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75화 (175/1,303)

175화 역시 네가 의국장이다 (3)

치이익.

정든 곱창.

이름처럼 이미 가게랑 정든 사람들만 올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꾸덕거리는 식탁 하며, 누릿하게 변해 버린 벽지까지.

레트로 감성이 유행이라곤 하지만.

이건 사실 레트로도 무엇도 아닌, 그저 허름한 가게일 따름이었다.

“언제 먹으면 돼요?”

“대충 익으면.”

그렇다고 주인장이나 종업원이 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무례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다른 레지던트들처럼 병원 앞에서 식사한 경험이 별로 없는 수혁으로서는 퍽 당황스러울 정도의 응대였다.

[대충 익으면이라고 한 거 맞습니까?]

‘어. 내 청각엔 이상 없는 듯.’

[허어……. 자신감 봐라.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이럴까요?]

‘글쎄……. 나도 몇 번 먹어 봤는데 딱히……. 기억에 남질 않네.’

그럼 혹시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먹을 만한 맛집이냐.

슬프게도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병원 앞에 있는 가게라는 게 다였다.

무슨 이런 병원이 다 있냐는 말이 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막상 이 상권에 와 보면 아마 노력하고픈 생각이 싹 사라질 터였다.

대충 그냥 곱창 비슷하게 만들어 놓으면 차마 가까운 시내마저 갈 시간 없는 불쌍한 중생들이 와서 비싼 돈 주고 사 먹으니까.

“서비스 주실 거요?”

“꼴랑 6인분 시켜 놓고. 사이다 줄게.”

“네, 감사합니다.”

퀄리티에 비해 비싸게 받으면서 막 해도 됐다.

심지어 고맙단 말까지 들을 수 있었다.

제대로 호구 인증을 해낸 지상이 방금 받은 사이다를 슥 하고 밀어 두며 입을 열었다.

“야, 수혁아. 이렇게 보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술, 마시지?”

그리곤 소주를 수혁의 잔에 따라 주었다.

동기끼리 하기엔 좀 많이 예의 바른 모양새였다.

“어? 어어, 마시지. 땡큐.”

수혁은 그게 좀 이상하다 여겼지만 일단 잔을 받았다.

“너무 누추한 데 모시는 거 같아서 미안하다, 야.”

반대편에 앉은, 성이 김씨였는지 이씨였는지 헷갈리는 동기 녀석이 너스레를 떨었다.

“누추하긴, 이 근처 맨날 왔었는데.”

“원장님 아들인 줄 알았으면 맛있는 거 사 달라고 할걸.”

“난 너 진짜 가난한 줄 알았잖어. 옷도 같은 거 입고 일한다고 해서. 생각해 보니까 과외 하면서 어떻게 4등 졸업을 했나 싶더라.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아무래도 오랜만에 보는 사이다 보니 대화 주제가 제한되었다.

이 둘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 한동안 원장 아들에 관한 얘기를 주구장창 해 댔다.

‘나 진짜 과외 하면서 4등 한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인마, 의대 공부가 만만하냐? 남 가르쳐 가며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흐음.]

수혁 입장에서는 별 소득 없는 얘기였는데, 그나마 하나 고르자면 방금 바루다가 보인 태도라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허구한 날 너 만나기 전, 그러니까 학생 때도 잘했다고 하면 맨날 콧방귀만 뀌더니.

동기들 얘기 듣고는 아주 약간의 평가 수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고 계속 이 시간 낭비에 가까운 잡담을 이어 나갈 생각은 없었다.

[빨리빨리 좀 합시다. 이 자식들은 무식한 놈들이 공부 안 하고 술이나 처먹고, 어? 이러니까 태화 의료원이 밀리지.]

‘아니, 그 정도는 아냐. 레지던트들 잘못이겠냐, 설마.’

[기둥인 내과가 이러니까 밀리는 거죠. 지금 내과가 기둥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까?]

‘논리 비약이 좀 심한데?’

[아무튼,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일어납시다. 공부가 밀렸어, 지금.]

‘언제는 가라고 가라고 난리를 피우더니.’

[의사라는 양반들이 이렇게까지 시간 낭비하는 줄은 몰랐지.]

시간 낭비라고 하기엔 불과 30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수혁이 바루다와 함께하게 된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그냥 뭐 가까이 지낸 게 아니라 한 몸으로 지낸 게 그만큼이었다.

어느새 수혁도 바루다를 많이 닮아 있었다.

바루다가 수혁을 닮게 된 만큼이나.

“오늘 지상이 통해서 만나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신현태 과장님이 의국장 어떻겠냐고 말을 하셔서.”

“아……. 의국장.”

“오.”

“뭐, 너밖에 사실 할 사람이 없지.”

몇몇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의 눈동자에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단지 교수의 길에 가까워서는 아닐 터였다.

수혁은 의국장이란 직함에서 귀찮음을 제일 먼저 떠올렸지만.

다른 이들은 같은 직함에서 권력을 떠올리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과장님이 직접 말씀 주신 거라 거절하기는 좀 그렇고……. 너희들 의견을 들어 보려고.”

수혁은 특히 바루다가 많이 아쉬워하고 있다던, 이씨인지 김씨인지 헷갈리는 녀석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말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지만.

해석해 보자면, ‘나는 할 건데 반대하는 사람 손 들어’ 정도였다.

‘이걸 꼭 해야 된다 이거지?’

[빨리 교수하고 싶으면 합시다. 논문도 쫙쫙 뽑아 먹어야죠.]

‘알았다…….’

비록 속으론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다 해도.

겉으로 드러난 수혁의 눈은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수혁에게 대놓고 대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왕따라서 그동안 어울리지 않은 게 아니지 않은가.

수혁도 나름 어울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으니.

그저 노는 물이 달랐을 따름이었다.

이미 준교수급이었다.

적어도 레지던트들 사이에서는.

“어? 네가 하면 좋지.”

“그래, 네가 발표 준비 봐주고 하면 우리야 안심이지.”

“논문 2저자 주면……. 좀 도와주고 할 거지? 그럼 난 무조건 찬성이야.”

혓바닥이 좀 긴 친구가 있긴 해도 다들 찬성이었다.

“아, 당연하지. 논문 2저자면 통계도 돌리지.”

수혁은 딱히 거기다 대고 산통을 깨진 않았다.

바루다의 조언도 필요 없었다.

그전에도 나름 원만하게 잘 지내는 편이었으니까.

인간관계에 서툰 편은 아니라, 이 말이었다.

[됐군요. 뭐…… 이 사람들이 설마하니 SCI 점수 높은 곳에 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2저자 열 개 이상 쌓이면 교수 임용에 유리하긴 할 겁니다.]

‘열 개면 당연하지. 근데 그게 되나?’

[다들 수혁에게 부탁 못 해서 안달일 텐데……. 의국장 달면 핑계가 생기는 셈이죠. 제가 도와주면 논문 두어 시간이면 뚝딱 아닙니까? 데이터만 있으면.]

‘음.’

논문을 두어 시간 만에 쓴다.

아마 누가 들으면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 하고 후려칠 만한 발언일 터였다.

하지만 수혁은 가능했다.

바루다가 있으니까.

물론 좋은 논문을 쓰려면 아이디어와 연구 계획이 중요하니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이미 세워진 연구 계획에 따라 데이터까지 축적해서 가져오면 뚝딱이었다.

‘좋네.’

[좋죠. 게다가 후배들한테 좀만 잘해 줘 보세요. 이수혁 사단도 생길 겁니다. 보셨죠? 이현종 원장, 순환기내과에서의 입지를.]

‘대단하긴 해.’

이현종은 순환기내과 내에서 학술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운 사람이었다.

한때 흉부외과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심근경색에 대한 시술을 굉장히 많이 가져온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그가 의국장 시절 쥐어패는 악습 없애고, 자기 돈 들여다 애들 밥 사 줘 가면서 만든 이현종 사단의 힘이라고 봐야 했다.

아무래도 태화 의료원이다 보니 그 사단 대부분은 하다못해 지방 병원이라도 가서 교수를 하고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에 이현종이 뜨면 모실 사람이 있단 얘기이기도 했다.

‘좋아……. 올해는 좀 더 바쁘겠네.’

[그렇다고 공부 소홀히 할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수혁이 바루다와 더불어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을 때쯤, 나머지 인원들도 계속 떠들어 대고 있었다.

수혁과는 조금 다른 주제를 가지고서였다.

“근데 그럼 약국장은 누가 하지?”

“음……. 그러게. 누가 하려나.”

바로 약국장은 누구냐에 대한 논의였다.

어찌 보면 이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훨씬 많을 수도 있었다.

의국장은 사실 무형의 가치를 가진 자리이지만.

약국장은 실질적 이득이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옛날 리베이트가 활성화되어 있을 땐 오히려 약국장이 의국장보다 위에 있을 때도 존재했을 지경이었다.

소위 알값 받아 그랜저 뽑는다는 말이 있었으니까.

“그거 의국장 권한 아냐?”

“하긴 의국장이 자기 도울 사람 뽑는 거지.”

예전 같진 않지만, 지금도 이런저런 혜택들이 있었다.

제약 회사들이 호텔에서 여는 심포지움에 가면 식사권을 준다던지, 숙박권을 준다던지.

또는 점심이나 저녁에 와서 자기 돈 주고 먹기엔 좀 부담스러운 음식을 사 준다던지.

불법은 아닌데, 묘하게 불법스러운 혜택들이라고 보면 되었다.

심지어 여전히 인성에 따라 하는 놈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미 졸국하고 나간 지 1년 된 김진용이 있었다.

고급 승용차의 대명사인 제네시스를 샀다는데, 레지던트 월급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고작해야 레지던트에 불과한 약국장이 이럴 수 있는 이유는 그리 중요치 않은 약들이라도 그 약을 결정하는 권한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약국장은 의국장을 도와야 하잖아.”

그때 지상이 입을 열었다.

약간은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서였다.

[분해 효소가 좀 부족한 모양입니다. 하긴 동양인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죠.]

바루다는 그런 지상을 보며 이러쿵저러쿵 의학적인 내용을 주워 넘겼고.

수혁은 이놈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하는 얼굴로 잠자코 있었다.

“내가…… 그래도 이 중에서는 수혁이랑 제일 친하지 않나?”

그랬더니 아주 뻔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오……. 왜 그렇게 모임 만드는 데 열성적이었나 했더니.’

[야심 있는 친구였네요.]

아무리 뻔한 소리라 해도 이만큼 뻔뻔하게 늘어놓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수혁이나 바루다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약국장 하는 게 수혁이도 그렇고 뭐 여러모로 편할 거 같은데. 수혁이 생각은 어때?”

다른 친구들도 감탄만 한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아주 역한 것을 본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태화 의료원 내과라고 해서 다 태화 의과대학을 나온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대형 병원이라 대학 동기는 아닌 애들이 더 많았다.

그렇다 보니 친구 사이라 하기도 좀 애매한 녀석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사람일수록 지상의 이 속 보이는 쇼를 참지 못했다.

“음, 뭐. 난 괜찮을 거 같은데.”

하지만 그런 이들의 의견이나 생각은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결정권을 가진 건 오직 하나 이수혁뿐이었으니까.

“그럼…… 내가 약국장 하는 거야?”

“어, 대신 진짜 많이 도와줘야 해.”

수혁은 일부러 지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진짜’와 ‘많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아무리 둔한 사람도 눈치챌 정도였는데, 지상도 마찬가지였다.

쎄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지상은 약국장이었던 진용이 인스타에 올렸던 사진을 떠올렸다.

‘호텔 가서 잠도 자고 식사도 할 수 있어…….’

누군가에게는 그게 뭐지 싶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지상에게는 일종의 꿈이었다.

“아, 알았어.”

해서 수혁의 제안이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을 알면서도 삼켰다.

“좋아. 그럼 들어갈까?”

그리고 용건을 끝낸 수혁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손에 든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였다.

발신인은 안대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대훈 선에서도, 같이 당직일 2년 차 선에서도 해결 안 되는 환자가 왔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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