 준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그걸로 수혁을 보호하고 또 키워 줄 수 있는 사람이 차기 원장이 될 수 있다면, 그럼 된 거 아닐까.
이현종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신현태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전방 주시 중이었다.
“준비는 해. 원장 이거 아무나 하는 거 아냐.”
“형은 대강 하잖아요.”
“너가 이렇게 하면, 다른 애들 가만히 있겠냐?”
“그건 아니죠.”
“그러니까, 보고 배워. 나도 이제 회의 슬슬 챙겨 들어갈게. 근데……. 수혁이 오늘 왜 못 온 거야?”
“당직이죠, 뭐. 3년제 되면서 사람 많이 부족하잖아요. 잘하고 있으려나? 아니지, 잘하고 있겠지.”
“들어가서 잠깐 얼굴이나 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