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뭐여 이게 (1)
매주 수요일 PM 6:30.
태화 의료원 내과 의국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었다.
‘모든’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다들 너무 바빠서였다.
시간이 있으면 반드시 와야 한다는 강제성을 띠고 있긴 했지만.
대학 병원에서 있으면서 시간이 있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바이옵시 잘됐고, 환자 병실로 올려보내겠습니다.>
조태진은 강당으로 가던 도중 김진실 교수에게 문자를 받았다.
“안대훈 선생, 환자 입원했다니까 이따 가서 상태 확인해.”
“네, 교수님.”
“수혁이가 백도 좀 봐주고.”
“네, 교수님. 걱정 마세요.”
그는 우선 레지던트들에게 지시를 내린 후 감사하다는 답장을 했다.
강당은 외래와 같은 암 센터에 있어서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딱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강당 앞에 설 수 있었다.
“도시락 가지고 들어가세요.”
입구에는 비서진들이 샌드위치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컨퍼런스 할 시간도 있고 밥 먹을 시간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겠는가.
둘을 한꺼번에 처리했으면 좋겠다는 어느 한 선배 교수의 고언에 따라 유구히 내려오고 있는 전통이었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이름 쓰고 들어가세요.”
“아, 네.”
이런 컨퍼런스에 참가하는 것도 다 나중에 전문의 시험을 보기 위해 필요한 절차였다.
한때는 1년 차가 3, 4년 차들 이름 쭉 적고 가짜로 사인하기도 했다는데.
요새는 어려웠다.
게다가 지금은 이현종이 도깨비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빨리 들어가, 빨리. 오늘 케이스 어려워 보인다고 몇 번 말했냐.”
사인하는 놈이 진짜 그놈이 맞나 살피곤 우물쭈물 하고 있는 레지던트들마다 등짝에 스매싱을 날렸다.
평생 해 본 운동이라곤 골프밖에 없는 양반이라고 무시했다간 큰코다쳤다.
“으억.”
“헉.”
필드에 나갔다 하면 싱글을 날리는 위인이지 않은가.
숏 게임이 강해서가 아니라 드라이브 샷 때문이었다.
한 방이 있었다.
“오, 우리 수혁이.”
하지만 수혁 앞에서는 그저 함박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천천히 가라, 천천히. 예끼 이놈들 길 비켜라, 이놈들아! 우리 수혁이 들어가게 비켜, 인마!”
심지어 길잡이를 자청하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어중간한 위치에 서 있던 이들은 옆으로 밀려 넘어질 뻔하기까지 했다.
“나참…….”
“아들 사랑 지극한 거 보소.”
“서럽다, 서러워.”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위인이 아니지 않은가.
“자, 여기 앉아.”
“네? 여긴 너무 앞자리…….”
“너보다 똑똑한 놈 오면 비켜 줘. 근데 없잖아. 그냥 앉아.”
“어…….”
“앉아, 인마. 오늘 케이스 장난 아니라니까. 보다가 어? 저놈 저거 실수한 거 보이면 야유하라고. 좀 알려 주고.”
이현종이 저놈이라면서 가리킨 건 다름 아닌 신현태였다.
신현태 과장은 그런 이현종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였다.
‘내가 미쳤지…… 진짜…….’
왜 찾아갔을까.
왜 굳이 가서 모르겠다고 했을까.
그냥 혼자 좀 뒤져 보거나, 펠로우 통해서 넌지시 물을걸.
‘흠. 흐으음.’
신현태는 어제 거의 열흘 동안 고민하다 찾아간 케이스를 보자마자 이현종이 보였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안 알려 주네?’
오늘 케이스 발표해 보라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토의하다 보면 알게 되지 않겠냐고 하면서.
그 말은 곧 여기서 좀 까겠단 뜻이었다.
‘형……. 왜 그래, 정말. 나 과장이야.’
몇 번인가 하소연을 해 봤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어차피 다 모를 거니까 부끄러울 일은 없을 거라는 말만 들었다.
“자자, 시작한다.”
이현종은 수혁의 바로 옆에 앉고서는 앞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신현태가 눈에 들어왔다.
“흠.”
물론 발표를 신현태가 직접 하는 건 아니었다.
명색이 과장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이현종도 그런 것까지 원하진 않았다.
놀리는 건 개인적으로 해도 충분했다.
“안녕하십니까, 내과 2년 차 유지상입니다.”
총알받이는 유지상이었다.
약국장이 내정된, 조금은 얍삽한.
얼굴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바로 어제 달 바꿈 했는데, 바로 이런 폭탄 같은 케이스 발표를 맡게 되었으니 당연했다.
“호흡곤란 및 발열을 주소로 내원한 51세 여자 환자입니다.”
호흡곤란과 발열.
이 두 단어를 듣자마자 강당 안에 있던 모든 내과 의사는 폐렴을 떠올렸다.
그러니 감염내과인 신현태 과장이 받지 않았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였다.
“환자는 7년 전 승모판막 폐쇄 부전증(Mitral regurgitation)에 대해 승모판 치환술을 시행 받았습니다.”
하지만 승모판 치환술이라는 말이 나오자, 한 가지 질환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
‘심내막염인가?’
[가능성이 있겠습니다만…… 이현종이 올리라고 한 케이스 아닙니까? 쉽진 않을 겁니다.]
‘아, 하긴.’
[그래도 가능성이 크니 문제 리스트에 추가하겠습니다.]
승모판이란 좌심방과 좌심실 사이에 있는 판막으로 심실로 넘어간 피가 다시 심방으로 넘어오지 않게 해 주는 기관을 말했다.
폐쇄 부전이라는 건 그 기능이 망가진 것을 뜻했고.
치환을 했다는 건 망가진 걸 제거하고 대신 인공 판막을 끼워 넣었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이렇게 인공 판막을 끼워 넣으면, 기술이 이렇게나 발달한 지금도 아무래도 진짜 판막과는 달리 혈액 응고나 세균 증식이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극히 드문 심내막염을 이러한 환자에서는 반드시 감별해 주어야만 했다.
“환자 이후 문제없이 지내다가, 2년 전 심실빈맥(Ventricular tachycardia)이 있어 의식 소실이 있었고, 이에 대해 심장박동 조절 장치(Intracardiac defibrillator) 삽입하였습니다. 이후 NYHA II(심장 기능 상실 중증도 타입 2)로 생활하다가 내원 7일 전부터 III로 악화된 상황입니다.”
“음.”
여기서 심실빈맥에 심장박동 조절 장치까지 나올 줄이야.
게다가 원래도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할 때 숨이 찬 수준의 심장 기능 상실이 있던 환자 아니던가.
이게 III가 되었다는 건 이제 가만히 있어도 괴로운 수준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종합병원이네, 환자가.’
[이현종이 괜히 골랐을 리가 없죠.]
‘여기까지만 듣고서는 전혀 모르겠지?’
[음…….]
바루다는 기계 주제에 자존심을 부리느라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네, 전혀.]
‘이현종 교수님은 아는 거 같은데.’
[저도 탑재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뒤에 나오는 정보로 유추한 거 아닐까?’
[그러길 빕니다. 제가 수혁의 CPU에 적응해 버린 게 아니길 바라요.]
‘새꺄, 너는 꼭 항상 마지막을.’
수혁은 바루다의 시비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내가 뭐 잘못했나?’
하필 맨 앞자리다 보니 유지상의 눈에 그게 너무 잘 보였다.
그냥 보통 동기면 폰을 보나, 하고 넘어가겠지만.
이건 수혁 아니던가.
‘하……. 미치겠네.’
해서 유지상은 바짝 긴장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복용 중인 약물로는 디곡신, 와파린, 스피로노락톤, 아미오다론, 데노파민이 있습니다.”
물론 수혁은 유지상의 태도나 말투에는 쥐뿔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갑자기 좀 목소리가 떨려서 왜 저러나 했을 따름이었다.
[약물 기록하겠습니다.]
‘응, 근데 뭐…… 환자 상태 봐서는 다 먹어야 하는 약물을 먹어야 하는 용량으로 먹고 있네.’
[네, 적어도 약물에서 실수가 있는 건 아닙니다.]
‘있어도…… 증상이 저렇게 나타나긴 쉽지 않지. 발열이 있잖아.’
[네.]
마침 지상은 환자의 내원 당시 활력징후를 띄워 놓고 있었다.
혈압 및 심장박동 수는 정상이었으나 체온이 37.8도였다.
딱 발열의 기준에 걸리는 온도였다.
“환자 증상은 기침이 있었으나, 가래는 전혀 없었습니다. 전신 쇠약감 및 피로감을 호소했고, 흉통, 심계 항진, 기좌 호흡은 없었습니다.”
꽤 많은 얘기를 듣고 있었으나 여전히 아리송하기만 했다.
반면 옆에 있는 이현종은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고 앞을 보고 있었으면 기분이 훨씬 나았을 텐데.
이현종은 수혁을 보고 있었다.
마치 ‘넌 알지?’라고 묻는 듯했다.
‘미치겠네?’
[미치면 안 됩니다. 수혁은 바루다의 유일한 입출력자입니다.]
‘아니, 그럼 좀 뭐라도 해 봐.’
[어…….]
‘뭐 생각나는 거 있어?’
[아뇨. 개뿔도 없습니다. 일단 랩이라도 좀 보고 채근하죠. 이현종이 설마 점쟁이 빤쓰 입은 것도 아닌데 여기까지만 보고 알았겠습니까?]
‘하긴, 그렇겠…… 지?’
어디 소설이나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환자 얼굴만 보고 병명을 주워 넘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보면 되었다.
예전에야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해 봐야 워낙 아는 질환이 한정적이라 가능했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당연히 지금 와서 보면 틀린 게 태반일 테고.
하지만 지금은 우선 교과서 두께만 해도 세 배가 넘게 늘어난 시대 아닌가.
수혁은 옛날 해리슨 교과서를 보고 저건 뭔 노트가 영어로 되어 있나 했을 지경이었다.
“내원 당시 시행한 랩과 엑스레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루다의 기대대로 곧 검사 소견이 주르륵 떴다.
그렇지 않아도 맨 앞에 있던 탓에 작은 글씨도 다 보였다.
게다가 수혁은 바루다의 도움을 통해 아주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빈혈 있고.’
[심부전 환자에서 드물지 않죠. 당연한 거 읊지 마세요.]
‘어……. 미안.’
바루다는 꽤나 까칠해져 있었다.
잘 모르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모르는 거 자꾸 물어보는 거만큼 사람 빡치게 하는 일도 드물지 않은가.
‘블리딩 타임도 늘어나 있네. 약 먹고 있으니까 그럴 거고.’
[혈뇨가 있네요. 흠, 정말 심내막염인가?]
‘그걸 신현태 교수님이 놓칠까?’
[이상한 일이죠, 그러면?]
‘동맥혈 성분 검사에서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네. 뭐, 심부전이니까.’
[아……. 엑스레이, 엑스레이를 보세요.]
원래 랩 결과는 일일이 다 읊는 게 아니었다.
특별한 것만 언급해 주고 넘어가는 게 국룰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성질 급한 교수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해서 유지상도 서둘러 넘겨 버렸다.
‘승모판 링이 있네. 심장박동 조절 장치는 잘 있는데. 우심실, 우심방 그리고 관상 정맥동 통해서 좌심실에 페이싱 리드 들어가 있잖아. 맞지?’
[네. 누가 시술했는지 잘했네. 엑스레이로도 다 알겠네요.]
‘심장 전체적으로 커져 있고, 좌심방도 커져 있고. 이거야 뭐 원래 질환이 그러니까.’
[폐가 전체적으로 하얘져 있네요. 폐렴이라면 세균보다는 바이러스일까요?]
‘흠……. 네 말대로 그럴 거 같아. 근데 심내막염 가능성도 있는데.’
[둘이 같이 왔을 수도 있죠. 워낙 상태가 안 좋으니까.]
‘아, 그런가.’
환자는 말 그대로 종합병원급 환자였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다고 해야 할까.
문제가 있다면 아직도 그 무슨 일이 뭔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뭐냐, 대체.’
[이현종이 여기서 알아차린 건 아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