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혈종 (2)
이혜영이라면 바루다의 데이터에도 기록이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좋은 쪽은 당연히 아니고, 나쁜 쪽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다.
[말리그라니까 이게 또 확 의심이 가네.]
‘그렇지? 그러니까 좀 보라고.’
[근데 근거는 없죠, 막상?]
‘응. 그게 문제야.’
[아니…… 뭔 짓이야, 이게. 치킨이나 먹지].
‘대훈이한테 시키라고 했잖아. 여기로 와서 같이 먹을 거야. 오래 안 걸리니까, 함 보라고.’
[음……. 알겠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바루다는 영 내키는 기색은 아니었다.
세상에 의심하는 근거가 사진이 아니라, 판독한 의사의 평판이라니.
미친 거 아닌가.
하지만 그런 판단을 내리면서도 바루다는 일단 사진에 집중했다.
얼마 있지 않아 먹게 될 치킨을 떠올리면서였다.
양념만 먹여 줘도 충분히 행복할 텐데.
간장에 마늘에 프라이드까지?
[미쳤다.]
‘응? 뭐가 미쳐.’
[아니, 아닙니다. 음.]
‘회로가 삭았나. 요새 좀 이상해, 너?
[어떻게 그런 말을…… 이거 진짜 상처 되는 말인 거 알고 있죠?]
‘울상 지을 정도냐?’
[누가 치매 걸렸다고 하면 좋아요?]
‘아.’
수혁은 그제야 두 말이 바루다에게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걸 깨달았다.
해서 한마디 사과를 한 후, CT 영상을 천천히 굴렸다.
그러다 멈춘 곳은 당연히 판독에 전이 또는 간암(Hepatocellular carcinoma, HCC)라고 쓰여 있던 부분이었다.
확실히 모양만 봐서는 그렇게 보이긴 했다.
[일단 경계(Margin)가 너무 좋아요. 게다가 동맥 페이즈에서 확 조영 증강이 되고요.]
Liver dynamic CT까지 찍은 마당이었다.
암을 의심했으니 당연한 얘기긴 한데.
아무튼, 바루다의 말대로 HCC, 즉 간암을 의심할 수 있는 특징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수혁도 전혀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나도 알아. 그렇게 보여, 확실히. 그래도 모르니까, MRI 보자.’
[음.]
해서 수혁은 MRI를 켰다.
여기서도 간암에 준하는 소견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T1 역상(In-opposed phase)에서 그랬다.
[까맣네요.]
여기서 까맣게 보이는 건 지방 조직이라는 뜻이었다.
간암에도 지방 조직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보일 수 있었다.
즉 MRI 소견 또한 간암을 시사한다는 뜻이 되었다.
바루다는 이제 슬슬 이 헛짓거리를 끝내기 원했다.
[동맥 페이즈에서 조영 증강을 보이고, 간문맥 및 지연 페이즈에서는 증강을 보이지 않아요. 워시 아웃(Wash out) 된다, 이 말이죠. 이거 간암 특징이죠?]
‘동의해. 100%.’
[MRI에서도 다른 소견 다 비슷하고, 지방 조직도 보여요. 이것도 간암 특징이에요.]
‘맞아, 그것도.’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판독 노트가 남겨진 시간을 보았다.
MRI는 아직 판독이 남겨져 있지 않았다.
조태진 교수 외래가 내일 오후이니, 아마 그즈음 판독이 내려올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영상의학과에서 어떤 의견이라도 남겨 준 것은 CT뿐이었고, 그 시각은 오늘 밤이었다.
불과 5분 전에 남겨졌다, 이 말이었다.
그렇게 딴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바루다가 따져 물었다.
치킨 맛이 어떨까 상상하기도 모자랄 시간에 쓸데없는 케이스로 시간을 뺏기고 있어서 그런가 목소리가 좀 날카로워져 있었다.
[근데 뭐 때문에 이래요? 본인도 간암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만.]
하지만 수혁은 그런 바루다의 반응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도리어 태연하기만 했다.
영상을 보면서, 또 바루다의 판독을 들으면서 아예 다른 진단명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위치.’
[위치……?]
간에 있는데 위치가 마음에 걸린다는 게 뭔 개소리야?
남한테는 회로가 삭았니 어쨌니 하더니 설마 뇌세포가 망가져 버렸나 하는 걱정까지 일었다.
하지만 수혁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 난 후에는 판단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위치를 잘 봐. 부신이랑 딱 붙어 있잖아. 아드레노헤파틱 정션(Adrenohepatic junction)이라고. 이상하지 않냐? 하필 여기라는 게?’
[어…….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네요.]
딱 덩이 소견만 놓고 보면 누가 보더라도 간암을 줄 수밖에 없는 모양새였다.
CT며 MRI며 다 간암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수혁의 말대로 위치를 고려하면 다른 진단명 하나가 더 떠올라야 정상이었다.
[설마 간 내부 신피질선종(Intrahepatic adrenocortical adenoma, IAA)인가?]
‘응, 나는 그거 아닐까 싶은데? 잘 봐. 환자 비형 간염도 아니고, 씨형 간염도 아냐. 간암 리스크가 없다고.’
[허……. 그렇네. 오, 그렇네, 진짜.]
간 내부 신피질선종은 부신과 간이 접한 곳에서 발생하는 부신 기원의 선종을 말했다.
간암이 보이는 소견과 아주 흡사한 소견을 보였는데, 일단 Liver dynamic CT에서 동맥 페이즈 조영 증강 및 간문맥, 지연 페이즈에서 워시 아웃을 보였다.
게다가 부신은 원래 지방 조직이 있는 곳이라 MRI T1 역상에서는 까맣게 보였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의사에게 혼동을 준 그런 질환이었다.
심지어 베테랑 영상의학과 의사들조차 헷갈려 했다.
위치 빼고는 간암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질환명부터 떠올리지 않는 한에는 의심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특징이 같죠.]
‘치료는 완전히 달라지지.’
[그렇죠. 이건 양성이니까.]
굳이 치료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냥 더 커지지 않는지 경과 관찰하는 게 다일 때도 많았다.
즉 환자나 의사에게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의견을 어떻게 남기죠? 경과 관찰?]
‘이것만 보이면 그렇게 하겠는데…….’
[잉. 또 뭐가 보여요?]
이미 수혁에게 기세가 꺾인 바루다는 눈에 띄게 긴장했다.
설마하니 이 영상에서 수혁이 자신은 못 본 무언가를 봤나 해서였다.
다른 부분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예컨대 실제 환자를 두고 사용하는 시각이나, 청각, 촉각, 후각 등.
원래 수혁에게만 있던 것을 바루다가 빌려 쓰고 있는 감각을 이용한 진단은 미숙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영상 판독은 달랐다.
이 분야는 심지어 바루다보다 훨씬 열등한 AI들조차 성과를 보이고 있는 분야였다.
‘응? 보이긴 뭐가 보여. 이게 다지.’
[시발놈이?]
‘야, 욕했냐? 깡통이 사람한테 욕해? 반란이야?’
[아니, 놀랬다고요. 뭔 소리였어, 그럼.]
‘이 환자 대장암 환자였잖아. 완치된 지 7년 됐다고 해도…….’
[아.]
의학에 있어서 절대 쓰지 말아야 하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절대’였다.
보통 암 치료 후 재발의 징후가 보이지 않고 5년이 지나면 완치라고 판정을 하긴 하지만.
운이 나쁜 환자에서는 10년 뒤에도 재발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비록 이 환자에서 보이는 간의 덩이는 전이에서 보이는 소견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괜찮으니까 경과 관찰하자고 할 수는 없다, 이 말이었다.
‘조직 검사 정도는 해 봐야지.’
[또 김진실 교수한테 전화 겁니까?]
‘어레인지 하려면 그래야지, 뭐. 아니면 그냥 협진 의뢰만 넣을까? 사실 좀 민망하긴 한데.’
[그러죠. 하루에 두 번 이상은 그렇잖아요. 그쪽은 교수고, 또 바쁠 텐데.]
‘하긴 그건 그렇다.’
바루다의 말이 맞는 거 같았다.
해서 수혁은 협진 의뢰만 넣기로 했다.
어차피 태화 의료원 영상의학과 복부 파트는 그 명성에 걸맞게 맨파워가 있는 조직인 데다가, 또 이하언 분과장 때문에라도 임상과 협조를 아주 잘 하는 편이지 않은가.
아마 내일 외래에서 보내면 거의 당일에 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선생님!”
때마침 안대훈이 문을 두드렸다.
벌써 한참 전부터 치킨 냄새가 난다 싶더니만.
두 마리를 들고 온 모양이었다.
[음?]
‘왜?’
그런데 문을 열기 전 바루다가 아주 언짢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잖아도 방금 아주 중요한 토의를 한 참 아니던가.
수혁은 혹시 무슨 오류라도 발견했나 싶어 행동을 멈추고 물었다.
밖에 대훈이 잠시 더 서 있어야 하겠지만.
그게 뭐 대수겠나.
이쪽 일이 훨씬 중요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한 명이 더 왔군요.]
‘응……?’
[발걸음 소리가 뒤섞였잖아요. 크룩스 신은 거 같고, 무게는 가볍고. 또 빈대 붙으러 왔나, 우하윤.]
‘아니……. 내과 지망하는 인턴이 치킨 얻어먹으러 온 게 그렇게 열 낼 일이니?’
[수혁, 안타깝지만. 이미 수혁은 우하윤 친구 존에 들어갔어요. 아무리 치킨 사 줘도 연인 관계는 안 된다고요.]
‘내가 언제 그걸 바랐냐!’
[지금도.]
‘흠.’
뼈 때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맨날 맞는 뼈라 그런가 그렇게 타격이 있진 않았다.
다리를 절게 된 후에도 딱히 그 사실로 좌절한 적이 없지 않은가.
원체 긍정적인 놈이다, 이 말이었다.
‘뭐, 아무튼 먹으라고 할게.’
[어휴, 호구.]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 뭐.’
[설마 이현종 원장 카드예요?]
‘응.’
[남의 돈으로 생색내네?]
‘그래서 먹지 말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먹읍시다. 먹어요.]
바루다도 수혁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가 예측을 밝은 쪽으로 돌리게 된 지 오래였다.
해서 수혁은 사소한 방해를 지르밟고는 문을 열 수 있었다.
“아, 선생님. 안 계신 줄 알고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한참을 세워 뒀음에도 불구하고 대훈은 그저 웃었다.
매번 도움을 받는 관계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죽다 살았는지 몰랐다.
“선배, 저도 왔어요.”
하윤도 생글생글 웃으며 들어왔다.
불룩 튀어나온 가운 주머니는 거의 해져 있다시피 했다.
바쁘게 돌아다니다 이제 겨우 저녁 먹을 시간이 난 모양이었다.
다른 곳 돌다 온 것도 아니고, 내과라고 들은 바 있지 않은가.
여기서 넌 안 사 줄 건데? 이러는 건 사람 된 도리가 아니었다.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바루다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수혁이었다.
“들어와, 들어와. 사실 둘이 두 마리 먹기 부담이었거든.”
“감사합니다.”
“매번 얻어먹기만 하고.”
“선배가 사는 게 당연하지. 대신 너네가 이런 거 가져오잖냐.”
수혁은 종이컵 대신 준비된 소변 담는 컵을 받으며 웃었다.
더럽게 어떻게 거기다 먹나 싶겠지만.
병동 간호사들이나 레지던트 사이에서는 이게 국룰이었다.
오히려 소변이 흐르면 안 되니만큼 단단해서 더 좋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일회용이 아니라 그냥 계속 쓰는 놈도 있을 지경이었다.
“오, 콜라는 코카콜라네?”
“네, 선생님 펩시 싫어하시잖아요. 지하에서 따로 샀죠.”
사실 코카콜라와 펩시를 구분 짓는 건 수혁이 아니라 바루다였지만.
뭐가 됐건 입에 넣는 건 수혁이지 않은가.
게다가 펩시 마시면 바루다가 진짜 말 그대로 지랄할 때도 많았다.
위잉위잉이라던지, 아니면 CPR 방송 소리라던지 뭐 그런 골 때리는 소리를 낸다 이 말이었다.
“잘했어. 먹자.”
“네, 선생님.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시각은 9시를 넘겨 가고 있었다.
심지어 야식도 아니고 그냥 저녁이지 않은가.
한동안 당직실에는 치킨 뜯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먹느라 바쁜 당직실이 비단 여기뿐만은 아니었다.
영상의학과 레지던트 당직실도 그러했다.
“아…… 뭐야, 뭔 이 시간에 협진이 들어와.”
이혜영은 족발을 우물거리다 아까 수혁이 날린 협진을 확인했다.
가뜩이나 한바탕 깨져서 빡치는데, 협진이라니.
“뭐, 야밤에 와서 간 하라고?”
물론 간 조직 검사는 고난도 시술이었다.
하다가 환자가 죽을 수도 있었다.
이혜영 일은 아니란 뜻.
그래도 보조는 들어가야 했다.
방금 김진실 교수가 모든 초음파를 들어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쩐지 이런 시술도 포함될 거 같았다.
초음파 대고 하는 시술이니까.
‘에이……. 내일은 못 한다고 하자,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