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열이 난다고 (2)
유지상은 부리나케 지하 1층으로 향했다.
이제 3년 차가 될 몸이라 느긋해도 될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 옛날얘기였다.
내과가 3년제가 되면서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유지상이나 수혁 모두 주치의 잡을 여전히 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빨리 걷나? 부축해 줄까?”
하지만 지상은 그런 와중에도 수혁을 챙겼다.
평소에도 이랬다면 퍽 고마웠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가식적이네요. 궁금한 거 있으니까 바로 친절해지네?]
심지어 수혁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인간의 기억뿐만 아니라, 언제나 선명한 바루다의 데이터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바루다는 이런 종류의 데이터는 또 아낌없이 풀어 재끼는 녀석이라 고마움이 느껴질 겨를도 없었다.
“아, 아냐. 괜찮아. 이제 나도 익숙해져서.”
해서 수혁은 쓴웃음을 지어 가며 지상의 뒤를 따랐다.
방금 말한 것처럼 힘들진 않았다.
지팡이를 짚으면 되니까.
“오. 오늘 밥 수육이다.”
“진짜? 괜찮네.”
지상은 직원 식당으로 들어가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수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의사씩이나 돼서 무슨 수육에 그리 기뻐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의사라고 해 봐야 레지던트 월급 빤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나가 먹을 수 있는 시간도 거의 없었다.
병원 밥만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맛있는 메뉴는 삶의 낙이었다.
“아……. 너는 아주머니가 그래도 따로 배식을 해 주는구나?”
“응? 아, 응. 이게…… 처음에는 혼자 해 봤는데. 힘들더라. 지팡이 짚고 한 손으로 들고 오다가 엎은 후로는 늘 부탁해.”
“그래…… 그게, 그게 낫겠다.”
지상이나 수혁이나 좀 민망한 상황이었다.
명색이 그래도 동기인데 제대로 밥 먹는 게 거의 처음인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심지어 회식 때도 가까이 앉은 기억이 없었다.
‘왜 그렇지?’
[1년 차 때는 맨날 교수님들한테 둘러싸여 있었고, 이젠 1년 차들한테 둘러싸이니까 그렇죠.]
‘아…….’
수혁은 늘 신현태 아니면 이현종, 그것도 아니면 조태진과 같이 앉았다는 것을 그제야 상기했다.
교수님들이 잘해 주니까 마냥 좋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조금 외로운 의국 생활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가 있는데 외로워요?]
물론 바루다는 인정하지 않았다.
수혁은 그런 바루다를 가볍게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야, 근데 아까 환자는 뭔데?”
“아…… 응. 일단 입원장은 날렸는데.”
“누구한테 노티드리고?”
“우선 일반으로.”
“네 앞으로 입원시켰다고?”
“그게…… 아, 진짜 모르겠더라고. 이게 그냥 보내도 되는 건지…….”
수석 전공의, 그러니까 내과에서는 3년 차가 되면 입원장을 날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긴 했다.
하지만 지정의가 될 권한은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되었다.
누군가에게 노티를 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선조치 후보고 형식의 입원을 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지상은 여력이 있었는데도 선조치 후보고 격의 입원을 시킨 마당이었다.
이건 그냥 자신이 잘 모른다는 말을 하기 싫었다는 것으로밖에는 해석이 안 됐다.
[자존심이 세네요?]
‘원래 이런 애는 아니었는데.’
[가르쳐 주면 왠지 다 그냥 자기 공으로 돌릴 거 같은데.]
‘일단 들어나 보자. 나도 모를 수도 있잖아.’
[얘가 모른다고 그럴까요? 수혁이야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만 저는 좀…….]
‘아, 시끄러워……. 그냥 좀 듣자.’
[뭐, 알겠습니다. 존중합니다.]
수혁이 바루다와 더불어 지상의 선택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사이, 지상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수혁의 바루다와의 대화는 능숙해질 대로 능숙해진 참이라 지상은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얘가 그래도 내 말을 잘 들어 주긴 하는구나, 뭐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보내도 될 거 같거든? 근데 촉이라고 하냐? 가슴이 너무 불안한 거야. 그냥 보내면 사고 날 거 같은 그런 느낌.”
“흐음…….”
“네가 볼 때는 우습겠지만, 이게 진짜 이렇네.”
“아니, 아냐. 촉이라고 했지?”
“응.”
“흐음.”
병원마다 부르는 말은 다를 수도 있을 터였다.
촉이 좋다거나 감이 좋다거나 하는 식으로.
아무튼, 충분히 교육을 받은 내과 의사의 촉이라는 건 그저 무시해도 좋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구전처럼 촉이 좋은 사람에 대한 전설이 내려왔겠는가.
[데이터로 증명되지도 않은 걸 뭐 그렇게 높이 평가합니까?]
물론 바루다는 볼멘소리를 해 왔다.
수혁 피셜 깡통에 불과한 녀석에게는 촉 같은 건 한낱 인간의 미신 같은 것일 터였다.
수혁은 딱히 바루다와 이런 내용으로 입씨름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무시하기로 했다.
[어어, 나는 개무시하고 어?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놈이랑 얘기하네? 이런 게 바람인가?]
바루다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수혁은 이제 이런 잡담 정도엔 넘어가지 않았다.
“어떤데? 열 양상이.”
“음……. 우선 일주일 정도 됐어.”
“일주일?”
“길지? 일주일은?”
“응, 긴데? 뭐 따로 치료를 아예 안 받았나?”
“아니. 동네 의원에서 진통 소염제 받아서 먹었대.”
진통 소염제라.
아픈 것도 아닌데 그걸 왜 먹나 싶을 수도 있을 텐데.
사실 진통 소염제는 거의 기본적으로 열도 내린다고 보면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바이러스에 의한 가벼운 감염은 일주일 동안 무리 안 하고 쉬면 나았고.
근데도 열이 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나이가 많나? 아니면 지병이 있거나.”
“아니, 31살이야. 지병도 없대.”
“진단이 안 된 건 아니고?”
“직장인 검진 계속 받고 있대. 경고도 뜬 적이 없다고 했어.”
“으음.”
생각보다 검진의 유용성은 컸다.
거기서 뭐가 아예 없다면 진짜로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게다가 31살이라면 사실 검진을 안 했어도 병이 없는 쪽으로 의심하는 게 옳았다.
의학적인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나이가 깡패였으니까.
[나이도 어리고, 지병도 없는데 발열이 일주일간 지속됐군요.]
이쯤 되니 꽤 흥미롭게 느껴졌는지 바루다 또한 딴소리 대신 케이스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감염 또는 급성 백혈병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아…… 급성 백혈병…….’
너무 젊은 나이에 발생한 비특이적인 발열은 간혹 급성 백혈병을 시사하기도 했다.
뜬금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수혁은 마침 얼마 전 이 비슷한 환자를 본 기억도 있었다.
지상도 그랬는지 대번에 표정을 굳혔다.
“그래서 이게 혹시 백혈병은 아닌가 싶은데…… 랩도 이렇거든?”
“랩이 있어?”
“어, 그 동네 의원에서 간단하게 CBC 정도만 했나 봐.”
“아……. 봐 봐.”
“여기.”
수혁은 지상이 슥 하고 전해 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개발새발 쓴 걸 보니 그야말로 악필 그 자체였다.
다행히 숫자는 명확해서 수치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WBC 3300, Hb 12.8, platelet 161,000.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모두 적군요.]
‘Pancytopenia(범혈구 감소증)가 있어. 근데…… 그렇게 수치가 나쁘진 않은데?’
[그래도 급성 백혈병 가능성이 올라가긴 하네요. 영 맹탕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3년 차 된다고 여기까진 생각할 줄 아네요.]
바루다는 수치를 다시 한번 입력하고는 지상에 대한 평가를 조금 새로이 내렸다.
이까짓 거 가지고 수정할 정도라면 원래는 진짜 개판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어때?”
“확실히 워크 업 해 볼 필요는 있겠는데? 어, 너 전화 온다.”
“어…… 병동이네.”
“받아. 난 괜찮아.”
“어, 고마워.”
지상은 전화를 받고는 곧장 수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입원했나 보다. 혹시 바쁘지 않으면…….”
“같이 가 달라고?”
“어.”
“음…….”
수혁은 잠시 스케줄을 떠올렸다.
[병동에 있는 환자들은 다 스테이블 합니다.]
‘연구는?’
[그거야 뭐 데이터가 쌓여야 하죠. 그리고 어차피 만드는 건 공학도느님들이 하실 거 아닌가요?]
‘공학도느님은 뭐야.’
[이 바루다를 만드신 분들이니 일종의 신이죠.]
‘거…….’
이 자식은 어떻게 된 게 프로그램 주제에 자기애가 이렇게 강할까.
정말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개발에 관여했던 사람들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특별한 일정은 없습니다.]
‘알았어.’
하지만 또 바루다를 미워할 수는 없는 게.
이렇게 재깍재깍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가.
해서 수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답을 줄 수 있었다.
“그럴까? 지금 가 보지, 뭐.”
“다 먹은 거야?”
“응.”
“고마워. 내가 커피 살게.”
“좋지. 콜드브루로 부탁해.”
“응, 고맙다 진짜. 너가 봐준다고 생각하니까 든든해지네.”
지상은 진심이었다.
그 증거로 얼굴에 안도의 빛이 확 피어났다.
바루다가 눈치챌 정도로 극명한 변화였다.
[이 새끼 좀 얄미운데요?]
‘그래도 동기잖아.’
[어차피 군대 가잖아요. 거기 다녀오면 수혁보다 3년 아래 되는데.]
‘아.’
동기면 그래도 교수 될 때 깽판 놓을 수도 있어서 조심하고 있었는데.
군대를 생각하지 못했다.
수혁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바루다는 껄껄 웃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웃음소리를 출력하고 있었는데, 누군진 몰라도 눈앞에 있으면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웃음소리였다.
[역시 속이 시커멓군요, 수혁. 한결같아서 좋습니다.]
‘시커멓다니.’
[어쩐지 받을 것도 없는데 잘해 준다 싶었습니다.]
‘시끄러……. 환자나 보러 갈 거야.’
뭐가 어찌 됐건 보기로 한 환자 아닌가.
게다가 이미 흥미가 돌기도 한 참이었다.
해서 수혁은 지상이 커피 사러 간 사이에 병동으로 향했다.
“방금 올라온 환자분 혹시 병실에 계시나요?”
그리곤 평소 알고 지내던 간호사에게 물었다.
간호사는 이 양반이 뭘 묻는 건가 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유지상 선생님 환자요?”
“아, 네. 맞아요. 그 환자분.”
“음……. 계실 거예요. 방금 올라오셨어요.”
“옷은 갈아입으셨을까요?”
“아……. 확인할게요. 잠깐만 계세요.”
“네, 감사합니다.”
수혁은 담당 간호사가 환자 확인하러 간 사이 컴퓨터 앞에 앉아 차트를 깠다.
아까 지상에게 이것저것 듣기는 했지만 혹 놓친 게 있을까 봐서였다.
‘음, 외래 차트가…… 여기 있네.’
[해외여행력도 없군요. 생각보다 꼼꼼한데, 그 친구?]
‘여기 태화야. 여기서 2년 하면 싫어도 잘하게 되지.’
[그런가…….]
수혁은 그 외에 또 다른 정보가 없는지 확인했다.
아쉽게도 그게 다였다.
다른 병원에서 하고 왔다는 검사는 정말 CBC가 다였던 탓이었다.
그 흔한 흉부 엑스레이도 찍지 않은 상황.
이래서야 문진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선생님, 환자분 나오셨어요. 저희도 환자 사정해야 해서요, 어차피.”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먼저 몇 가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죠. 이번에도 한 방에 딱 진단해 주세요. 환자도 저희도 편하게.”
“노력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