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열이 난다고 (5)
[오.]
‘너 한 번만 더 오 이 지랄하면 머리에서 뽑아 버린다?’
[하지도 못할 거면서 협박은.]
바루다는 마지막까지 속을 긁어 놓고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러쿵저러쿵 개기긴 해도 진짜 떼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다양한 데이터를 축적함에 있어서 수혁의 몸에 이식된 지금과 같은 상황이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드물다는 걸 완전히 인식한 덕이었다.
[발열에 비해 심장박동 수가 오르지 않는……. 상대적 서맥을 일으키는 감염병에는 레지오넬라, 황열, Q열, 앵무병, 장티푸스, 뎅기열 등이 있군요.]
‘음…….’
상대적 서맥을 일으키는 감염병이 있기는 하단 얘기였다.
그렇다면 아까보단 상황이 좋아졌다는 뜻인데.
그럼에도 수혁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환자 공무원이라고 했지?’
[네.]
‘해외에 나간 적도 없고.’
[그렇죠.]
‘그럼 지금 열거한 병 중에 걸릴 만한 가능성이 있는 게 있나?’
[쥐 털만큼도 없다고 사료됩니다.]
‘넌 꼭 말을 해도…….’
수혁은 성질을 내면서도 쥐 털이라는 말이 꼭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정말이지 그만큼이나 가능성은 적었다.
그리고 상대적 서맥은 비단 감염병에서만 발생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림프암에서도……. 상대적 서맥이 발생할 수 있지?’
[네,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약에 의한 열이나 중추신경계 병변과 같은 비감염병 원인이 있습니다만 현재 가장 의심되는 건 림프암입니다.]
‘이런 제기랄.’
수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렇다고 신현태의 접근을 곧장 알아차리거나 하진 않았다.
일단 등을 지고 서 있는 데다가, 아직 수혁은 CT 영상을 다 본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수혁은 별말 없이 마우스 스크롤을 내려 영상을 훑었다.
“흐음…….”
보다 못한 지상이 나서려 했지만, 신현태가 잡았다.
“쉬. 수혁이 진단하는데 방해하지 마.”
“그…… 네.”
지상은 세상 어떤 교수가 레지던트 진단한다고 숨소리마저 죽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원장 숨겨 둔 아들이라더니 과장까지 눈치를 보네.’
눈치를 본다기보다는 그저 이뻐하는 것이었지만.
그간 수혁과 신현태 사이에 있던 일을 전혀 모르는 지상으로선 그저 삐딱한 상상만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
상념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상념의 대상이었던 수혁이었다.
수혁은 별생각 없이 스크롤을 굴리나 싶더니만 어느 지점에선가 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회맹판(Ileocecal valve: 맹장과 결장의 경계)이 두꺼워져 있군요?]
‘이건……. 장염을 시사하는 소견인데?’
[그러게요. 흐음……. 이상한데. 환자 병력상 그럴 만한 건덕지가 없지 않습니까?]
‘아냐……. 아냐. 문진……. 우린 안 했어. 우린 그냥 차트에 적힌 것만 참고했다고.’
[음……. 돌이켜 보니 그렇군요.]
바루다는 축적한 데이터를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시 확인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환자의 행적 관련해서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지상이 적어 둔 것만 참고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과연 지상을 신뢰할 수 있을까?
‘아까 영상 보자마자 이거 괜찮은 거 아니냐고 했지?’
[일반적인 레지던트 수준에서는 그럴 수 있죠.]
‘하지만 내가 마냥 신뢰해서는 안 돼. 그렇지?’
[그렇습니다.]
바루다가 평하기에 이 병원에서 수혁이 일단 한 수 접어 줘야 할 만한 사람은 이현종뿐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까지 범위를 넓히자면야 그보다 수가 많아지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지상이 들어갈 만큼 널널한 기준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다고 해서 삽질은 아냐.’
[동의합니다. 김현주 환자의 문진을 재수행할 것을 요청합니다.]
‘오케이.’
결론을 내린 수혁은 벌떨 일어났다.
그 어떤 징조도 없이 일어나는 바람에 뒤에 서 있던 신현태는 하마터면 코가 깨질 뻔했다.
“어.”
“괜찮아, 괜찮아. 어디 가는지 몰라도 따라가자고.”
그러나 신현태는 화를 내기는커녕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수혁의 뒤를 가만히 따랐다.
이쯤 되니 지상이나 펠로우나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정도만 따지면 펠로우 쪽이 더했다.
‘차트 봤는데……. 나도 잘 모르겠던데.’
방금 CT를 봐서 그런가 몰라도 더 헷갈렸다.
검사 결과들이 다 애매하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면 아직 그 어떤 질환도 가리키고 있는 거 같지 않았다.
확실한 건 단 하나, 환자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냥 교수님이 받아서 빨리 진단하고 치료를 해야지……. 이러다…….’
안 그래도 칠성 병원은 하이푸네 뭐네 하면서 신의료 기술을 도입해서 쭉쭉 앞서 나가고 있고.
아선 병원은 드디어 아선 기업에서 그룹 차원의 지원이 들어가면서 병상을 팍팍 늘려 나가고 있는 마당 아니던가.
벌써 아시아 최대 병원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다.
이러다가 태화는 ‘한때 1등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괜찮은 병원’ 정도로 자리매김하게 될 수도 있었다.
‘교수님들이 별것도 아닌 놈한테 푹 빠져 가지고 정신 못 차리고 있으니 이렇지.’
군대 갔다 왔더니 웬 듣보잡 한 놈이 이현종이고 뭐고 다 휘어잡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나름 한 끗은 있는 모양이지만.
의학이라는 게 어디 1, 2년 해 가지고 성과를 볼 수 있는 학문이던가.
10년간 한 우물 파야 아, 얘가 좀 이 분야에 관심이 있구나 하는 동네였다.
“거참.”
그러니 펠로우가 불만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신현태는 그와 거의 정반대라 할 수 있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뭘 의심하고 있는 걸까?’
거의 순수 100% 기대감만 품고 있었다.
수혁은 그렇게 뒤따르고 있는 혹들이 많은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병실 문을 열었다.
“환자분, 계세요?”
“아……. 네.”
“CT 찍고 오신 거 설명도 드리고, 몇 가지 질문도 드릴 겸 해서 찾아왔어요. 들어가도 되나요?”
“네, 선생님.”
겁준 것에 비해 CT 촬영은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고 딱히 불편하지도 않았다.
조영제가 들어갈 때 뜨끈하길래 이게 설마 부작용의 시작인가 했는데, 그게 그냥 시작과 끝이었다.
덕분에 기분이 내려갈 때보단 좋아져 있었다.
‘뭐야?’
그 기분은 수혁이 들어서는 순간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웬 나이 지긋해 뵈는, 그러니까 입원하는 순간부터 보고 싶었던 양반이 들어오면서 동시에 조용히 해 달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데, 이거?’
아마 환자가 조금이라도 수양이 부족했더라면, 그리고 수혁이 질문할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지 않았다면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환자는 정신 수양이 꽤 괜찮은 사람이었고, 수혁은 정신이 없었다.
해서 수혁은 그저 아까부터 하려고 했던 말부터 꺼냈다.
“CT상에 조금 이상한 부분이 보여요. 아직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찍기 전보단 진단에 한발 다가섰습니다.”
“음…….”
“하지만 정보가 여전히 부족해서요. 몇 가지 질문을 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동시에 뒤에 있던 신현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손가락을 입에 붙인 채였다.
이 병원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더니.
이래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입원했는데.
검사까지 한 마당 아닌가.
우선은 장단에 맞춰 주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네.”
“이전하고 중복된 질문일 수도 있어요. 그때랑 다른 게 생각나면 그걸 얘기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해외에 최근에 나간 적이 없다고 하셨죠?”
“네.”
“한 달 이내에 아예 없나요?”
“그럼요. 없죠.”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해외 여행력이 있다고 하면 딱인데.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것만 묻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해외여행 다녀온 사람하고…… 밀접한 접촉한 적은 없고요?”
“여행이요? 아뇨, 딱히.”
“흠……. 공무원이라고 하셨죠?”
“네.”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공무원으로서.”
“음.”
뭔가 취조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일을 하냐니, 감사 나왔나?
불만이 고개를 쳐들려는데 신현태가 눈에 떡하니 들어왔다.
더없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다시 한번 크게 끄덕이고 있는 신현태.
복도가 밝아서 그런가 후광마저 비치고 있었다.
저 얼굴을 보고 고개를 흔들 수 있다면 그건 악마가 아닐까.
“그…….”
“대답하기 곤란한가요? 국정원?”
“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리고 국정원 같은 시답잖은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좀 풀어졌다.
해서 환자는 미소까지 띤 채 입을 열었다.
“그…… 보건소에 있어요.”
“보건소? 여사님이세요?”
수혁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기에 보건소에서 딱히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다.
그저 공보의 친구들에게 주워들은 게 다인데.
동료 얘기하면 여사님밖에 말이 안 나왔다.
“아, 아뇨.”
그 말에 환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래도 열이 나서 좀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말을 못 이어 나갈 정도는 아닌 듯했다.
“실험실에 있어요.”
“실험실…… 이요?”
“네, 배지로 배양 실험하고, 뭐.”
“배양이라.”
배양.
무언가를 키운다는 뜻이었다.
보건소에서 배양 실험한다는 얘기 또 처음 들었지만.
어쩐지 아무거나 막 키울 거 같진 않았다.
“혹시 최근엔 어떤 실험을 했죠?”
“식품 매개 전염 배지 실험이요.”
“아하, 식품.”
수혁은 반가운 나머지 손뼉까지 쳤다.
방금 장염을 시사하는 CT 소견을 확인한 덕이었다.
물론 그냥 부어 보일 뿐, 감염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식품 매개 전염 배지 실험을 했다면 가능성은 농후했다.
“혹시 어떤 걸 가지고 하셨나요?”
“전 테크니션이라서요. 정확히…… 무슨 균을 가지고 했는지는 몰라요.”
“물어볼 수는 있으시죠?”
“그거야……. 네.”
“그럼 지금 바로 물어봐 주실 수 있나요?”
환자는 이제 저도 모르게 뭔가 새로운 요청이 나오면 뒤에 있는 신현태를 바라보았다.
신현태는 그럴 때마다 보살 같은 얼굴로─실제로 인자해서 별명이 보살인 적도 있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는 따지고 보면 기독교 신자라 불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미소였다.
“그, 네.”
해서 환자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전화를 걸었다.
“어……. 현주 씨. 몸은 좀 어때요? 입원했다더니.”
“아……. 아직 열나고, 그래요.”
“무슨 병이래?”
“진단 중이에요.”
“그래? 그…… 요새는 칠성이 잘한다니까. 아선이랑.”
“그게. 그.”
환자는 슬며시 음량을 줄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저 이번에 실험한 거 있잖아요?”
“어? 응, 그거. 결과 걱정돼서? 잘 자라고 있어.”
“아뇨. 제가 실험했던 균이 정확히 뭐죠? 어렴풋이 기억은 나는데…….”
“아……. 잠깐만.”
상대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장부라도 보는 모양이었다.
“어, 여깄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 다시 통화가 이어졌다.
“그…… 이번에 식품 매개 전염 배양했네, 그치?”
“네.”
“균은…… 살모넬라. 살모넬라 파라타이피 에이(Salmonella paratyphi A)야.”
“아……. 살로넬라 파라타이피 에이요.”
“오.”
그 말을 듣자마자 수혁은 다시 한번 손뼉을 쳤다.
살모넬라 파라타이피 에이는 그 이름도 유명한 장티푸스의 원인균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