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88화 (188/1,303)

188화 뭐여 이게 (4)

“아미오다론…….”

신현태는 수혁에게 들은, 친숙하기만 한 약 이름을 되뇌었다.

세상에 아미오다론이라니.

어찌나 유명한 약인지 굳이 내과 의사가 아니더라도 익숙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미오다론 유발성 폐 손상’이라는 질환명도 익숙한 사람은 많지 않을 터였다.

이건 심지어 내과 의사라 하더라도 그럴 수 있었다.

수련 환경에 따라서는 아예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할 수도 있을 정도로 드물었으니까.

‘그래…… 아미오다론이…… 폐 손상을 일으킬 수 있지.’

하지만 신현태는 태화 의료원 내과 과장이었다.

비록 세부 분과가 호흡기나 순환기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 질환명을 처음 접해 보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컨퍼런스를 왜 열겠는가.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또 배우라는 취지에서 여는 것일 터였다.

‘엑스레이상 경과도 맞아. 아미오다론은 단 한 번도 끊은 적이 없었으니까…… 계속 악화됐겠지. 그것도 양측이 균일하게. 약에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허.’

진단명이 없을 땐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더니.

진단명을 듣자마자 모든 증상과 모든 단서들이 단 한 가지 진단명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만약 자기 케이스가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이현종처럼 저기 마음 편히 서서 박수 치고 있는 입장이었다면 껄껄 웃었을 터였다.

바로 이게 내과 하는 맛이지 하면서.

하지만 지금 신현태는 단상 위에 서 있었다.

‘고맙다, 수혁아.’

수혁이 우연히 이 약물 이름을 흘렸을까.

신현태에게 받아먹으라고 준 것이 분명했다.

다른 레지던트나, 심지어 펠로우라 해도 이런 생각을 하기 어려웠겠지만.

상대는 수혁이지 않은가.

저 똑똑하면서 기특한 녀석은 충분히 이게 가능한 놈이었다.

“음, 아미오다론 인듀스드 렁 인저리 가능성이 있죠. 환자 문진을 통해 혹 아미오다론을 최근 증량했는지 확인하고 해당 사항이 있다면 투약 중단 후 스테로이드를 쓰는 게 좋겠습니다.”

“네, 제 의견과 같습니다. 제 질문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음.”

신현태는 여전히 간간이 울리는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 앉는 수혁을 보며 허허 웃었다.

설마하니 이걸 케이스만 보고 답을 알아낼 줄이야.

이거 하나 가지고 뭐 수혁이 자신보다 뛰어난 의사가 됐네, 어쩌네라는 말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음은 확실한 일이었다.

수혁이 신현태 나이가 되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마 이현종이라 해도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게 뻔했다.

“야, 수혁이가 착하지?”

감히 수혁 뒤로 손을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컨퍼런스 자리엔 꽤나 많은 교수가 와 있었음에도 그랬다.

우선 신현태에게 시비 터는 모양새가 되는 걸 두려워했고.

또 수혁보다 더 의미 있는 질문이나 코멘트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던가.

해서 컨퍼런스는 순식간에 종료됐다.

“착하지, 그럼. 형보다 훨씬 낫지.”

신현태는 컨퍼런스가 끝나자마자 어깨동무를 건 채 실실 웃기 시작한 이현종을 저만치 밀어냈다.

체격 차이가 꽤 있어서 뒤로 훅 하고 밀려났지만.

이현종은 여전히 실실거렸다.

“우리 현태, 멀었다. 멀었어. 형한테 좀 배워. 어떻게 다시 주말 스터디 할래?”

주말 스터디 운운하면서였다.

신현태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주말 스터디라니.

레지던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공부하는 시간을 일컫는 말 아니던가.

그 단어를 입에 올린 거 자체가 10년도 넘은 거 같았다.

“와……. 이거 하나 몰랐다고. 그리고 나도 오늘 CT 찍을 생각이었어. HRCT. 그럼 보이긴 했을걸? 어차피 찍어야 되잖아.”

“뭐 GGO 패턴 보려고? 그야 그렇긴 하지만 나는 안 보고도 맞췄는데? 내가 너 차기 원장감으로 보고 올린다고 했는데 실력 차이 이거 어쩔 거야.”

“와……. 형 나, 와. 나 이번에 내가 진짜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기 싫은데.”

“뭐, 우리 현태 뭐. 아미오다론 모르는 현태, 뭐.”

벌써 새로운 별명까지 지어 버린 모양이었다.

기억력이 나쁜 양반이라면 모르겠는데.

이현종은 20년 전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까지 죄다 잊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그게 이현종 인생에는 보탬이 되었을지 몰라도, 신현태 인생에는 아니었다.

아마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신현태는 말을 이었다.

자못 진중한 얼굴을 하고서였다.

“나 이번에 감염내과 분과학회에서 연구자 상 받아. 알죠? 이거 받기 어려운 상인 거. 내가 정문현 제꼈다, 이번에.”

“어? 문현이 죽었어? 그래서 네가 받나?”

“이 양반이 진짜 돌았나. 걔가 죽기는 왜 죽어. 얼마나 건강한데. 얼마 전에 이제야 결혼할 생각 들었다고 여자 소개시켜 달라고 했다니까.”

“문현이 50 넘지 않았냐?”

“나보다 두 살 어리니까 넘어도 꽤 넘었지.”

“그럼 돌았나……? 그래서 네가 받나?”

신현태는 하마터면 주먹으로 원장이자 5년 선배인 이현종의 얼굴을 후려칠 뻔했다.

어찌 된 인간이 의학보다 깐족거리는 게 더 빨리 느는 느낌이었다.

“아, 교수님. 어려운 케이스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풀어 준 것은 역시나 수혁이었다.

[잘한다. 그래요, 이렇게 아부하라고. 그래야 교수 되지. 펠로우 없이 한번 되어 봅시다.]

예전에는 이런 수혁을 보면 어지간히 지랄했을 바루다였지만.

이미 세태와의 야합을 마친지도 오래지 않은가.

이젠 놀리기는커녕 응원하고 있었다.

펠로우 없이 교수라니.

그럴 만한 이슈긴 했다.

적어도 20년 전에나 가능했던 일이었으니까.

“어, 어. 아니야, 수혁아. 야, 너 대단하더라. 그거 어떻게 알았냐.”

“우연히 최근에 공부한 것 중에 그게 있었어요.”

“우연은 무슨. 모르면 안 되는 거지. 내과 의사가.”

“형은 좀 닥칠래요? 나 슬슬 열 받는데.”

“어……. 야, 주먹은 풀고 얘기하자. 나 원장이야. 이현종, 네 선배.”

“그래, 아니까. 이제 그만하시라고. 알죠? 나 힘 좋은 거.”

신현태는 푸근한 인상과 관계없이 단단한 체격으로도 유명한 위인이었다.

조태진처럼 태산 같은 느낌이야 들지 않았지만.

솔직히 이현종 정도는 뭉개 버릴 체격이었다.

“어, 그래도 나 너무 놀리고 싶은데.”

“아 그럼 사람 좀 없을 때 하라고. 하다못해 수혁이 없을 때.”

“참기 어려워. 알잖아, 너도.”

“하아…….”

물론 이현종이 그런데 굴할 위인은 아니었다.

예전 수혁처럼 칼로 찌를 위험이 느껴진다면 또 모를까.

신현태는 인격자이지 않은가.

절대, 정말 절대라는 단어를 써도 좋을 만큼 신현태가 자신을 칠 가능성은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슬프게도 언제나 보답했다.

“에이, 밥이나 먹으러 가요.”

“그래. 그…… 저기 삼성역 사거리에 기가 막힌 식당 있던데. 거기 백으로 예약했거든. 거기 가자. 수혁아 너도 가자.”

“네? 저는…….”

수혁은 망설이면서 조태진 쪽을 바라보았다.

안대훈과 얘기 중이었는데, 아마 병동 환자에 대해 토의하고 있는 듯했다.

이현종은 하잘것없단 표정을 지으며 손을 가로저었다.

“원장이랑 과장이랑 먹으러 가는데 누가 뭐라고 해. 이것도 일이야, 일.”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내과에서 보면 최고 실세 둘이랑 나가는 길 아닌가.

누가 막으면 그게 미친 짓이었다.

“아, 맞아.”

해서 따라나서려는데 신현태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의학에 관한 관심이나 남 놀리는 거, 골프 말고 또 하나 좋아하는 걸 뽑으라면 주저 없이 식도락을 뽑는 이현종은 짜증이 났다.

겨우겨우, 진짜 한 달 전에 예약해야 되는 식당 환자 백으로 어렵게 예약했는데 자꾸 딴지를 거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신현태도 제법 고집이 있는 인물이지 않은가.

게다가 환자가 끼어 있으면 그 고집이 배가 되었다.

“나 병동 갔다 가야지. 오늘 컨퍼런스 낸 환자…… 처방도 내야 되고.”

“아, 그거.”

이현종도 환자 생각은 끔찍하게 하는 양반이었다.

오죽하면 이현종이 진짜 개빡치는 걸 보고 싶으면 환자 개판으로 보라는 족보도 돌까.

하지만 이현종은 이번에도 하잘것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컨퍼런스 시작하기 전에 펠로우한테 다 전달했어. 처방은 내가 직접 냈고.”

“뭐라고요? 벌써 냈다고?”

“그럼. CT도 찍었어. 이거 봐.”

“와……. 이 형 그럼 진짜 컨퍼런스 나 깔라고 한 거야?”

“뭘 까, 까기는. 수혁이가 못 맞혔으면 깠겠지. 근데 맞혀서 안 깠잖아. 잘 넘어갔구만, 뭘.”

“와……. 오늘 가는 식당 맛없기만 해, 아주. 이제 형이랑 골프 안 쳐.”

“너 그 말, 올해만 벌써 열 번 넘게 한 거 아냐?”

“이번에는 진짜야.”

신현태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발걸음은 주차장을 향했다.

아무래도 과장이다 보니 자리도 좋은 곳을 배정받았는데, 레지던트들은 병원도 아니고 멀리 떨어진 장례식장 주차장마저도 가위바위보로 선점해야 하는 것에 비하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입구 근처였다.

[다리가 불편한 수혁으로서는 출세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요?]

‘일단 차부터 사고 말해야지.’

[면허도 없지 않습니까? 동기 분석을 해 본 결과 없는 사람은 수혁뿐이더군요. 있는 면허라고는 의사 면허 한 장.]

‘시, 시비 털지 마.’

수혁은 투덜거리며 차 뒷좌석에 탔다.

과장이 운전한다는데 빨리 타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와는 달리 이현종은 한마디를 하고서야 차에 올랐다.

“야, 이거 병원엔 안 끌고 오는 차 아냐? 뭔 벤틀리를 끌고 왔어. 원장 자리 탐나니까 이제 티 내려고? 금수저에 장가도 잘 간 거?”

“아니, 뭔 소리야. 차 고장 나서 수리 맡겼어요.”

“국산 차는 잘 고장 난다 이거냐?”

“말이 왜 그쪽으로 튀어. 그냥 고장 나서 집에 있던 거 몰고 왔다고.”

“집에 있던 게 벤틀리라니. 원장 해서 뭐해. 나도 연구 설렁설렁하고 장가나 잘 갈걸.”

“형, 형은…….”

신현태는 형은 연구 안 하고 연애에 매진했어도 노총각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하려다 참았다.

이현종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까 뒷자리에 그 비슷한 처지에 있는 녀석이 멀뚱히 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태진 통해서 들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지만.

처음엔 우하윤에게 대시도 좀 하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우하윤은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을뿐더러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긴 한 거 같은데.

방식을 듣고 나자마자 딱 감이 왔다.

아, 얘는 어쩌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인생에 이성이 끼어들 여지가 적겠구나.

‘정 안 되는 거 같으면 내가 코치하지, 뭐.’

신현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을 다물고 운전석에 올랐다.

당연히 이현종은 기분이 그리 좋지 못했다.

“형은 뭐 인마. 너 뭐라고 하려고 했어.”

“응? 내가 뭘요.”

“너…… 형, 형은이라고 하고 말았잖아. 엄청 안쓰러운 얼굴이었어, 아까?”

“기억 안 나는데. 내가 이래서 연구를 못 하나.”

“이 자식, 이거.”

“치지 마요. 안쓰러워. 옛날에는 형이 때리면 그래도 아팠는데 이제 안 아프거든. 왜 그렇게 늙었어.”

“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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