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혈종 (1)
환자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는 병실 쪽을 가리켰다.
“안에 제 폰 있는데, 혹시 가져와 주실 수 있나요?”
“네.”
대훈은 그런 환자의 부탁에 즉각 응했다.
뭔가 막 답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 아니던가.
역시나 수혁에게 부탁하길 잘했단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지금이라면 뭐든 해 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진짜 대단하다니까……!’
심지어 담당 교수님도 머리를 긁적이던 환자였거늘.
저번 입원 때 이 환자 두고 토의했던 시간만 하더라도 어마어했다.
소화기내과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케이스 집담회에도 내었는데, 그때도 우선 차근차근 워크 업 하면서 원인을 보자는 게 결론이었다.
그런데 그걸 거의 보자마자 해결해?
제아무리 저번 입원 때 있었던 시행착오를 알고 있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숫제 괴물이라고 해도 좋았다.
“여깄습니다.”
덕분에 대훈은 가슴 한켠에 놓인 돌덩이 같던 부담을 확 덜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거의 나는 듯이 폰을 가지고 왔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환자는 머리도 얼마 없는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폰을 받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 대머리가 뭔 짓을 하고 있든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나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드니 여유가 생긴 탓이었다.
“음…….”
아무튼, 환자는 폰을 받아 들자마자 달력을 켰다.
그러고도 좀 헷갈리는지 카카오톡 대화창도 켰다.
그렇게 한 5분에서 10분 정도를 들여다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한 한 달 됐어요.”
“한 달이라.”
수혁은 한 달이라는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환자 증세가 생긴 것이 이제 2주가량 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한 달 전부터 소인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 꽤 타당했다.
하지만 경구 피임제라는 약이 좀 마음에 걸렸다.
[워낙에 흔하게 쓰이는 약 아닙니까?]
‘그렇다고 하더라.’
물론 수혁에게는 낯설기만 한 약이었다.
소꿉장난 비슷했던 연애 말고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의학적으로는 제법 친숙했다.
이제 의사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만큼 많이 쓰는 약이 된 지 오래였다.
“이번이…… 처음인가요?”
“아……. 네. 그……. 네.”
해서 물어봤더니 처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맞나 본데요? 이게?]
‘그런가 보다. 흐음……. 그럼 또 뭐 검사를 해 보긴 해야겠네.’
경구 피임제가 지금처럼 널리 쓰이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점점 더 안전해져 왔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즉 버드 키아리 신드롬 같은 걸 어지간해서는 일으키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전적인 문제와 함께 경구 피임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야만 했다.
절대로 일반적인 부작용은 아니었다.
“그럼 경구 피임제가 원인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우선 중단하시는 게 좋겠어요.”
“아……. 아, 네. 그게…… 원래 이럴 수 있나요?”
“아주 드물게 그럴 수 있습니다. 유전적인 소인이 있으면 가능한데요……. 걱정 마세요. 다른 이상과 연관되는 건 아니에요. 유전 질환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아……. 이게, 이게 원인이구나.”
환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언가를 톡으로 보냈다.
아마도 남친에게 보낸 것 같았다.
[음, 방금 씁쓸한 감정을 느꼈는데 맞나요?]
‘뭐, 뭐 인마.’
[구체적으로 풀자면 다들 연애하는데 나만 못하네, 뭐 이런 거 아닙니까? 가만있자, 이거 수혁 데이터에서 본 적이 있는데?]
‘내 데이터로 나 놀리지 마.’
수혁의 명령은 단호하고도 명확했다.
하지만 바루다는 귓등으로도 듣는 척을 하지 않았다.
녀석에게 수혁은 유일한 입출력자로서 물론 아주 소중한 존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복종의 대상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거네.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다정한데, 외로울사 이 내 몸은 누구와 함께 돌아갈꼬. 황조가.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지은 시조. 지금 수혁의 감정과 무척 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
수혁은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어이가 없었다.
깡통 주제에 남의 마음을 이토록 정확하게 읽어 낼 줄이야.
‘나도 연애하고 싶다.’
[음……. 그 의견은 기각합니다.]
‘왜!’
[이제 겨우 레지던트 3년 차 올라가는 마당에 연애라뇨.]
‘결혼한 동기도 있거든?’
[그 동기랑 수혁의 목표가 같습니까? 수혁은 이 바루다를 얻은 몸입니다. 세계 최고의 의사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
또 맞는 말이었다.
기껏 바루다까지 얻은 마당에 어영부영 지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저, 선생님.”
해서 마음을 다잡고 있으려니 대훈이 수혁을 불렀다.
그제야 수혁은 자신이 또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어, 왜.”
“그럼 와파린, 이뇨제 달고. 경구 피임제 끊으면서 경과 관찰하도록 할까요?”
“아……. 응. 그렇게 하자. 랩 팔로우 업 하고. 초음파도 좀 보고. 딴 건 필요 없고, 간 크기 줄어드는지만 보면 돼.”
“네, 선생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훈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처방을 내리러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수혁은 잠시 대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환자를 바라보았다.
환자는 이제 몸만 멀쩡했으면 오체투지라도 할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서 라포 쌓는 최고의 방법은 정확한 진단과 치료라더니.
역시 옛말에 틀린 말이 없었다.
“환자분, 우선 처방했으니까 지켜보도록 할게요. 좋아질 겁니다, 이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아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수혁은 이럴 때 겸양의 말 한 스푼 정도 해 주는 게 보탬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괜히 내가 잘했네 어쩌네 하면 격만 떨어질 뿐이었다.
어떻게 아느냐 하면.
[그러게 그때 입 다물라니까.]
몇 번 해 봐서였다.
심지어 한 번은 VOC에도 올라왔다.
이수혁 선생님은 다 좋은데 입이 방정이라는 귀여운 내용이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VOC에 이름이 올라오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어유……. 해야 할 일이라뇨. 제가 진짜 너무 감사해서.”
“하하. 일단 진단이 된 거지, 나은 건 아니니까요. 푹 쉬세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환자는 그 후로도 한 열 번인가 감사 인사를 건네왔다.
수혁은 그저 껄껄 웃다가 당직 방으로 돌아오면 되었다.
덜컥.
안에는 언제나처럼 아무도 없었다.
분명 4인 1실인데도 그랬다.
처음엔 그저 애들이 자길 불편해해서 그러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니네 수혁이 방해하면 안 된다. 걔는 우리 병원의…… 아니지. 인류의 보물이야. 나보다…… 최소 나만큼 똑똑한 놈이거든. 눈치 있으면 딴 데서 자라. 알았냐?’
이현종의 으름장이 있었더랬다.
그렇지 않아도 원장 아들 아닌 연놈들은 서러워서 살겠냐는 말이 나도는 마당에 이루어진 조치라 부적절한 언사였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긴 했지만.
어디, 이현종이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었던가.
‘형, 아무리 그래도 당직 방 하나를 애한테 그냥 줘?’
‘그럼 네 방 줄래? 너보다 수혁이가 더 쓸모 있어.’
‘와……. 방금 그 말은 좀 상처 되는데.’
‘그러게 왜 나서, 나서기를.’
심지어 과장 된 명목으로 나선 신현태마저 말로 짓밟아 버린 바 있었다.
‘덕분에 편하긴 한데.’
[왕따 된 거 같다고요? 오늘 봤잖아요? 아니라니까. 의국장이면 요즘 말로……. 인싸 아닙니까?]
‘힘으로 인싸 되긴 싫은데.’
[배부른 소리 하지 마시고. 환자 리뷰나 하시죠. 내일 조태진 교수님 외래 백 아닙니까.]
‘그렇지. 아니, 뭐 이 시기까지 백이냐 근데.’
[혈종이잖아요. 사고 나면 환자 죽어요. 환자 죽는 꼴 보고 싶어서 이러나.]
‘그…….’
수혁은 내가 살다 살다 깡통에게 인격적으로 공격을 받을 줄이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차트를 띄웠다.
내일 조태진 교수 외래에 예약된 환자 명단이 주르륵 떴다.
스크롤을 굴려야 할 만큼 명단이 길었다.
지나치단 생각이 들 수도 있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곳이 태화 의료원인 것을.
이제는 절대 왕좌를 내어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국내 최고라는 말을 여전히 쓸 수 있는 곳이었다.
환자들은 어떻게든 이곳에서 치료받기 원했고 덕분에 외래는 날마다 인산인해였다.
‘특이한 환자가 있나.’
[글쎄요. 조태진 교수도 워낙에 꼼꼼한 양반이라. 체크하긴 했을 텐데. 한번 보세요.]
‘음…….’
조태진은 백도 뭣도 없이 그냥 실력으로 교수가 된 타입이었다.
말 그대로 우직하고 꼼꼼한 사람인 데다가 성실하기까지 해서 거의 매일 새로운 항암제 프로토콜을 익히고 있었다.
덕분에 환자 상태는 어지간하면 좋았다.
사실 1년 차만 외래 들어가고 어쩌고 해도 별문제가 없을 지경이었다.
여태까지도 그랬다.
그냥 조태진 교수가 환자를 어떻게 보고, 플랜을 어떻게 짜는지를 보러 들어가는 것이지, 1년 차 백을 봐주러 들어간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이거 봐, 이거. 벌써 다 코멘트 남겨 놨네.’
[그러니까요. 어떨 때 보면 징그럽다니까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어쩜 이래.]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조태진 교수는 퇴근 전에 이미 내일 볼 환자 차트 리뷰를 마쳐 둔 상황이었다.
혹시 후달리는 1년 차가 한 거 아냐? 하는 의심을 할 수도 있겠지만.
차트한 것만 봐도 1년 차와 교수는 다른 법이었다.
어지간한 환자들은 이미 얼굴을 보지 않고도 플랜이 서 있을 지경이었다.
‘음.’
[왜요.]
‘이 환자…….’
해서 휙휙 넘기던 수혁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상한 기분이라니.
깡통인 바루다에게는 근거로써의 가치가 없는 얘기였다.
[말해 보시죠.]
하지만 바루다는 그간에 쌓인 경험, 즉 축적한 데이터를 통해 배운 바 있었다.
수혁이 소위 촉이라 부르는 이 감각이 때론 자신의 근거 중심 의학을 보조하기도 한다는 것을.
해서 바루다는 아주 진중한 얼굴로 수혁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수혁은 바루다의 기대와는 달리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저 한 환자의 차트를 열고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뭔데요.]
[뭔데.]
[야.]
[귓구녁이 막혔…… 아니지, 난 중추신경에 대고 말하는 건데.]
[헐, 설마 측두엽이 나갔나.]
[시발놈아.]
[진짠가?]
견디다 못한 바루다가 패드립을 칠 때까지였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수혁은 집중하고 있었다.
차트만 보면 별거 아닌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 환자 그냥 간 전이된 환자잖아요. 대장암이었다가. 딱 그렇게 써 있구만, 뭘…….]
‘잠깐 있어 봐.’
[이제야 입 여네? 난 뭐 풍이라도 왔나 해서 계속 점검했네.]
‘그런 게 아니야. 이상하잖아. 대장암 걸리고 완치 판정받은 지가 벌써 7년째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원발 병변도 아니고 간에 전이가 생겨?’
[간암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하기엔 소견이 좀 다른데. 전이 소견이잖아요. 영상의학과 판독도 그렇게 박혀 있구만, 뭐.]
‘간이 판독이잖아. 이거 코 사인이 안 되어 있어. 아직…… 응. 이혜영? 레지던트 사인만 들어가 있어. 얘 대충 본다고 소문난 애야.’
[그렇게 말하니까 좀 의심스럽긴 한데. 그래도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