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82화 (182/1,303)

182화 혈종 (3)

병원은 안에 있는 모든 인원이 톱니바퀴처럼 최선을 다해 일해야 간신히 돌아가는 곳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선생님, 4호 환자분 퇴원할 때 소견서랑 진단서 원하신대요.”

“어디 제출하시는데요?”

“보험 회사라고 들었어요.”

“네. 알겠어요.”

수혁이 비록 처방을 완벽하게 내는 편이라 사후에 들어가는 일이 거의 없긴 했지만.

당일 추가되는 일들까지 예측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히 입·퇴원이 많은 과일수록 더더욱 그러했다.

왜 암 환자를 보는 혈액종양내과에서 입·퇴원이 많나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만성 질환자라고 해서 계속 병원에 입원해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항암제 프로토콜 때문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것을 반복하는 환자들도 엄청 많았다.

[이런 서류 작업은 지루하군요.]

‘뭐 어쩌겠어. 다 필요한 일인데.’

[주치의만 벗어나도 안 하게 되는 거죠?]

‘응, 근데 요새는 3년 차도 가끔 주치의를 보니까…… 결국, 전문의를 따야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거지.’

[추세 보니까 딱히 그런 거 같지도 않던데.]

‘음.’

수혁은 바루다의 말이 뭘 보고 나온 것인지 대번에 알아먹었다.

아마 얼마 전 의국 회의에서 나온 얘기를 토대로 하는 말일 터였다.

[이제 응급실 당직도 전문의가 선다는데요?]

‘주 88시간 근무 때문에 그런다잖아.’

[수혁은 88시간 아니라 120시간도 넘게 일하는데?]

‘법이 내후년부터 적용된다는데 그럼 어쩌냐.’

[흐음……. 법이라.]

바루다는 이제 제법 의학적인 내용 말고도 다른 사회 현상에 대해 통달해 가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법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낯설어하는 편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런 것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수혁은 법을 바루다에게 알려 주기 위해 머리 빠지게 공부해야 했을 게 뻔했다.

“다 됐어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다 된 거죠?”

“어…… 네. 근데 환자분들 딱 퇴원 임박해서 알려 주시는 분들도 있어서요. 혹시 생기면 전화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수혁은 후다닥 서류 작업을 끝낸 후, 몸을 일으켰다.

타닥.

지팡이를 짚으면서였다.

“아, 선생님.”

그런 수혁을 누군가 부축해 주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도움을 받으면 화를 내기도 한다던데.

수혁은 그런 법이 없었다.

늘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는 편이었다.

“응? 대훈이?”

“네. 선생님. 이거 드세요. 커피.”

“아, 어. 고마워.

수혁은 스테이션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로 방금 대훈이 건네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이거지.]

수혁도 제법 커피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진짜 환장하는 놈은 바루다였다.

[캬아.]

어떻게 된 놈이 매번 먹을 때마다 이런 추임새를 넣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핀잔을 주면 안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고만해, 인마. 술 먹냐?’

[술? 술 같은 쓰레기하고 커피를 비교합니까? 커피는 모자란 수혁의 뇌 기능을 일시적이나마 향상시켜 주는 기능이 있는 신의 음료입니다. 저로 하여금…… 제 요람에 있던 때의 기분을 아주 잠시나마 느낄 수 있게 해 준다고요.]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는데, 커피만 마시면 내 뇌가 슈퍼컴퓨터랑 비슷하다 이거야?’

[지랄 마십시오, 수혁.]

지랄이라.

이 자식 지금 지랄이라고 했지?

수혁은 따지고 보면 머리에 빌붙어서 사는 기생충 주제에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는 바루다에게 응징하고 싶었다.

“어어, 선생님. 이거 너무 찬 거 드셨나? 머리 아프세요?”

해서 바루다가 있는 부위를 후려쳤으나 아픈 건 손과 머리뿐이었다.

[뭐 해요?]

‘열 받게 하니까 그렇지.’

[저만 하겠습니까. 슈퍼컴퓨터하고 수혁의 뇌를 비교하고 앉았는데.]

‘하…….’

[아무튼, 커피나 계속 마시세요. 빨리. 애타게 하지 말고요.]

‘망할 놈.’

하여간 바루다와 말 섞는 건 오래 할수록 손해였다.

해서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방금 커피를 건네준 대훈을 돌아보았다.

“아, 어제 그 환자 상태 약간 좋아졌더라. 복수도 줄고.”

“네. 오늘 초음파 팔로우 업 해 보려고 협진도 넣어 놨습니다.”

“어, 그래. 잘했네. 근데 여긴 웬일이야? 혈종 병동에?”

“달 바뀌었잖아요. 저 오늘부터 혈종 돌아요.”

“아……. 그래? 그럼 어제 그 환자는 인계하나?”

“아뇨. 어차피 곧 퇴원할 거 같아서, 그냥 제가 데리고 있다가 보내려고요. 히스토리가 어렵기도 하고 인계하면 어려워할 거 같아요.”

“뭐, 그게 좀 힘들어도 환자 생각하면 낫긴 하지.”

수혁은 아까 회진 때 보았던 환자를 떠올렸다.

확실히 복수가 주니까 컨디션도 좋아져 있었다.

대훈이 방금 말한 것처럼 그리 오래 있지 않아 퇴원할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버드 키아리 증후군인 것도 알았고, 또 증후군을 일으킨 원인도 알아냈으니까.

“그럼 이번에 누구 파트지?”

“조태진 교수님이요.”

“아……. 네가 이따 외래 들어오는구나?”

“네.”

“해 봤어? 외래 어시.”

“아뇨, 조태진 교수님은 처음이에요.”

“별로 긴장할 건 없어. 워낙에 꼼꼼한 데다가…….”

혈액종양내과 교수 특징 중 하나가 1년 차를 잘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조태진도 마냥 사람이 좋아 보이지만, 외래 어시 설 때 온전히 다 맡긴 사람은 동기 중 수혁이 유일했다.

다른 1년 차가 들어갈 때는 무조건 지금 수혁에게 요청했던 것처럼 백을 필요로 했다.

수혁은 굳이 그런 거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몸을 스테이션에서 떼어냈다.

“슬 내려가야겠다. 한 15분 전에 도착해서 한 번 더 차트 보는 게 좋아. 특히 영상의학과 판독 나왔는지 봐야 해.”

“아……. 네.”

“어차피 오늘 내가 같이 들어가니까 걱정 말라고. 백 봐줄게.”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원래 쉬는 시간인데…….”

“레지던트가 쉬는 시간이 어딨냐. 연구하는 것도 데이터가 안 넘어와서 홀딩 중이야. 할 거 없어.”

“어휴, 감사합니다.”

대훈은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위 연차가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돕겠다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훈이 특히 이뻐하는 후배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꿍꿍이도 있었다.

“아, 근데 대훈아.”

“네.”

“너 동기들이랑 잘 지내지?”

수혁은 외래로 가면서 이런저런 것을 묻기 시작했다.

대훈이야 수혁이 묻는 말이니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수혁 선생님이…… 환자 보는 거 말고 다른 얘기 하는 건 처음 보는데.’

조금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상대가 존경해 마지않는 수혁인데.

입고 있는 팬티 사이즈를 물었더라도 알려 줬을 터였다.

아니, 어쩌면 당장 벗어서 줬을 수도 있었다.

대훈에게 수혁은 그런 존재였다.

“아, 네. 잘 지냅니다. 제가 인턴 때 인턴장이었어서…….”

“맞네. 너 그랬지? 그럼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되나?”

“네? 부탁이요? 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대훈은 진짜 뭐든지 다 할 생각이었다.

‘머리털이라도 뽑으라면…… 아니, 아니다. 이것만 빼고…….’

수혁은 대훈이 잠시 자기 정수리 쪽에 손을 댔다가 황급히 떼는 것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내가 이제 의국장이 되거든.”

“아! 축하드립니다! 역시, 저는 선생님이 되실 줄 알았습니다!”

“야야. 뭘 그렇게 큰 소리로 해. 환자들 다 본다. 누가 보면 교수라도 된 줄 알겠어.”

“교수, 떼 놓은 당상 아닙니까!”

“이놈이 커피가 아니라 술을 마셨나. 목소리가 왜 이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바루다는 그런 대훈을 보며 역시 부하로 삼기 좋은 녀석이라는 말을 했다.

이제 부하니 뭐니 하는 시대는 지나간 지 오래라고 알려 줬지만.

바루다는 막무가내였다.

[신현태도 이현종 부하 아닙니까? 그런 관계로 만드십쇼. 얼마나 좋습니까. 까라면 까고.]

내가 이현종이고 안대훈이 신현태라.

둘 다 어쩐지 오리지널 인물에 비해 조금 처지는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오케이, 그럼 이놈은 내 부하다.’

[부하 삼으라고 했지, 이놈이라고 하라고 하진 않았는데.]

‘시끄러워.’

수혁은 자신이 이현종이라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바루다는 그런 수혁을 언짢아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어차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수혁인데.

“아무튼, 나 의국장 되는데 내가 사실 너네 동기 애들…… 1년 차 애들 잘 모르잖아. 공부시키다 도망간 애들은 지금도 나 불편해하고.”

“그 자식들 제가 다 잡아 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건 아니고. 뭘 잡아 와. 추노 하니?”

“추노 할 일 있으면 그것도 시키십쇼. 잡아 오겠습니다.”

“어…….”

추노.

도망간 노예란 뜻인데.

‘추노 한다’라는 말이 병원에서는 ‘도망간 레지던트를 잡으러 간다’라는 은어로 쓰였다.

대개 의국장이 맡아야 했는데, 그 방식은 사람마다 달랐다.

말 그대로 잡아 오는 사람도 있었고.

찾아가서 설득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혁은 둘 중 어느 것도 하기 싫었던 사람이라 대훈의 이 말이 기꺼웠다.

“좋네, 그건. 아무튼, 그냥 네가 애들 단속 좀 잘하고. 내가 너한테 말하면 전달하라고, 전체한테.”

“알겠습니다. 선생님.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그래.”

수혁은 일 시키는 데도 감사하다는 말만 연발하고 있는 대훈과 함께 외래 진료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혈액종양내과 진료실이다 보니 많은 환자가 비니 모자를 쓰고 있었다.

제아무리 항암제 프로토콜이 좋아지고 있고, 또 표적 항암제니 뭐니 하는 신약들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머리가 빠지는 부작용만큼은 완전히 피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구토…… 하는 환자들은 확실히 줄었던데.’

여전히 미디어에서는 항암 치료만 했다 하면 토하는 것을 일종의 클리셰로 쓰고 있지만.

이미 현장에서는 어느 정도 극복한 지 오래였다.

물론 암의 종류와 프로토콜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오늘 외래 처음 5명 정도는 호스피스 병동 환자들이거든? 진짜 친절하게 잘해야 된다.”

수혁은 환자들을 둘러보다가, 대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호스피스란 얘기를 들은 대훈은 결연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태진이 얼마나 호스피스에 대해 신경 쓰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암은 완치가 가능한 단계가 있고, 그렇지 않은 단계가 있지 않은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의사도 환자도 치료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야겠지만.

후자에 해당한다면 의사도 환자도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조태진은 대개 환자의 통증과 불편을 경감하는 방향을 택하는 편이었다.

삶의 마지막을 인간답게, 품위 있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 그럼 들어가서 차트 보자.”

“네.”

수혁은 그들 중 얼굴이 낯익은 사람들과 눈인사를 한 후,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오늘 볼 외래 환자 차트를 다시 한번 띄웠다.

“어제 다 봤으니까, 영상 결과 안 나온 사람들만 봐.”

“아, 네.”

“표시해 놨는데. 응, 그분. 응? 왜 협진을 안 봐준다고 하지?”

“바이옵시요? 어, 그러네요. 안 된다고 하네.”

“이상한데. 지금 시간 있으니까, 네가 한번 가서 물어보고 올래?”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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