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89화 (189/1,303)

189화 본격적으로 (1)

도착한 곳은 삼성역 근처 대한은행 VIP 전용 PB가 있는 건물이었다.

밖에선 아무리 봐도 식당 이름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애초에 아까 이현종이 말해 준 이름도 식당 같아 보이진 않았다.

“모서리우가 뭐야, 대체. 없잖아요. 형, 여기 맞아? 아까 내가 늙었다고 해서 삐진 거야?”

신현태는 차에서 머리만 뺀 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래 봐야 보이는 건 없었다.

그저 은행만 보일 뿐이었다.

“없는…… 억, 왜 당겨?”

“쪽팔리게 이러지 말자. 처음 오는 사람 같잖아.”

“난 처음 왔어. 어? 설마 형은 와 본 적 있어?”

“있지.”

“헐. 나 두고 혼자?”

“우리 둘이 사귀냐? 왜 그런 눈으로 봐. 상처받은 눈 하지 마. 야, 진짜 후비고 싶어. 그만 봐.”

이현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사이 건물 근처에 서성이던 관리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경비원 차림이 아니라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 신현태는 처음엔 관리인인 줄도 몰랐더랬다.

“어떻게 오셨어요?”

낮고 중후한 목소리.

신현태는 잠시 당황했다.

어떻게 왔더라?

식당 이름이 이상하니 벌써 가물가물하지 않은가.

“어휴, 이…… 여휴.”

이현종은 그런 신현태에게 속으로 욕을 주워 넘기곤 대신 나섰다.

“모서리우. 모서리우 왔어요.”

“아……. 네. 키 주시면 주차하겠습니다.”

“오.”

신현태는 발렛이 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게 촌놈으로 보일까 걱정된 이현종은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래 봐야 별 소용이 있진 않았다.

이제 이현종의 손가락은 신현태의 두꺼운 옆구리에 손상을 주기엔 너무 얇았으니까.

게다가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와……. 벤틀리 플라잉스퍼…… 여기서 일하면 가끔 본다고 듣기는 했는데…….’

타고 온 차가 워낙에 고가의 차량 아닌가.

관리인은 이미 차량에 정신이 팔린 지 오래였다.

[흐음. 이게 하차감이라는 것인가.]

그뿐만 아니라 길 가던 다른 이들도 한 번쯤은 시선을 주었다.

이제 강남에서는 벤츠도 소나타란 말이 나올 정도로 흔해진 마당이지만.

여전히 벤틀리는 희소성이 있지 않은가.

사채를 쓰건 뭘 하건 살 수 없는 가격의 차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플라잉 스퍼는 그중에서도 윗급.

주목받는 건 당연했다.

‘그렇네, 이게 하차감이네. 요새는 이게 제일 중요하다던데.’

[승차감이야 거기서 거기죠. 이건 얼마나 하죠?]

‘데이터 정리 안 해 놨어?’

[가뜩이나 할당된 뇌용량도 적은데 어떻게 차 가격까지 합니까?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꼭 이렇게 싸가지 없이 말해야 하는 걸까.

수혁은 그러면서도 핸드폰을 들어 차량 가격을 검색했다.

‘시바, 4억이 넘어?’

[수혁 월급을 100번 타도 못 사는군요.]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멀어 보이네.’

[어허, 먼지 묻지 않게 하세요. 천천히 닫고. 저당 잡힌 몸에 메인 기계가 되고 싶진 않군요.]

예전 같았으면 4억 아니라 40억이라 해도 별말이 없었을 텐데.

이미 자본주의에 찌든 지 오래인 바루다는 행여나 저 귀하신 차에 누가 될까 수혁을 조심시켰다.

그사이 이현종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는 건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부숴라, 부숴.”

신현태의 불만을 뒤로하고서였다.

[차 가격을 알아서 그런가 구시렁거리는 모습도 어쩐지 있어 보이는군요.]

‘그러게. 지금까지 보던 중 제일 멋지네.’

[조태진 교수님 차보다 이게 더 비싸죠?]

‘비교도 안 되지.’

[이게 과장과 평교수의 격의 차이인가.]

‘아니……. 그건…….’

대학 병원 과장이라고 해서 다 벤틀리를 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수혁이 알기로 다른 과 과장님들 중에서 외제 차 타는 사람도 드물었다.

사람들 생각과는 달리 대학 병원 의사들은 돈 보고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 빨리 와. 늦었어.”

“알았어요. 알았어. 아니 뭐, 수술 잡았어? 식당 가는 데 왜 이렇게 호들갑이에요. 우리 수혁이 다리도 불편한데. 수혁아, 괜찮냐?”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나쁜 놈 같잖아. 미안하다, 수혁아.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왜 이렇게 서두르냐고.”

“하이 엔드급 식당은 식당이 갑이여, 이놈아. 돈 내는 놈이 아니라. 명품 몰라? 안 사 봤어?”

“사 보긴…… 사 보긴 했죠.”

신현태는 기본적으로 소박한 인간이었다.

부잣집에 태어나 진짜 부잣집에 장가를 갔음에도 그랬다.

해서 본인 의사로 명품을 사 본 적은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최근 장인이 더 높은 자리로 영전하면서 취임식에 참가하게 된 일 때문에 백화점에 갔더랬다.

세상에 돈을 쥐여다 준 데도 물건이 없어서 못 살 줄이야.

심지어 줄까지 서서 들어가야만 했다.

우리나라에 돈 많은 사람이 이토록 많은지 그날 처음 알았다.

“원래 이런 건 공급자가 갑이여. 내 진료 같은 개념이지.”

“잘나가다 좀 이상해지는데. 형은 진료 거부권도 없잖아. 돈 내면 다 보지. 그리 큰돈 드는 것도 아니고. 형이나 나나 외래 진료 수가 같은 거 몰라요?”

“예약이 돼야 보지, 인마! 액수가 중하니? 내 진료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명품 진료야, 명품.”

“네네. 알았어요. 알았어. 근데 오늘 왜 이렇게 흥분…… 어.”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아까 관리인이 말했던 옥상에 닿은 참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신현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에 서 있는 사람 중 눈에 익은 사람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오, 신 과장님? 전에 최 사장님 취임식에서 뵀었죠? 반갑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취임식에서만 본 건 아니었다.

‘이 사람 분명히…… 김다현 이사 측근이었는데. 남윤석 부장…… 이었나?’

놀라고만 있는 신현태와는 달리 이현종은 껄껄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눴다.

“남 이사님. 반가워요. 어째 더 젊어지셨어?”

“하하, 원. 별말씀을요. 원장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

“약속 있어서 왔죠. 종종 옵니다. 아는 사람 만날 줄은 몰랐네.”

“저도 그렇습니다.”

평소 이현종의 모습이 아니었다.

철저한 태화 의료원의 원장 그 자체였다.

신현태는 그제야 이 자리가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이 형…… 진짜 수혁이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구나.’

남윤석.

원래 전자 부장으로 있다가 김다현 이사와 김범준 부사장 입김으로 태화 생명 이사로 날아온 인물이지 않은가.

그냥 날아오기만 한 게 아니라 서 이사를 날려 버리면서 온 참이었다.

지금은 실세 중의 실세라고 보면 되었다.

아직 이현종 임기가 남아 있긴 했지만.

아무튼, 차기 원장 및 신임 교원 임용에 대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프라이빗한, 밖에 이름도 안 쓰여 있는 식당에 왔는데 우연히 마주쳐?

이걸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바보였다.

“하하, 남윤석 이사님. 신현태 과장입니다. 일전에 태화 전자 연구 용역 건으로 뵀죠?”

생각을 갈무리한 신현태는, 역시나 이현종처럼 사무적인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평소 이현종이나 수혁 앞에서 보여 주던 모습과는 천지 차이였다.

물론 남윤석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소위 비즈니스 관계로 만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이 정도 선은 지켜 줘야만 했다.

“네. 맞아요. 그때 처음 뵀죠.”

“김다현 이사님은 잘 지내십니까?”

“그럼요. 하하. 잘 지내죠. 근데…… 저쪽 분은?”

남윤석 이사는 뒤에 서 있는 수혁을 가리켰다.

암만 봐도 이런 자리에 오기엔 지나치게 어려 보이는 친구였다.

물론 수저 잘 물고 태어난 친구들은 여기서 더 어릴 때 생일 파티도 하긴 하지만.

‘글쎄…….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그렇게 자란 사람은 어떻게 해도 티가 나는 법이었다.

딱히 무례하다거나 건방져 보인다는 게 아니었다.

워낙 김범준 부사장의 심복으로 살아온 남윤석은 뭐라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느낌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 이 친구가 바로 이수혁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이수혁?”

이현종의 말에 남윤석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들은 기억은 있었다.

이거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20대 청년을 기억하고 있다니.

당장 산적한 과제 중 굵직한 것들만 해도 장난 아니지 않은가.

기업 지분 지배 구조와 같은 전체 계열사에 속한 일부터 해서 태화 생명 체질 개선과 같은 지금 속한 회사에 관한 일까지.

“네, 제 아들인데…… 지금 레지던트 3년 차 됩니다. 저번 연구 용역 계획서를 낸 장본인이기도 하고요. 김다현 이사님도 이 친…… 제 아들이 치료했죠.”

‘형…….’

신현태는 감히 이사 앞에서도 거짓부렁을 늘어놓고 있는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눈물을 훔칠 뻔했다.

태화가 어떤 기업인데 그 앞에서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어지간한 국가 기관보다도 정보 수집에 능하단 말이 있던데.

‘그보다…… 형 진짜 원장으로 끝낼 거야?’

이미 석좌 교수까지 받은 몸이라 계속 병원에 있을 거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현종은 형이라 불러도 되나 싶을 정도로 세계 의학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지 않은가.

영미권 사람이었으면 벌써 노벨 의학상 받았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까지 나돌 지경이었다.

그게 그냥 태화에서만 하는 얘기가 아니라 국제 순환기 학회에서도 심심하면 나왔다.

욕심 조금만 더 부리면 정계 진출도 꿈은 아니란 얘기였다.

근데 본인 입으로 없는 혼외 자식을 만들고 다닐 줄이야.

“아, 아! 그 이수혁 선생이군요.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남윤석입니다.”

“네, 이사님. 이수혁입니다. 반갑습니다.”

“하하, 이거 미리 인사를 드렸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김범준, 김다현 부녀의 대를 이어 심복 노릇을 하고 있는 남윤석은 수혁의 손을 꽉 잡은 채 흔들었다.

그리곤 이현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드님이시라고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서류상으로는 가족이 없다고 되어 있었는데.”

“하하.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훌륭한 아드님이신데요, 뭐. 그럼 이렇게 세 분 식사하러 오신 건가요? 자리는……?”

“안내받아 봐야 압니다. 기다리게 하네요.”

“여기가 그렇죠, 뭐. 그래도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부터는 접객부터 맛, 음식을 대하는 태도까지 전부 최고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죠.”

사실 여기 이름이 모서리인지 뭔지 헷갈리기는 이현종도 마찬가지였다.

딱 한 번 와 본 게 다라 이건데.

그럼에도 익숙한 척 모르쇠를 치고 있었다.

아까 정해 둔 설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현종 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잠시 더 서 있으려니, 직원이 이현종과 신현태 그리고 수혁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도 으리으리하더니 안은 더 했다.

커다란 샹들리에에 금고를 형상화한 건지 뭔진 모르겠지만 화려한 벽 장식들까지.

“이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배정된 자리는 공교롭게도 남윤석 이사 옆이었다.

이현종은 아직 비어 있는 그의 옆자리를 힐끔 보고는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신현태에게 속삭인 것은 그다음이었다.

“오늘 여기 태화 생명 이사장…… 그러니까, 김병준 사장 온다. 몰랐는데, 가끔 온다네?”

“허……. 그럼?”

“뭐 하고 있어, 자리 옆으로 가. 수혁이 저쪽으로 앉혀. 눈도장 찍어야지.”

“아,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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