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원인이 없어? 배에 물이 차는데? (1)
“아, 그럴까? 들어갈까?”
오랜만에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일찍 헤어지자는 말에 별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 집단 중 대표적인 게 바로 레지던트들이었다.
일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딱히 수혁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도 그랬다.
잠시 일을 미뤄 두었을 뿐, 들어가면 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같이 있었다.
“그래, 들어가자. 그럼.”
비단 오늘 그 일을 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20대 후반의 건강한 청년들이 8시도 안 된 시각에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었다.
오늘이야 어떻게 시간이 돼서 나왔지만.
어젠 새벽 2시에도 자고 3시에도 잔 몸이지 않은가.
쉴 수 있을 때 쉬지 않으면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레지던트 생활이지만 이 정도의 가르침을 받기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길었다.
그만큼 혹독한 세월이었다.
“어, 대훈아.”
해서 수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로비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나마 동기들과 있을 땐 전화를 하진 않았는데, 오늘 백당일 동기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소문이야 나겠지만.
그 소문의 근원이 수혁 자신이 되면 곤란했다.
[정말 로봇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군요.]
‘시꺼, 인마. 다 너 맛있는 거 먹여 주려고 그러는 거야.’
[네, 오늘 먹은 곱창은……. 어휴.]
한숨이 나올 만한 맛이다, 뭐 이런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1인분 딱 채워서 먹고 싶은 맛도 아니었다.
수혁도 그랬지만 바루다는 어차피 한정되어 있는 수혁의 위장을 그런 맛으로 채우는 것을 혐오하는 편이었다.
‘이따 맛난 거 먹을게. 그럼 됐지.’
[감사합니다, 수혁.]
수혁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또 이걸 이용하면 바루다가 고분고분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딜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아, 네. 선생님!”
대훈은 꽤 당황한 목소리였다.
일단 수혁이 전화를 꽤 오래 끌고 다시 해 주었기 때문일 텐데.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진짜 급한 환자였으면 다시 전화를 걸거나 문자라도 보냈을 테니.
“무슨 환잔데, 그래?”
“그……. 제가 지난주에 봤던 환잔데요.”
“지난주?”
이건 또 무슨 소릴까.
수혁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질문을 이어 나갔다.
“지금 어딘데. 병동이 어디야.”
“19층 서병동이요.”
“19층 서? VIP야?”
“그건 아닌데……. 일단 병실이 여기밖에 없어서요. 다행히 환자 어그리는 됐는데, 그래도 좀 부담이에요. 원래 6인실 계시던 분이거든요.”
“음, 아무튼, 지금 갈게. 가서 보게 차트 열어 놔 줘.”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수혁은 전화를 끊으면서 핸드폰에 표기된 시간을 확인했다.
‘8시 12분.’
외래고 뭐고 다 끝났을 시간 아닌가.
지난주에 본 환자가 이 시간에 입원을 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입원했을 당시 있었던 문제가 다시 발생한 모양인데요?]
‘아마 그랬겠지. 음…….’
[6인실에 있던 환자를 특실로 받다니. 골치 좀 아프겠는데요.]
‘그러니까. 이게……. 가격 차이가 좀 심해야지.’
6인실은 막말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그 어떤 숙박 시설보다 저렴하다고 보면 되었다.
가성비가 좋다, 뭐 이런 말이 아니라 정말 쌌다.
밥도 나오는데 하루 본인 부담금이 2만 원 선이지 않은가.
하지만 특실은 그 열 배 아니, 스무 배도 아득히 넘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특히 태화 의료원의 특실은 정말 호텔 방처럼 잘 꾸며져 있었기에 가격대가 아주 셌다.
2만 원에서 60만 원으로.
화가 안 나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띵.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섰다.
“선생님!”
앞에는 대훈이 서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마도 백 당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동기 하나가 어물거리다 사라졌다.
[원래 백 당직한테 노티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바루다는 수혁의 짜증을 풀어 주기 위해 그 동기를 대변했다.
아주 뻔한 놈이었다.
빨리 해결이 돼야 밥을 먹는다, 이 말 아니겠는가.
수혁은 머리 위에 나는 놈 같지만 이럴 땐 또 단순하기 짝이 없는 바루다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어, 준비됐어?”
“네. 이쪽으로…….”
“뭐로 입원했던 거야? 원래는?”
“그…… 배가 불룩해지는 증상으로요.”
“배가 불룩해져?”
“네, 여기.”
대훈은 수혁이 말했던 것처럼 차트를 띄워 놓은 참이었다.
창을 확인한 수혁은 더 캐묻는 것을 고만두고 차트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대훈이 똘똘한 1년 차라 해도 말하는 것보단 눈으로 훑는 게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이거보다 궁금한 점에 대해 선별적으로 묻는 게 훨씬 효과적일 터였다.
[여자 33세군요. 젊은데?]
‘저번에 입원한 거 보니까……. 입원 10일 전부터 손이 저리고 찬물에 담그면 하얗게 질리는 증상도 있었네.’
[흠……. 손이 저리고 하얗게 질린다라.]
딱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떠오르는 질환명이 하나 있었다.
레이노드 신드롬.
하지만 그건 만성적인 질환이었다.
게다가 안대훈이 그래도 수혁에게 배운 게 1년인데 이것도 못 맞출까?
‘그럼 죽어야지.’
[맞아요. 이건 죽어야 해요.]
바루다도 감히 변호하지 못할 만한 일이었다.
해서 수혁은 제발 아니길 바라며 스크롤을 굴렸다.
‘내원 7일 전부터는 배가 불렀다. 오, 아닌가?’
[입원 당시 한 복부 초음파가 있네요. 잉?]
‘왜 간 경화야? 그 전에 아무 히스토리도 없는데. 이렇게 갑자기?’
[그…… 러니까요? 이상하네.]
간 경화는 간에 생기는 질환 스테이지 중 끝자락에 있는 녀석이었다.
여기서 더 나쁜 게 생기려면 암 정도나 있으려나?
아니, 때에 따라선 둘이 별로 다른 게 없을 수도 있었다.
“전에 검사한 거에 따르면 일단 바이럴 마커가 다 음성이었어요.”
잠시 이상하다 하고 있으려니, 뒤에 선 대훈이 부리나케 부연 설명을 해 왔다.
이에 대해선 입원 기록이 아니라 어디 다른 곳에 적혀 있는 모양이었다.
“바이럴 마커는 다 음성이야?”
“네.”
“흐음…….”
바이럴 마커란 비형 간염, 씨형 간염과 같은 만성 간염을 일으킬 수 있는 바이러스에 이 사람이 걸린 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검사라고 보면 되었다.
그게 다 음성이라면 적어도 간 경화를 일으킨 원인 중 바이러스는 배제해도 좋았다.
“술을 좀 자시나?”
알코올 성 간 경화.
생각보다 우리나라에서는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크진 않은 질환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음주 습관이 건전해서일 리는 없으니, 그저 비형 간염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게다가 남자도 아니라 여자였다.
최근 들어 여성들에게서도 알코올 문제가 슬슬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드물었다.
해서 수혁은 기대감이 거의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계속 아니라고 하다가……. 저희가 매일 물어보니까 매주 맥주 2, 3병씩 마셨다고는 하셨어요.”
“어? 2, 3병? 아, 일주일에.”
하루 맥주 2, 3병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알코올성으로 갔을 텐데.
일주일에 2, 3병이라면야 그냥 사회적 음주자이지 않은가.
해서 수혁은 고개를 주억거리다 이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랩은 어때? 깨지진 않았어?”
“아뇨. 랩은……. 괜찮았습니다. 알부민도 정상이었고, 간 수치도 정상이고. CBC도 다 정상이고요.”
“그래? 이상한 게 전혀 없었어?”
“빌리루빈이 좀 뜨기는 했었어요.”
“얼마.”
“0.7?”
0.5mg/dL이 정상인데 0.7이라.
솔직히 별 의미 없는 수치라고 보면 되었다.
그런데 초음파상 간경화가 저렇게 보여?
이상했다.
“야……. 전에 입원했을 때, CT 안 찍었나. 혹시?”
“아, 찍었습니다.”
“그래? 봐 봐.”
“네.”
해서 CT를 봤더니 웬걸, 간경화 소견이 아주 명확하진 않았다.
있긴 있는데, 적어도 초음파에서 보였던 것처럼 심하진 않다는 얘기.
[뭐여?]
‘모르지, 나도.’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처음 입원 기록에 있던 초음파 사진을 가리켰다.
“이거 뭐야. 우리 병원에서 한 거 아닌가?”
“아……. 네. 로컬에서.”
“아, 해상도가 좀 낮았나?”
“아마 오류가 있었던 거로 보입니다. 다만 복수는 어마어마한 양으로 확인이 됐고. 환자 몸무게도 53kg에서 10kg이나 쪘다고 진술했습니다.”
“급격한 간 기능 이상이 있었던 것은 맞다 이거지? 근데 랩이 깨질 만큼 충분히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고……. 음.”
대훈은 수혁의 말에 습관적으로 ‘네‘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수혁이 이렇게 음이나 뭐니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릴 땐 뭔가 생각에 잠길 때이기 때문이었다.
‘30대 여자. 급격한 간 기능 이상에……. 아까 레이노드 증세도 있고.’
[자가 면역 질환일까요?]
‘자간 면역 간염이나 윌슨병 등이 있겠지.’
[그걸 저번 입원했을 때 배제하지 않았을 거 같진 않은데.]
‘아……. 이거 처음 입원하는 게 아니구나, 참.’
수혁이 워낙에 날아다녀서 그렇지, 태화 의료원에 있는 다른 의사들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무능한 건 아니었다.
3차 의료 기관을 넘어 4차 의료 기관이지 않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만큼이나 대단한 의사들이었다.
“혹시 윌슨이랑 자가 면역 간염은 검사했니?”
해서 수혁은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그 말에 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교수님이 해 보라고 하셨거든요.”
“결과는?”
“음성이었어요. 아무것도 안 나왔습니다.”
“류마티스 검사는 안 했나? 일단 레이노드 증세는 있었잖아.”
“아……. 네, 했는데 다 음성이었습니다.”
호오.
다 꽝이라 이거지?
진단하는 입장에서 이것만큼 힘 빠지게 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아마 대훈도 그랬겠지만 간 파트 교수님도 허탈했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단명마저 붙이지 못했을까?
명색이 태화 의료원 교순데?
[그건 아니겠죠.]
‘그렇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진단명이 아예 없지는 않지 않은가.
“그럼 이디오패식 레이노드 신드롬으로 보고 치료했나?”
해서 그 진단명을 말했더니, 안대훈이 흠칫 놀랐다.
그리고 곧 역시 수혁 선배야라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게 이제 겨우 2년 차 말인데 교수님과 같이 아니, 더 빨리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정말 괴물이라는 말이 실로 어울리는 인간이었다.
“네. 그렇게 보고 증상 조절에 들어갔습니다.”
“엔세이드?”
“네.”
“그리고 입원 4일째에 입원해서 별거 안 했는데 복수가 줄기도 했고……. 환자가 술 얘기까지 했어요. 다른 원인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은 술 끊고 보기로 했습니다. 외래에서.”
“근데 오늘 다시 왔군.”
“네.”
아마 술을 끊었는데도 더 안 좋아진 모양이었다.
어떻게 돼서 왔을라나.
수혁은 일단 더 차트 뒤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가 보자, 환자 어딨지?”
“병실에요. 그…… 좀 심기가 불편해서 그런데. 사납게 대응할 수도 있어요.”
“걱정 마. 내가 뭐 하루 이틀 환자 보냐.”
“죄송해서…….”
“괜찮아, 인마. 일단 보고 치킨이나 먹자. 밥 못 먹었지?”
“아. 감사합니다.”
수혁의 치킨 드립에 제일 격한 반응을 보인 건 수혁의 위장도 대훈도 아닌 바루다였다.
[뭐 이쁘다고 치킨을 삽니까!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두 마리 시킬 거야.’
[어……. 그럼 맛 네 개 골라도 되나? 반반 두 개로.]
‘음……. 그러든지.’
[그럼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환자에게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