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뭐여 이게 (3)
“그래……. 수혁이 일어나서 질문해 봐.”
신현태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옆에 놓여 있던 마이크를 집어 들면서였다.
아까처럼 우거지 죽상을 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엷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이현종의 꿍꿍이를 알아낸 덕이었다.
“어……. 네, 교수님.”
반면 수혁은 아주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진 못했다.
‘뭐냐, 그래서. 뭐 같아?’
[아직……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보가 조금 부족해요.]
‘이런 망할.’
[일단 질문하면서 시간 끌어요. 수혁, 그런 거 전문이지 않습니까?]
‘흠.’
아직 완벽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방금 바루다가 말한 것처럼 시간 끌기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그럴싸하게 끌 수 있는 달인이었다.
“레지던트 2년 차 이수혁입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몇 가지 질문드려도 괜찮을까요?”
우선 시작은 정석적이었다.
모든 질문자들이 이렇게 시작하지 않던가.
심지어 칠성 병원 안국태 교수도 시작은 이랬다.
‘하…… 수혁아…….’
해서 지상의 얼굴은 점차 썩어들어 가기만 했다.
이 인간이 얼마나 날카로운 질문을 했었는지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랬다.
그 대상이 위 연차이거나, 다른 병원 사람들일 땐 통쾌하기까지 했는데.
정작 본인이 되니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아군일 때는 더없이 든든하던 놈일수록 적이 되면 무서운 법이라더니.
수혁이 딱 그짝이었다.
‘질문하면 안 괜찮다고 하고 싶다.’
강한 유혹이 일었지만.
명색이 곧 3년 차가 될 몸 아닌가.
의학적으로 틀린 얘기를 할 수 있을지언정,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
“네, 이수혁 선생님. 질문 주시죠.”
“네, 우선…… 환자의 증상 말입니다. 호흡 곤란.”
“네네.”
지상은 같은 연차의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쩔쩔맸다.
심지어 아직 딱히 질문다운 질문이 나온 것도 아닌데 그랬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선 어느 누구도 지상이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지…….’
‘쟤가 1년 차 3월에 안국태 개박살 낸 애지?’
‘아, 쟤가 걔야? 나 군대 가서 못 봤네, 그걸.’
‘대박이야. 그 후로도…… 와, 진짜 도장 깨기 수준이었지.’
이미 태화 의료원 내에서 전설이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지상은 마른침을 하염없이 꼴깍꼴깍 삼켰다.
수혁은 그런 지상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환자의 숨찬 수준을 묘사할 때 어떤 말을 쓰셨죠?”
“네?”
“NYHA type II에서 III로 진행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아 네.”
지상은 숫제 교수님 대하듯 굽신거렸다.
수혁은 그런 지상을 보며 조금 안쓰럽긴 했지만.
어느새 자신의 손을 꼭 부여잡은 채 기대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이현종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운이 나쁜 거야, 네가.’
하필이면 이현종이 눈독 들인 그 케이스를 발표하다니.
이 무슨 불운이란 말인가.
“그 말은 환자의 주된 문제가 심장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인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요?”
결심을 내린 수혁은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옳거니.”
그 말을 들은 이현종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바로 어제 자신이 신현태에게 제일 먼저 했던 질문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슴 한켠엔 벌써 이 사랑스러운 제자이자, 대외적인 양아들이 자신의 수준에 근접했다는 것이 조금 서늘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뿌듯한 건 뿌듯한 것이었다.
이 녀석은 과연 천재였다.
그냥 어중간한 애들한테 으레 붙여 주는 천재가 아니라, 정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다 이 말이었다.
“어…….”
신현태도 꽤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양반이 했던 말을 고대로 하네.’
그걸 듣고서야 알지 않았던가.
기저 질환에 사로잡혀서 진짜 문제가 뭔지 모르고 있었단 사실을.
하지만 지상은 그저 얼빠진 표정만 지을 따름이었다.
‘심장…… 심장 아냐?’
심장이 아니면 뭐야.
이런 생각만 들 뿐이었다.
“질문받는 사람 어디 갔어. 주치의가 못 받으면 교수라도 해야지.”
그때 이현종이 다리를 꼬며 외쳤다.
나이도 적잖은 사람이 목청이 아주 좋았다.
마이크도 필요 없었다.
‘이 형은 어? 이럴 때만 신나지, 아주.’
남 갈굴 때랑 내기 골프 이길 때.
순 요럴 때만 신나서 소리를 질러 댔다.
‘어휴.’
그렇다고 신현태가 이런 말을 입에 올리기는 좀 뭐하지 않은가.
태생이 더 점잖은 사람이었고, 또 무던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과장이라는 직함의 무게까지 얹고 있었다.
물론 이현종은 그보다 배는 더 무거워야 할 원장임에도 저리 경거망동하고 있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저래도 될 만큼 실력이 있는 사람인데.
“네, 심장에 기저 질환이 있어서…… 우선은 심장에 초점을 두고 검사와 치료를 진행했습니다. 다만 이뇨제 외에 항생제를 쓴 것은 증상의 오리진이 폐일 가능성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답변이 되었나요?”
“네, 감사합니다.”
“또 질문이 있을 거 같은데, 이건 우리 유지상 선생이 받죠. 발표자는 유지상 선생이니까요.”
“네, 교수님.”
수혁은 신현태의 푸근한 미소에 다소 안도감을 느끼면서 다시 지상을 바라보았다.
“읏.”
지상은 자신이 마이크를 쥐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신음을 흘렸다.
마치 뱀을 앞에 둔 쥐새끼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게 고작 첫 질문이었구나.’
지상은 수혁의 질문 스타일을…… 그러니까 이현종에게 고대로 배운 스타일을 떠올렸다.
한 방에 날리는 게 아니라 빌드 업을 통해 파멸의 늪으로 이끄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럼 다시 질문 드리겠습니다. 폐도 염두에 두신 거죠? 항생제를 쓴 것은.”
“어……. 네.”
두려워하고 있는 사이, 수혁이 재차 질문을 날렸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다른 내과 의사들도 등을 등받이에서 뗐다.
뭔가 있을 거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엑스레이가 입원 첫날부터 어제 찍은 거까지…… 쭉 나빠지지 않았습니까? 아니, 표현을 달리할게요. 병변이 진행했어요. 그렇죠?”
“어……. 네.”
“항생제를 광범위 항생제를 사용했고, 기간이나 용량도 적절히 썼는데도 그렇습니다.”
“그…… 네.”
“항생제는 왜 쓴 건가요?”
“어.”
아주 단순한 질문인데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추궁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 자식이 동기끼리 너무하네?’
기분이 나빴지만.
어쩌겠는가.
질문이 들어왔는데.
이 자리는 사적인 자리가 아니라 공적인 자리였다.
게다가 이현종이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공이 신현태 과장에게 넘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그…… 폐렴을 생각하고 썼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사실 학생한테 물어봐도 알 만한 대답 아니겠는가.
열나고, 엑스레이 지저분해서 항생제를 쓰고 있는데, 원인이 뭐 같냐.
여기서 답 못하면 어디 가서 의학도라는 말을 꺼내면 안 될 거란 생각도 들었다.
해서 아까보다는 조금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는데.
마주한 수혁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마치 네가 그럴 줄 알았다, 뭐 이런 표정?
“그래요? 지금도 그런가요?”
아니나 다를까, 연쇄 질문이 단 1초도 지체하지 않고 튀어나왔다.
아까보다 좀 더 의미심장해 보이는 질문이었다.
‘지금도? 어…… 지금은 아닌가?’
약이 좀 심하게 안 듣고 있기는 했다.
그래서 바이러스성 페렴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신현태 교수 말로는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만약 바이러스인데 폐가 이 모양이 됐으면 벌써 중환자실 가야 하는 컨디션이 되었을 거라고 하면서였다.
듣고 보니 그렇긴 했다.
바이러스가 세균보다 작다고 무시하는 놈은 의사가 아닐 터였다.
대개의 경우 효과적인 약이 없는 만큼, 숙주의 면역력이 약할 땐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놈도 없었다.
“어떤가요? 지금도 폐렴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인가요?”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수혁이 한 번 더 물어 왔다.
다행히 이번에는 표정을 이리저리 바꿔 주면서였는데, 대강의 힌트를 주려는 듯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라는 거 맞지?’
맞지, 수혁아!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지상은 정말 간신히 참았다.
그리곤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아주 살짝이었는데, 그걸 본 수혁이 슬며시 끄덕여 준 덕에 나중엔 세차게 저어 댈 수 있었다.
“아뇨, 아닙니다. 지금은 폐렴 말고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하는 시점입니다.”
“어떤 가능성이 있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요?”
“어…….”
하지만 당당해졌던 자신감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단답형이면 어떻게 계속 힌트를 받아다 네, 아니오를 반복해 볼 수 있을 텐데.
‘너무 열렸다, 질문이…… 수혁아…….’
이런 종류의 질문에는 도저히 답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질문 수준이 지상의 그것을 훨씬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게 지상뿐만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특히 신현태가 그랬다.
그가 보기에 지상은 나쁜 전공의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수한 전공의도 아니었다.
평범한 전공의가 자신도 몰랐던 것을 알 거란 기대를 할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 그건 내가 하지.”
문제가 있다면 신현태도 정확히 뭐가 원인인지 아직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현종이 어제 변죽만 잔뜩 울려 놓은 채 자신을 내보냈기 때문이었다.
알아서 컨퍼런스 시간 동안 고쳐 주겠다는 말을 한 게 힌트라면 힌트일 따름이었다.
‘원인만 알면 치료가 바로 된다는 건데.’
그게 시바, 대체 뭘까.
신현태는 속으론 욕을 씨불이면서, 하지만 겉으론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근거가 있다면…… 항생제 사용과 무관하게 진행하는 엑스레이 소견이겠지. 심장…… 심장 원인이라고 계속 보기엔 무리가 있어서, 폐 쪽을 중점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래.”
“감사합니다. 그럼 원인은 뭐가 있을까요? 자가 면역?”
“음.”
자가 면역이라.
좋은 옵션이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분명 컨퍼런스 동안 고쳐 준다고 했어.’
현종이 형이, 저 인간이 아주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의학적으로 틀린 얘기 하는 사람은 또 아니지 않은가.
결정적인 힌트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자가 면역은 제해도 좋았다.
이놈의 자가 면역 질환들은 보통 치료가 드럽게 어려웠으니까.
원인을 감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개 그냥 그게 시작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 말이었다.
해서 입을 열지 않고 있으려니, 수혁이 입을 열었다.
[아미오다론, 아미오다론이 약제 유발성 폐 질환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양상도 똑같아요. 양측 폐를 균일하게 침범하면서 영상의학적 소견에 비해 양호한 임상 소견. 최근 증량했다면, 100%입니다.]
방금 바루다에게 마침내 들은 결론을 떠올리면서였다.
“약물에 의한 폐 손상은 가능성이 없겠습니까? 가령 아미오다론 같은?”
“와우!”
그 순간 옆에 있던 이현종이 껄껄 웃으며 박수를 쳤다.
기립 박수였다.
어느새 일어서 있었다.
그냥 치기만 한 게 아니라, 뒤도 돌아보고 옆도 보고 했기 때문에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도 반강제로 일어나서 박수를 쳐야 했다.
“와아…….”
어색한 환호성을 질러 가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