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만들어 봅시다 (3)
“그래? 흉부외과 자료만 있으면 된다고?”
“네, 교수님. 흉부외과만큼 환자 징후가 들쑥날쑥한 곳은 없으니까요.”
“그렇지, 그렇지.”
흉부외과 교수는 금세 들뜬 얼굴이 되었다.
‘그래, 이현종 그 자식은 우릴 죽어도 인정 안 하지만.’
아들내미는 이렇게 훌륭하지 않은가.
뭔가 대신 사과라도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데이터 주는 거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게다가 아까 간호사들 통해 들었는데, 이 친구가 평소에도 아주 싹수가 있는 친구라 했었다.
심지어 다리만 괜찮았으면 아마 흉부외과를 지원했을 거란 얘기도 했다고 하고.
이른바 어제 수혁이 약 쳐 놓은 게 효과를 보이고 있는 셈인데.
워낙에 레지던트들이 바쁘고 지쳐 있다 보니 이만한 약도 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호탕한 과라 좋다고 했던가.’
심지어 수혁이 지나가듯, 하지만 다분히 의도를 가지고 해 놓은 얘기도 죄다 털어놓을 정도였다.
‘호탕…….’
호탕하다라.
과 내에서 잘 쓰지는 않는 말이기는 하지만.
돌이켜 보니 흉부외과에 가장 어울리는 말이 바로 호탕하다는 말인 거 같았다.
그런 말을 바깥 놈이 해 주고 있는데 정말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데이터 주는 거야 어려운 것도 아니고.
거기에 밥숟가락 하나 얹을 수 있다면 최고 아니겠는가.
물론 그 전에 하나 확인해 봐야 할 건 있었다.
“그런데 그 연구 주체가 혹시 누구지?”
“제가 우선…… 계획서를 썼고요.”
“어? 레지던트가?”
“네.”
“허.”
똑똑한 놈이란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게 이현종 아들이다 보니 무시하고 있었을 뿐.
그런데 이런 신박한 연구 계획서를 낼 정도일 줄이야.
“그, 그럼 책임 교수는?”
“신현태 과장님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종류의 연구는 과장님하고 해야 맞을 거 같아서요.”
“아……. 혹시 이현종…… 교수는 연관 없나?”
연관이 없을 리가 있을까?
내과 출신의 원장인데.
흉부외과 교수도 물으면서 조금은 민망한 기분이었다.
[진짜 미워하나 보네요.]
그럼에도 바루다나 수혁이 예상했던 질문이기는 했다.
‘당연하지. 나 같아도 그러겠다.’
이현종은 그야말로 원수 중의 원수였으니까.
그냥 기분만 나쁘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심혈관 중재 시술이 보편화되면서 흉부외과 입지가 쪼그라들게 되지 않았던가.
“아……. 이현종 교수님이요? 뭐……. 사실 공유할 데이터가 많지도 않으시고, 요새는 연구 그렇게 열심히 하진 않으셔서. 이름만 올리는 수준입니다.”
해서 수혁은 속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되뇌면서 이현종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박하게 하였다.
아마 이현종이 이 말을 듣게 되면 길길이 날뛸 게 분명했다.
아니면 수혁의 말에 상처받고 울부짖거나.
그러나 다행히 이곳은 적진이었다.
적어도 여기서 나누는 말이 이현종에게 들어갈 일은 없었다.
절대 마주치지도 않을 테니까.
“그래? 이름만 올리는 수준?”
“네. 근데 교수님께서 흉부외과 데이터 주시면 이건 꽤 크리티컬 하거든요. 2저자 정도는 제가 과장님께 말씀드려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데이터만 줘도?”
“물론이죠. 이게 얼마나 귀한 자료인데요.”
“오……. 그래? 알았어. 그럼. 수간호사 통해서 받아. 내 이름으로 얘기해 놓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흡족해진 흉부외과 교수의 통 큰 수락에 의해 수혁은 흉부외과 자료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말은 곧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사실 간단한 인공지능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머신 러닝이었고, 그 머신 러닝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로우 데이터이지 않은가.
그게 단박에 해결이 된 이상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뭐……. 설마 태화 전자 인재들이라는데 개발을 못 하진 않겠지.’
[이 바루다를 만들어 낸 사람들입니다. 보조 A.I. 정도야 뚝딱이죠.]
‘그건…….’
수혁은 사실 바루다는 실패한 프로젝트가 되지 않았냐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뭐가 되었건 간에 머릿속에 들어온 바루다는 우수하긴 했으니까.
뭔가 들어와서 훨씬 완벽해진 거 같긴 한데.
그 조건을 밖에서도 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세상은 정말 놀라게 될 터인데.
[왜 말을 하다 맙니까?]
‘아니, 아냐. 아무것도.’
[음…….]
‘아무튼, 이제 대강 처리된 건가? 딱히 내가 더 할 일은 없겠지?’
[데이터 넘겨주고, 거기서 피드백 보내올 때까지는 그렇겠죠.]
달리 말하면 차분히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렇지만 이번에도 바루다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때론 기다리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일 때도 있는 법 아니겠는가.
괜히 조급해져서 안달복달하다간 될 일도 못 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수혁은 지금 연구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제 슬슬 3년 차들 공부하러 나갈 시기입니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수혁도 2년 차 중반에 다다랐다는 뜻.
곧 절반이 남았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1년 차와 2년 차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중간에 지금 3년 차들이 전문의 시험공부를 위해 병원 일에서 손을 떼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곧 아직 3년 차는 아니지만 3년 차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중엔 일반 외래도 있었는데, 갑자기 일손도 부족해지는 와중에 외래가 덜컥 열리면 황당하니 보통은 미리 여는 수가 많았다.
그래야 혹 잘 모르겠는 환자가 왔을 때 위에 물어볼 수 있을 테니까.
‘아……. 나 외래 시작인가?’
[네. 내일부터요.]
‘음…….’
[떨려요?]
‘외래는 처음이니까.’
[흐으음.]
처음이라 떨린다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 아니겠는가.
바루다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아주 불만족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 봐야 홀로그램 같은 형상이었지만.
그걸 알고 봐도 움찔할 정도로 이제는 그 완성도가 아주 대단했다.
솔직히 수혁은 이제 가끔은 바루다가 기계란 사실을 까먹을 지경이었다.
‘왜, 왜 인마.’
[불안하다는 건 자신이 없다는 뜻이죠.]
‘그…….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이거야 원. 이게 다 제 불찰입니다.]
슬금슬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바루다가 자책할 때 정작 괴로워지는 건 대부분 수혁이었으니까.
이번에도 그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낳았다.
[뒤지게 노력했으면 도저히 자신이 없을 수가 없을 텐데…….]
‘뭐, 뭔 개소리야 인마. 나 뒤지게 노력했어.’
[아니죠. 아닙니다. 지금 멀쩡히 살아 있잖아요?]
‘당연히 살아 있어야지!’
[아무튼, 내일까지 공부합시다. 불안감이 사라질 때까지.]
불안감이 사라질 때까지 공부라.
이 무슨 끔찍한 말이란 말인가.
그나마 최근엔 일 끝나고 열 시부터 열두 시까지 딱 공부하고 자는 게 익숙해져서 살 만했는데.
거기서 공부를 더 하라는 건 잠을 줄이라는 얘기밖에 더 되겠는가.
이미 충분히 적게 자는데.
‘사라졌어. 나 하나도 안 불안해.’
[아뇨. 제가 계산해 보니까 지금 심장박동 수가 105회. 긴장했어요.]
‘이 새꺄, 그건 너가 이따위 소리를 하니까!’
[어어 더 올라간다. 더 올라가.]
‘이, 이…….’
[졸도하겠네, 이러다. 운동도 좀 합시다. 제 숙주…… 아니, 유일한 입출력자가 죽으면 안 되죠.]
그 후로도 수혁은 몇 번인가 더 항변의 말을 외쳐 봤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별 소용이 없었다.
우선 바루다는 이런 종류의 논쟁에 있어서 지치는 법이 없었다.
홀로그램 형식으로 기가 막히게 사람 표정을 지어낼 때와는 달리 이럴 땐 정말이지 기계 그 자체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위이이이잉.
이제 바루다는 수혁이 제일 싫어하는 소리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몸이 되어 있었다.
제 딴에는 더더욱 수혁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어 그렇다고 하지만.
그러니 오히려 좋아해야 한다고 개소리를 늘어놓기도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X 같기만 할 뿐이었다.
“으아, 으아.”
[입으로 소리 내지 마세요. 요새 겨우 잠잠해졌는데. 또 원장님 아들 미쳤다는 소문 돕니다.]
‘이, 이 자식아 그럼 그런 소리를 내지 마.’
[공부를 안 하겠다고 하는데 어쩌겠어요. 무식해지는 것보다는 미치고 똑똑하단 소문 나는 게 낫습니다.]
‘이……’
화는 나는데.
쉬이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지금껏 수혁이 레지던트인 주제에 승승장구해 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똑똑해서였으니까.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들어 준 게 바루다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지 않은가.
[자 그럼 똑똑해지러 갑시다.]
‘하…….’
[또또 한숨 쉬시네. 공부시켜 주는데 그게 그렇게 싫습니까? 의사가 똑똑해지면 그만큼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이거 사람 살리기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겠죠?]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그럼 입 다물고 갑시다.]
‘후…….’
수혁은 끌려가듯 의국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선배!”
안으로 들어서자 눈이 마주친 1년 차들이 각 잡힌 태도로 인사를 건네왔다.
딱히 수혁이 그들을 괴롭히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도리어 잘해 주면 잘해 줬지, 못 해 주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1년 차들이 수혁을 어려워하는 건 그의 압도적인 실력.
그리고 원장 아들이라는 뒷배경 때문이었다.
“어, 그래. 나 공부하다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해.”
“아, 네.”
반면 위 연차들은 사정이 좀 달랐다.
그들에게도 수혁은 껄끄러운 존재였으나, 그렇다고 1년 차들처럼 냅다 굽신거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실력이나 뭐나 더 위인 건 없어도.
연차는 위였으니.
해서 그들은 아예 마주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후다닥.
수혁이 들어서자마자 바퀴벌레처럼 구석으로 사라지곤 했다 이 말이었다.
오늘도 그리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왜 저러는 거야, 대체.’
[수혁도 수혁보다 너무 뛰어난 아래 연차가 들어오게 되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넌 그걸 어떻게 짐작하는데?’
[이전에 수혁이 보다가 질질 짰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에서 착안했습니다. 왜인지는 몰라도 당시 수혁은 모차르트보다는 살리에리에 공감했던 거 같더군요.]
‘어휴. 말을 말아야지…….’
어쩜 말을 해도 이렇게 싸가지 없게 할까.
그렇다고 싸가지 없단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간 유일한 입출력자가 누구니 하면서 또 속을 뒤집어 놓을 테니까.
[그래도 걱정 마십시오. 제가 이 머릿속에 있는 이상 수혁이 다시 살리에리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다시?’
[솔직히 모차르트는 아니었잖아요.]
‘음. 그건 인정.’
[자, 그럼 공부합시다.]
‘알았다…….’
수혁은 본전도 못 찾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댄 후 책을 집어 들었다.
워낙 내과학이 방대하다 보니 아직도 안 본 책이 있었다.
뭐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평생 그럴 테니까.
이제 현대 의학이 발전하는 속도가 너무 가속화된 탓이었다.
한 가지 다행한 점이 있다면 오직 수혁만이 그 속도를 어느 정도 전방위적으로 따라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