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원인이 없어? 배에 물이 차는데? (3)
“으.”
이 자식이 어찌나 최선을 다하는지 수혁은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운동 기능을 유지하는 데 써야 할 뇌의 기능까지 다 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러다 덜컥 심장도 멈추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바루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불수의근까지 조작할 능력은 없습니다. 공부를 안 해서 그런가, 상상력의 방향이 삐뚤어지셨군요.]
‘인마……. 갑자기 몸에 힘 안 들어가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
아마 수혁이 그냥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다면 그렇게까지 겁을 먹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은 의사였다.
그것도 대학 병원에서 근무하는 내과 의사.
심심하면 중증 환자들을 봐야 하는 입장이라는 얘기.
어쩔 수 없이 뭔가 증상이 보이면 제일 심각한 질환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도 바루다를 의심하기 전까지는 풍을 의심했을 지경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혁. 어차피 수혁의 신체에 대해서라면 제가 매일 자가 검진하고 있으니까요.]
‘그 말도 좀 소름 끼치거든?’
누군가 자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매일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고 있다는 게 달갑다면 그게 더 큰일일 터였다.
다행히 수혁은 그 지경까지 망가진 상황은 아니었기에 짜증 섞인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 일단 앉았으면 마우스 스크롤이라도 굴립시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해도 좋으니까, 굴려요.]
바루다는 그런 수혁을 그냥 그대로 두지 않았다.
뭐라도 하라고 계속 채근했는데, 수혁으로서는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찍으라고 한 게 자신 아닌가.
엄밀히 말하면 바루다가 찍으라 했고 자신은 동의한 것에 불과하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그걸 입으로 올린 건 자신이었다.
드르륵.
해서 수혁은 일단 마우스를 굴렸다.
바루다가 말했던 것처럼 머리를 비워 두지는 않았다.
Liver dynamic CT에서 뭐가 보여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굳이 이 야밤에 CT 찍으라고 환자를 내려보낸 보람이 있을 터였다.
‘흐음…….’
[으음…….]
하지만 바루다나 수혁 모두 바로 뭔가를 찾아내진 못했다.
그저 무료한, 조금은 초조한 추임새만 늘어놓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도리어 수혁이었다.
‘아니, 잠깐. 여기…….’
수혁은 마우스로 간 전체를 빙빙 돌렸다.
[뭐요. 간 커져 있다고? 그건 전에 찍은 거에서도 보이잖아요.]
‘아니, 비장이랑 같이 커져 있는 거야 전에도 있었지.’
일명 ‘hepatosplenomegaly’라고 하는 소견은 전부터 있었던 것이었다.
해서 바루다는 심드렁했는데, 수혁은 그걸 말한 게 아니라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바루다가 여전히 뇌 기능을 많이 가져간 상황인 것을 감안하면 꽤 거친 반항이었다.
“또, 또 저런다.”
“쉿. 너무 대놓고 보지 마. 난 좀 무섭더라.”
“착한 거 같은데……. 저거 폭발 사고 난 다음부터 저러는 거라며.”
“똑똑하기도 하고, 원장님 아들이라지만 저래서 어디…….”
남들이 볼 때는 그냥 정신 나가 보이는 도리질에 불과했지만.
바루다에게는 꽤나 의미 있는 반항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말해 봐요, 그럼.]
‘자, 보라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게 동맥 페이즈잖아. 응? 동맥기.’
[알죠.]
‘간이 전반적으로 불균일(heterogeneous)한 침윤(infiltration)을 보이고 있잖아. 이거 아밀로이도시스(Amyloidosis)에서 이렇게 보이지 않나?’
[흐음. 아밀로이도시스라? 재밌는 의견인데.]
바루다가 보기에도 불균이란 침윤은 꽤 명확하게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질환 중 아밀로이도시스가 대표적인 질환이기도 했다.
단백질의 형성 과정에서 형태에 이상이 생겨 장기나 조직에 섬유질이 형성되는 질환이지 않은가.
침범하는 장기 중 대표적인 것이 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루다의 흥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기엔 비장은 또 깨끗한데요? 신장도 깨끗하고.]
‘음……. 초기…… 라고 하면 어떨까?’
[아밀로이드 초기인데 간 경화가 온다? 이거 새로운 이론이네.]
‘비, 빈정거리지는 말고. 아닌 거 같으면 아닌 거 같다고 해.’
[상처받을까 봐 배려한 건데요. 틀린 사람한테 너 틀렸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아니다. 됐다.’
분명 의료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이라고 들었는데.
대체 왜 말싸움을 잘하는 걸까.
나중에 기회 되면 태화 전자 개발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멱살을 잡고.
[일단 내리죠? 다음 페이즈도 막 넘어오고 있는데?]
‘알았어. 으음……. 아씨 대체 뭐지.’
아밀로이도시스를 생각해 낼 정도면 그래도 제법 고민한 건데.
딱 말하자마자 결과를 부정하는 소견이 보이니 맥이 빠졌다.
가슴 한켠에서는 정말 원인이 없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번질 지경이었다.
바루다가 맨날 경계하는 말이기도 했다.
[또 이러네, 이 양반. 이봐요. 쩍 하면 원인 없는 간 경화니 뭐니 이러기 시작하면 내과 의사를 할 이유가 없다니까?]
‘아니, 아주 잠깐 든 생각이야. 아주 잠깐.’
[그런 생각 할 시간에 영상을 보라고. 왜 포기를 하려고 해. 어릴 때 뭐 아주 큰 좌절이라도 겪으셨나? 아닌데? 이 몸이 데이터 검토해 봤을 때 그런 거 없었는데?]
‘인마……. 네가 내 몸에만 들어와 봐서 그렇지. 고아라는 거 자체가 큰 고난이야.’
[그건…… 어.]
‘곤란해지니까 딴청 피우는 것 좀 봐. 깡통 주제에 아주 나쁜 버릇…….’
[아니, 조용히 하라고요. 그리고 방금 전으로 돌려 봐요.]
바루다는 아주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봐야 수혁 정도나 분간할 수 있는 표정 변화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뭔데.’
[자, 여기서부터 다시 스크롤 굴려 봐요.]
‘이렇게?’
[네. 잘 보라고요.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바루다는 수혁처럼 마우스를 빙빙 돌릴 수 있는 재주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대신 비문증 비스무리하게 수혁의 시야에 뭔가를 빙빙 돌릴 수 있었다.
처음 이걸 봤을 땐 망막이 떨어져 나가는 중인 줄 알고 어찌나 놀랐던지.
하지만 지금은 그냥 레이저 포인터인데 몸에 내장된 재질 정도라고 덤덤히 넘어갈 수 있게 된 지 오래였다.
‘흐음…….’
수혁은 바루다가 가리킨 곳, 즉 중간 정맥과 우간 정맥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동맥 페이즈였으니 당연히 이쪽이 조영 증강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 정맥은 무려 지연 페이즈에 이르기까지도 조영 증강이 되지 않았다.
이른바 opacification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게 시사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피가…… 피가 안 통하네? 이쪽으로?’
그 말은 곧 정맥이 틀어막혔단 뜻이기도 했다.
피가 안 통하게 되었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순환 혈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어디 다시 봐 보자.’
[네. 보시죠.]
수혁은 여유를 되찾은 바루다가 뇌 기능을 대부분 돌려주는 것을 느껴가며 스크롤을 돌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게 일반 CT가 아니다 보니 장수가 꽤 많았는데, 그럼에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미 커다란 문제는 찾은 후였고, 덕분에 순환 혈관의 유무만 보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은 전혀 순환 혈관을 찾을 수 없었다.
‘없어. 이 사람 간은 혈액 순환이 안 돼, 지금.’
[왜 막힌 것 같습니까?]
바루다는 수혁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조금 뜬금없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건 우수한 내과 의사가 아니기 때문일 터였다.
다행히 바루다의 기준에서도 썩 괜찮은 내과 의사에 들어가는 수혁은 대번에 그 의중을 눈치챘다.
‘주변에 종양이 있지도 않고, 고름집이 있지도 않아. 뭐……. 암에 의해서 혈관에 침범이 생긴 것도 아니고. 이차적인 이유는 배제해야겠지.’
[그럼?]
‘간 정맥에 발생한 혈전에 의한 일차적 버드 키아리 신드롬(Primary Budd chiari syndrome)이겠지.’
[오…… 많이 늘었군요, 수혁. Liver dynamic CT를 볼 수 있을뿐더러 버드 키아리 신드롬까지 떠올릴 줄 알고. 이 바루다,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던지……. 오늘은 정말 네 가지 맛 치킨 정도는 먹어 줘야겠습니다.]
‘그……. 치킨은 사 줄 테니까. 일단 환자부터 좀 볼래?’
[더 볼 게 있나요? 이미 진단했는데.]
모든 질환이 그런 건 아니었다.
세상엔 난치병도 있고 심지어 불치병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일단 진단만 되면 치료가 가능한 질환이 대부분인 것도 사실이었다.
다행히 버드 키아리 신드롬은 후자에 속하는 병이었다.
그러니 바루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수혁은 고개를 다시 한번 저었다.
‘아니. 우린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아니잖아. 컨펌은 받아야지.’
[아…….]
김진실 교수에게 한번 묻자는 뜻이었다.
어떻게 들으면 되게 순수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수혁과 벌써 꽤 오랜 세월 지내 온 바 있는 바루다는 진짜 의중을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양반. 지가 이거 진단한 거 동네방네 소문낼 생각이죠?]
‘그…… 어? 아니?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생긴 건 순진하게 생겨 가지고서는 속이 이렇게 시커멓고.]
‘이, 인마……. 속이 시커멓다니.’
[칭찬입니다, 칭찬. 사람이 이 정도 꿈은 있어야죠. 다른 것도 아닌 이 바루다를 품었는데요. 오히려 너무 순진하면 제가 싫어요.]
‘음…….’
이 자식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게 과연 기분이 좋아야 하는 일일까?
뭐 이런 의문이 아주 잠시 들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치킨 먹을 생각에 들뜬 건지, 아니면 수혁의 야망에 들뜬 건지 모르겠는 바루다가 쉴 새 없이 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일단 연락하시죠. 아, 그런데 김진실 교수님 오늘 당직입니까?]
‘당직이야. 아까 처방 내면서 확인했지.’
[역시 속이 시커먼…….]
‘닥쳐…….’
아무튼, 수혁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처음엔 개인 핸드폰으로 걸까 하다가, 이건 좀 선 넘는 느낌이 들어서 병동 전화기를 이용했다.
제아무리 같이 연구도 하는 사이에 친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김진실 교수는 꽤 무서운 사람이란 소문이 돌았다.
수혁에게야 친절했지만.
원래 잘해 줄 때 잘하란 말도 있지 않던가.
“네, 영상의학과 김진실입니다.”
그러길 잘했다고 만들어 주는 목소리였다.
뭐 아주 언짢은 일이 있었는지 낮게 내리깔려 있었는데 모르는 사이였다면 지금 끊었을 가능성이 컸을 터였다.
“어……. 네, 교수님. 저 내과 이수혁입니다. 통화 괜찮으신지요.”
“아……. 수혁이. 뭐, 네. 괜찮아요. 아니, 너 괜찮다는 게 아니라! 넌 서 있어! 아, 미안해요. 하하. 여기 뭐 좀 일이 있어서. 별일은 아니고.”
아무리 봐도 별일이 아닌 거 같진 않았지만.
이왕 건 김에 수혁은 빠르게 노티를 진행했다.
“Liver dynamic CT상 버드 키아리 신드롬이 의심되는 환자가 있습니다. 환자 번호는 2020052…….”
“응? 버드키아리? 다이나믹?”
“네.”
“다시 불러 봐요. 바로 볼게요.”
두 단어 다 내과 레지던트 입에서 나오기에는 좀 생소한 단어 아닌가.
김 교수는 내가 이거 영상의학과 3, 4년 차한테 노티를 받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컴퓨터를 두드렸다.
그리곤 허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미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