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70화 (170/1,303)

170화 열이 난다고 (3)

수혁은 멀리서 다가오는 환자를 우선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대신, 정말로 바라만 보았다.

[키는 대략 160에 55kg. 정상 체중이군요.]

‘걸음걸이만 보면 힘이 엄청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고 딱히.’

[네, 황달이 있거나 다른 이상 소견이 보이진 않습니다.]

바루다와 대화를 나누면서였다.

남들에게는 넋 놓고 있는 것으로만 보이는 이 시간이 수혁에게는 거의 비밀 병기와도 같았다.

‘발열 말고는 특이 사항이 없다, 이건가?’

[네, 팔꿈치에도 멍이 있지는 않습니다. 무릎은 한번 이따 봐야겠군요.]

‘멍이라.’

혈소판이 감소되어 있긴 했지만, 그게 딱히 멍으로 이어질 만한 수치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멍이 들거나 피 나는 시간이 늘어지는 데 작용하는 게 혈소판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아직 검사해 보지 않은 요소들로도 충분히 증상은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증상으로 나타났다면 좀 더 급성 백혈병 쪽으로 기울 수도 있었고.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걸 조금 성가시다는 이유로 안 할 수는 없단 얘기였다.

“선생님, 먼저 얘기 나누시겠어요? 저희가 하면 오래 걸려서요.”

그 후로도 이런저런 토론을 나누고 있으려니, 담당 간호사가 말을 걸어왔다.

어느새 눈앞에 선 환자를 가리키면서였다.

환자는 서 있기도 힘든지 바로 의자에 앉아 버렸다.

“아, 네. 그…… 바이털만 한번 체크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담당 간호사는 환자에게 즉시 양해를 구하고 혈압, 심장박동 수, 호흡수 그리고 열을 쟀다.

결과는 거의 동시에 수혁에게 전달되었다.

[혈압은 115/78. 심장박동 수 83, 호흡수 17, 열은…… 38.3도로군요.]

발열 말고 다른 수치는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괜히 지상이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했던 게 아니라는 얘기.

‘당장 넘어가진 않겠네, 걔 말대로.’

[네, 하지만 진술에 따르면 열이 벌써 일주일이나 됐어요. 눈에 보이진 않을 테지만, 혹 패혈증으로 진행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지, 방심하면 안 되지.’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이제 인류는 감염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실제로 수많은 감염병을 치료하기 시작했으니, 그때는 그게 당연한 생각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균들이 점차 내성을 획득했고, 또 페니실린이 아예 듣지 않는 균주들도 속속 발견되었다.

결국, 여전히 대학 병원에서 주요 사망 원인 중 하나는 감염이었다.

“환자분. 김현주 님 맞으신가요?”

해서 수혁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는 입을 열었다.

김현주, 그러니까 환자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아까 외래에서 봤던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입원까지 했으니 이제 교수님을 만나나 했는데, 수혁은 도리어 지상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김현주 님 맞으세요?”

“아…… 네.”

하지만 이곳은 다른 병원도 아니고 태화 의료원이었다.

적어도 대한민국 내에서는 아직 최고 중 하나라는 명성을 지키고 있는 병원이라는 뜻이었다.

떄문에 눈앞에 있는 게 아무리 애송이 의사 같아 보이더라도 일단 환자는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서른이시네요?”

“네.”

“공무원이시고…….”

“네.”

“발열이 있었던 건 일주일 전, 맞나요?”

“네, 일주일…… 정도 된 거 같아요.”

수혁은 이미 차트에 적혀 있는 질문부터 재차 던졌다.

이 무슨 쓸데없는 일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게 또 문진의 기술이기도 했다.

환자는 의사와는 달리 의학적 질문이나 사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들을수록 더욱 체계적인 답을 하게 되었다.

또 처음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말해 주기도 했다.

“최근에 해외 다녀오신 적은 없으시고요?”

“네. 없습니다.”

“발열 말고 다른 증상은 없으세요?”

“다른 증상이요?”

“기침이나, 가래요.”

“아, 그런 것은 없어요.”

호흡기 증상이 없다라.

수혁뿐 아니라, 바루다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후로도 몇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은 발열과 그로 인한 두통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특징적인 증상이 있으면 아무래도 진단이 쉬워지는 법인데.

‘어렵겠는데, 이거.’

[그러니까요. 우선은 문진만으로는 좀 부족하겠어요. 청진이라도 해 보죠.]

‘오케이.’

[무릎도 좀 보고요.]

수혁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문진을 끝내고 청진기를 집어 들었다.

“환자분 등으로 할게요. 숨 크게 쉬고 내쉬면 됩니다.”

“아…… 네. 아까 했는데, 또 하나요?”

“아마 계속 이럴 거예요. 아직 진단명이 안 나왔거든요.”

“아…… 네.”

환자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뒤로 돌아앉았다.

‘미안한 얘기지만, 지상이 청진이랑 제 청진은 비교가 안 돼요.’

수혁은 도저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생각을 하면서 청진기를 들이댔다.

[흠.]

‘정상 같은데. 이상한 점 없어?’

[우하엽 한 번만 더요. 아, 아니네. 정상이네. 정확한 건 엑스레이 찍어 봐야 하겠지만, 증상도 없고 청진도 정상이고. 폐 쪽 문제는 아닐 가능성이 90% 이상입니다.]

왜 100% 확신하지 못하냐는 무식한 말은 하지 않았다.

원래 폐 병변은 엑스레이에서도 안 보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만큼이라도 확신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수준이라고 보면 되었다.

“무릎도 좀 볼까요?”

“네?”

“혈소판이 좀 떨어져 있어서요. 멍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아…… 기억엔 없는데.”

“다친 기억이 없는데 멍이 있으면 의미가 있죠.”

“아, 그렇군요. 음.”

뭔가 있어 보이는 말에 환자는 옅은 한숨과 함께 바지를 걷어 올렸다.

[입 냄새가 심하네요.]

‘말라서 그럴 텐데. 확실히 아픈 지 1주일 이상은 된 거야, 그럼.’

구취는 생각보다 여러 가지 단서를 주기도 했다.

아주 역한 고름 냄새를 풍기는 경우엔 정말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이번엔 아니었다.

그저 환자의 몸이 안 좋고, 약간의 탈수가 동반되어 있을 거란 예상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거기에 더해 무릎에도 아무 병변도 없었다.

여러모로 아쉬운 상황이었다.

딱히 얻어 낸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현종 원장님의 말을 되새기세요. 아무것도 없는 것도 하나의 단서입니다.]

‘아…… 그래, 그렇지, 참.’

하지만 바루다 덕에 조금은 덜어 낼 수 있었다.

“다 된 건가요?”

환자는 지루한 얼굴이 된 채 바지를 내렸다.

수혁은 그런 환자를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몇 가지 검사를 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검사라면…….”

“뭐, 기본적인 피 검사랑 엑스레이 같은 거죠.”

“아, 네.”

“그럼 담당 간호사님하고 얘기 나누세요. 전 처방을 좀 내겠습니다.”

“네…….”

아무래도 환자는 기운이 없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수혁은 그런 환자와 일별한 후 모니터를 마주했다.

‘일단 컬쳐(Blood culture: 혈액 배양 검사) 넣고.’

[기본 검사 넣고, CBC도 따라가 보죠. 변화가 있으면 또 이게 의미가 있습니다.]

‘하긴, 오케이. 흉부 엑스레이도 넣고.’

[네. 지금으로써는 이게 최선입니다. 더 뭘 할 필요도 없어요.]

이게 세균 감염인지 바이러스 감염인지도 불명확한 상황 아니던가.

그렇다고 바이털이 막 흔들리는 상황도 아니고.

무리해서 치료를 선제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의학에서 모든 치료나 검사는 부작용 대비 효과를 따져 가면서 해야 했으니.

딸깍.

마침 처방을 다 내린 후에야 지상이 나타났다.

아까 수혁이 주문했던 커피를 들고서였다.

“어, 환자 본 거야?”

녀석은 수혁이 띄워 놓은 처방 창을 보고는 반색했다.

입원한 날 내리는 처방이 제일 골 아픈데, 그걸 다 해 놨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같은 연차끼리 남의 환자 건드리네 뭐네 할 것도 없었다.

이미 지상을 비롯한 현 태화 의료원 내과 2년 차에게 수혁은 천재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어. 뭐…… 문진이나 검진에서 특별한 게 있진 않더라. 일단 기본 검사 따라갔어.”

“아…… 그래, 그렇구나.”

“나도 여기 환자 한 분 계시거든. 보러 오는 김에 매일 볼게.”

“아……. 그래 주면 너무 고맙지.”

“근데 너 진짜 노티는 안 하려고? 불명열은 신현태 과장님이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렇긴 한데…… 일단 암인지 아닌지만 확인되면.”

“음…… 그래, 뭐. 알았다. 커피 잘 마실게.”

수혁은 알아서 하라는 투로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렇게 대략 한 20분이 지나자 수혁이나 지상을 찾는 전화가 여기저기서 오기 시작했다.

수혁이 제아무리 완벽하게 환자를 보고 있다고 해도 사소한 문제까지 다 아침에 내린 오더만으로 해결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상이야 당연히 그 정도가 더했다.

해서 둘은 자연스럽게 찢어져 각자 환자에게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차 하나가 줄어서 사람이 적은 내과인데 3년 차들은 공부하러 나간 터라 스케줄이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결국, 수혁이 다시 김현주 환자가 입원한 병동에 온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별일…… 없었죠?”

수혁은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이는 나이트 번 간호사들을 향해 물었다.

그중 하나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눈 밑이 시커멨다.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아는 사이였다.

그렇다는 건 베테랑이라는 건데 왜 이렇게 힘들어 보일까.

‘설마, 어제 그 환자가 어떻게 됐나?’

[노티했겠죠, 그럼.]

‘엄밀히 말하면 내 환자는 아니잖아. 지상이가 받았겠지.’

[아…… 그럼 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설마 하는 생각에 수혁은 조금 급하게 말을 이었다.

“간밤에 뭔 일 있었어요?”

“일 있었죠. 오랜만에 일반 병실에서…… 어휴 난리도 아니었어요. DNR 받은 환자도 아니라…….”

간호사는 수혁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며 치료실을 가리켰다.

그제야 수혁은 치료실에 보호자들을 비롯해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제 그 환자는 아니죠?”

“아……. 그 환자분이요? 아니에요. 저분은 외과 환자예요. 수술받고 퇴원했다가 응급실로 왔는데, 병실 없어서 이쪽으로 왔거든요? 와, 근데 이게 터진 건지 뭔지…… 갑자기 혈압이.”

“아…… 외과구나.”

내과 병동 간호사들은 내과 의사들이 그러한 것처럼 내과 질환에는 달인이 되지만.

그만큼 또 외과 환자들에 대한 처치는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수혁은 간호사들이 유독 힘들어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평소 보지 않던 종류의 환자를, 그것도 중환자를 일반 병실에서 보게 된 탓일 터였다.

“지금은 그럼 좀 어때요?”

“익스파이어…… 하셨어요. 손도 못 써 보고……”

“아…….”

거기에 결과도 좋지 않았으니 병동 분위기가 이 모양인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수혁까지 상념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맡은 환자가 있지 않은가.

“어제 입원한 분은 괜찮은 거죠? 그럼?”

“아…… 네. 근데 혈압이 조금 내려갔어요. 유지상 선생님한테 노티됐는데, 아직 어세스(Assessment)는 안 됐습니다.”

“혈압이?”

“네.”

“검사 어제 나간 건 나온 거죠?”

“아마…… 네, 그럴 거예요.”

“알겠습니다.”

혈압이 내려갔다는 건 병이 어떻게든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방금 누군가의 죽음을 전해 들은 참이기도 해서 수혁의 미간에 주름이 팼다.

‘일단 결과 좀 보자.’

[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