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혈종 (5)
“영상의학과 3…… 2년 차 이혜영입니다.”
곧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스피커 폰을 통해 들려왔다.
안대훈 전화로 해서 그런가 평소보다도 더 쌀쌀맞은 느낌이었다.
“아, 이혜영 선생? 지금 복부 협진 담당인가요?”
“응? 네, 그런데요? 누구세요?”
하지만 자연스러운 하대가 나가자 조금은 조심스러워졌다.
싸가지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병원에서 생존하려면, 레지던트로서 이 정도 눈치는 있어야만 했다.
“혈액종양내과 조태진 교수예요.”
“아, 네. 교수님. 제가 협진 담당입니다.”
“외래 환자 중에 리버 바이옵시 협진 나간 환자 하나 있는데, 혹시 확인했나요? 협진 일자가…… 어제로 되어 있네요.”
조태진은 수혁이 미리 협진을 내놨다는 사실에 윙크를 찡끗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놈이 혈액종양내과로 와 주면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였다.
모르긴 해도 연구로 가든, 임상으로 가든 살릴 환자가 적지 않을 터였다.
“아…….”
이혜영은 눈알과 머리를 동시에 굴렸다.
리버 바이옵시라는 게 하루에도 수십 개씩 나는 흔한 협진은 아니지 않은가.
태화 의료원이 비록 간 이식 공장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간 파트 수술이 활발한 곳이라 해도 보고도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뭉개 보려고 했는데…….’
뭉개도 될까?
안 될 거 같았다.
상대가 레지던트면 몰라도, 교수는 안 되었다.
이쪽은 다이렉트로 윗분들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힘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자신이 귀찮아서 틀어막았다는 걸 걸릴 게 뻔했다.
“지금 확인했습니다.”
해서 받아 주기로 했다.
아까 거절했던 사실만 뭉개기로.
“어, 씨.”
마주 보고 거절당했던 안대훈이야 발작했지만.
“쉬, 조용.”
수혁이 막았다.
누가 뭐래도 교수가 통화 중이지 않은가.
잡소리가 섞이면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가능한가요? 오늘 되면 입원장 내서 바로 검사하고 내일쯤 퇴원시키고 싶은데.”
“제가 확인하고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교수님.”
“그래요. 되도록 빨리 부탁드려요. 환자분이 기다리고 있어서.”
“네.”
이혜영은 한숨인지 대답인지 헷갈리는 말로 통화를 끊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레지던트 판독실보다 조금 안쪽에 위치한 복부영상 판독실 문을 두드렸다.
“어, 들어와.”
문 앞에서 두 번째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진실 교수였다.
어제 당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최근 간암 관련 논문을 진행 중이라고 하더니,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낮아진 목소리엔 피로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저, 교수님.”
“어, 왜.”
“혈액종양내과 쪽에서 당일…… 아니, 어제 협진이 왔는데요.”
“어제? 어떤? 밤에 났나? 없었던 거 같은데.”
“네, 밤에 났습니다. 리버 바이옵시를 해 달라는데요. 외래 환자라 빨리 연락 달라고 했습니다.”
“리버 바이옵시? 등록 번호 줘 봐.”
“네. 여기.”
“흠.”
김진실 교수는 우선 환자 차트부터 보고는 영상을 띄웠다.
아직 지금 외래에서 작성한 차트는 입력을 누르지 않아서 뭘 의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전에 대장암이 있었단 것만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음…… 음?”
김진실 교수는 스크롤을 굴리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혜영도 새로 온 교수도 간암, 즉 HCC를 준 그 덩이가 있는 부위에서였다.
“아, 이거 해 달라는 거구나?”
“네, 그거요.”
누가 이걸 잡아냈을까 싶어서 재밌단 생각이 들었는데.
이혜영 반응을 보아하니, 왜 조직 검사해 달라는 말이 나왔는지 전혀 모르는 거 같았다.
‘모를 수 있지.’
모를 수 있는데.
도리어 영상에 있어서는 비전문가라 할 수 있는 내과 쪽에서 먼저 잡았다는 게 걸렸다.
이런 건 자존심 문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 힌트를 좀 주기로 했다.
“혜영아, 너 이거 내과에서 왜 지금 당장 해 달라고 하는 거 같아?”
물론 그 엄하다는 이하언 교수에게 사사 받은 사람답게 그저 막 알려 주진 않았다.
자기가 배운 대로 질문을 던졌다.
문제가 있다면 이혜영은 김진실처럼 우수하지도, 열심이지도 않다는 점이었다.
“어……. 내과는 원래 좀 그렇지 않나요? 맨날 협진 내면서 고마워하진 않고.”
“응?”
그저 일이 많아지면 짜증이 나는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또 맞는 말이기도 했다.
내과는 임상과 중에서 제일 덩치가 큰 만큼 제일 많은 환자를 보지 않던가.
영상의학과는 서비스 파트이니만큼 임상과에서 이것저것 문의할 게 많은 과였고.
그중에서도 복부영상파트는 솔직히 비전문과에서 어설프게 손대도 될 만큼 만만한 파트가 아니었다.
심지어 같은 영상의학과 쪽에서도 이쪽 판독은 꺼릴 정도로 어려웠으니까.
‘그래도…… 이런 말을 교수 앞에서 할 건 아니지 않나.’
김 교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다시 물었다.
얼마 전 아주 긴밀한 사이의 지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였다.
‘화낼 만한 일이라고 다 화내면 안 돼, 그때 참아야 착한 사람인 거야.’
어찌나 맞는 말이던지.
좌우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이혜영 선생. 이거 딱 봐도 HCC 같잖아. 근데 왜 해 달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뭔가 감별 질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애써 차분해 보이려고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였다.
그제야 혜영도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아……. 이게 뭐가 있긴 한가 본데.’
해서 정신을 차리고 영상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태화 의료원 영상을 들어온 재원이고 또 영상의학과에서 무려 2년 가까이 수련받은 몸 아니던가.
비록 복부가 좀 어려운 파트긴 해도.
내과도 확인한 이상한 걸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디……. 동맥기에서 조영 증강되고, 정맥기, 지연기에서는 나가고. 응?’
하지만 아무리 봐도 HCC라는 확신만 들 뿐이었다.
해서 그런 거 아니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김 교수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다른 말을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 시간이 오래 지체될수록 실망하고 있었다.
“음, 모르겠니?”
“그…….”
“그래, 모를 수 있어. 사실 너무 드문 케이스거든, 이게. 의심하기가 쉽지 않지.”
김진실 교수도 죽자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환자 케이스를 봤으니까 알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복부영상의학과 교수라 해도 쉬이 떠올릴 수는 없었을 터였다.
이혜영이 무식한 것도 맞지만.
이거 모른다고 타박할 일은 아니란 얘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내과는 이걸 의심하고 냈을까?
‘혹시 이혜영 말처럼 뭘 의심한 게 아니라 그냥 승질이 급해서 낸 건가?’
궁금해진 김 교수는 급기야 외래로 전화를 걸었다.
“네, 조태진 교수님 외래입니다.”
어차피 답변 올 때까지는 외래 홀드였기에 사원이 바로 받았다.
“아, 바꿔 드릴게요.”
그리고 사원은 전화를 곧 조 교수에게 전달해 주었다.
영상의학과 김진실 교수가 건 전화라는 걸 말해 주면서였다.
“어, 김 교수님.”
“네, 조태진 교수님. 이번에 협진 내신 케이스요.”
“네네.”
“그거 혹시 HCC 말고 다른 거 의심하시는 건가요?”
“아…… 네, 그…… IAA요. 간 내부 신선종.”
“오.”
설마설마했는데 내과에서 이걸 잡아낼 줄이야.
이런 일이 반복되어 일어난다면 영상의학과의 존속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사상 최대의 위기가 A.I.의 대두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임상과의 독립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가 있었다.
“아, 이거 근데 제가 의심한 게 아니에요.”
한편 조태진은 김진실 교수의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이현종이었다면 당연하다는 듯 시치미를 떼었겠지만.
조태진은 우직한 사람이었다.
“네? 그럼 누가…….”
“누구긴 누굽니까, 우리 수혁이지.”
“아…….”
“어, 저는 안 되고. 수혁이가 알아낸 건 납득해요? 이거 상처 되는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 수혁이가 국보급 인재죠. 어때요, 가능성이 커 보입니까?”
조태진은 실로 기분이 좋다는 듯 껄껄 웃었다.
레지던트와 경쟁 상대하는 것도 기분이 나쁠 거 같은데.
심지어 어떤 면에 있어서는 아득히 추월당하고 있는 주제에도 그랬다.
조태진이 욕심이 없거나, 혹은 바보 같은 사람이라 그런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냥 그가 제일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 둘이 그러고 있으니까 자연스레 변해 버렸다.
“네, 높아 보여요. 조직 검사하기는 해 봐야겠지만요. 근데 이게 위치가 아주 좋지는 않거든요? 약간 어려울 수 있어서 외래에서도 위험성을 설명해 주세요. 여기서도 할게요.”
“네, 물론이죠. 해 주신다는데 동의서는 받아야죠. 그럼 언제 보낼까요?”
“랩 보니까 출혈 경향이 있진 않아서 바로 가능해요. 인터벤션실로 보내 주시면 알아서 어레인지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 기프티콘이라도 쏠게요.”
“아, 아뇨. 아뇨. 괜찮아요.”
김 교수는 정말 진심으로 사양했다.
이럴 때 커피 한 잔 받으면 당장 기분은 좋겠지만, 두고두고 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연차에 소아 파트에 있는 교수 하나는 이런 거 차단 못 했다가 주말에도 커피 한 잔이면 판독해 주는 맘씨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네, 그럼 부탁합니다. 감사해요.”
조태진도 질척이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금세 전화를 끊고는 환자를 다시 불러들였다.
나쁜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이 훨씬 크니 확인하는 차원에서 검사하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중간중간 시술의 위험성도 얘기했지만 이미 환자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암이 아닐 수도 있다고요?”
“네네. 그런데 검사가 좀…….”
“암이 아닐 수도 있다, 이거죠?”
“네, 그런데 검사가 좀…….”
“암이 아니라고요?”
“아니, 그건 아니고…….”
꼼짝없이 재발이나 간암인 줄 알고 왔다가 교수 입에서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어찌 흥분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태진 또한 덩달아 기뻤지만, 의사인지라 본분을 다하기 위해 애썼다.
“휴.”
그 환자에 시간을 허비한 탓에 외래는 지연이었다.
오후 5시까지만 예약이 되어 있었지만, 끝난 것은 6시가 다 되었단 말.
맘 같아서는 이쁜 짓 한 녀석들 밥이라도 사 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아, 오늘 컨퍼런스 있지?”
“네. 교수님. 이현종 교수님, 신현태 교수님, 장덕수 교수…….”
대학 병원이라는 곳이 그렇지 않은가.
온전히 쉬는 날이 있으면 뭔가 있는데 빵꾸 내고 있는 것일 공산이 컸다.
조태진은 안대훈이 그래도 일 잘하는 1년 차답게 컨퍼런스 참석 인원을 줄줄 주워 넘기는 것을 듣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잠깐. 이현종 교수님이 와?”
“네.”
“이상하네?”
귀찮은 거 싫어하는 양반이지 않은가.
해서 원래도 과 행사 안 오다가 원장이 된 이후로는 원장으로서의 일이 너무 바쁘단 핑계로 문턱도 넘지 않은 지 오래였다.
“오늘 케이스 뭐지?”
그런데 이현종이 온다는 건, 더럽게 어려운 케이스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 이현종이 관심을 가질 만큼이나 어려운.
“신현태 교수님이 낸 케이스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오, 야. 빨리 가자.”
“네?”
“원장님이 과장님 쥐 잡듯이 태우겠다. 이런 구경 어디 가서도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