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90화 (190/1,303)

190화 본격적으로 (2)

얼마 후, 김병준 사장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칠성 생명과 엎치락뒤치락하는 국내 보험사 서열 1, 2위 회사의 경영인이라는 걸 감안하면 수행원이 열 명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는데.

김병준 사장은 혼자였다.

‘흠, 김병준…….’

신현태는 아는 얼굴이었다.

그 또한 다른 실세의 아들이자 사위이지 않은가.

따로 가족 모임에서 본 적도 있었다.

태화랜드가 괜히 1년에 한 번 쉬겠는가.

임직원이 아니라 임원들과 그들 자녀를 위한 행사 때문이었다.

“어, 미안. 차가 밀려서 늦었네.”

김병준은 코트를 벗으며 남윤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남윤석은 부리나케 일어나 그의 코트를 받아 직원에게 건넸다.

딱히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냥 알아서 기는 것이었다.

“저도 금방 왔습니다.”

“하하, 자네는 늘 그러더라. 이것도 받아.”

“이건……?”

“김범준 부사장님이 와인 보내 주셨어. 엄청 좋은 거래.”

“아……. 네네.”

와인이라는 말에 이현종이 슬쩍 병을 들여다보았다.

술에 조예가 아주 깊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위가 지위다 보니 홀짝거린 와인만 수십 병은 족히 넘어갔다.

그것도 꽤나 가격이 있는 것들뿐이었는데, 그중에 지금 김병준 사장이 들고 있는 것만큼 비싼 와인은 없었다.

“로마네 꽁띠야. 셰프님이 이건 콜키지도 안 받겠다더라. 이거랑 마리아주가 맞으면 영광이라고.”

“아하, 이게 그 유명한…… 로마네 꽁띠군요.”

로마네 꽁띠는 빈 병만도 팔 수 있는 그런 와인이었다.

몇천 원에 파냐가 아니었다.

단위가 달랐다.

병만 수십만 원을 호가했다.

안에 든 와인은 빈티지에 따라 달랐지만, 보통 천만 원은 우습게 넘었다.

“음.”

그렇다 보니 이현종마저 잠시 자신의 본분을 잊고 병을 바라보았다.

김병준 사장은 또 누가 이렇게 이 와인의 진가를 알아보나 해서 뒤를 돌아보았고.

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이현종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이, 이현종 원장님?”

지위만 놓고 보면 반말을 해도 어색하지 않을 터였다.

태화 의료원은 태화 생명에서 100% 자본금을 출자해서 만든 비영리 법인이었으니까.

이를테면 태화 생명이 번 돈으로 굴러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말이었다.

물론 하다 보니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쥐어짜고 또 쥐어짜고 흑자 또는 최소한의 적자 경영으로 만들어 놓긴 했지만.

아무튼, 상하 관계가 명확한 조직이었다.

“어, 네. 사장님. 하하.”

하지만 김병준 사장은 불세출의 기인이라 할 수 있는 이현종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해 왔다.

어떻게 버는 돈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태화 생명 사장을 하면서 병원 일에 관심을 품게 된 후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볼 때 이현종은 아무리 경영에서 개판을 친다 해도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뭐 그래도 좀만 더 열심히 흑자 내주면 좋겠지만.’

그런 얘기를 공적인 자리도 아닌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꺼낼 만큼 정신 나간 사람은 아니었다.

“네, 하하. 여기서 이렇게……. 바로 옆자리에서 뵈니까 더 반갑네요. 원장님.”

“네. 허허. 이거 참. 이런 우연이.”

반면 이현종은 좀 민망했다.

그렇게 회의 좀 오라고 해도 안 가고 튀기 일쑤였는데.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까지 쫓아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그게 가짜 자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이현종은 수혁에게 잠시 눈길을 주고는 다시 김병준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김병준 사장은 코트를 맡기고 자리에 앉았다.

바로 수혁의 옆 옆자리였다.

“저희 아들놈 얘기 들으셨죠. 얘가 이수혁이라고 제 아들입니다, 하하.”

이현종은 그런 수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 양반 오늘 좀 이상한데.]

바루다는 그런 이현종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아무래도 깡통보다는 인간 사회에 밝은 이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움을 눌러 담으면서였다.

‘괜히 그러시겠냐, 인마.’

수혁은 바루다에게 핀잔을 날린 후,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수혁입니다.”

“오, 오…… 아, 이 친구가 그…… 그 이수혁이군요.”

김병준 사장은 수혁을 바라보다가 이내 남윤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얘기 나왔던 그 친구가 맞냐는 눈을 하고서였다.

눈치 빠른 남윤석 이사는 허허 웃었다.

“일전에 전자 김다현 이사님 진단하고, 치료해 주신 선생님이죠. 얼마 전엔 전자 용역 연구도 맡아서 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진짜…… 이렇게 보니까 아직 어린 데 대단하네요.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뭐, 제 아들이라 그런지 똑똑합니다. 하하.”

“내과면…… 어느 분과를 선택하실지?”

김병준은 의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에 회의에서 이것저것 듣다 보니 대학 병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강 알게 된 지 오래였다.

모르긴 해도 어지간한 의대생들보단 잘 알 터였다.

“그건 뭐 아직 모르겠는데. 뭘 해도 지금 당장 교수시켜 줘도 좋을 정도로 잘합니다, 이놈이.”

이현종은 마침 질문 잘했다는 얼굴로 잽싸게 대꾸해 왔다.

‘형,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신현태는 살짝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현종은 당당하기만 했다.

다행히 김병준은 사회생활 내공도 뛰어난 데다가, 이현종의 사람 됨됨이를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그저 조금 놀랄 뿐이었다.

‘자존심…… 진짜 대단하던데.’

김병준 사장은 이현종 원장 취임 이후 있었던 2번의 신규 임용 회의를 떠올렸다.

보통 신규 임용은 병원 측에서 50명을 부르면 이사회에서 절반을 자르는 식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었다.

병원은 의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이사회에서는 비용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현종이 취임한 이후에는 양상이 딱 그 정반대가 되었다.

제발 더 뽑으라는 말에도 이현종은 고개를 저었다.

바보를 교수로 뽑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근데 이수혁이라는 친구는 교수 시켜야 된다고 하네. 레지던튼데.’

실력이 정말 대단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아들 사랑이 대단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뒤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밀려나 있던 신현태가 입을 열었다.

병원에서와는 달리 아주 진중한 얼굴을 하고서였다.

“안녕하세요, 김병준 사장님. 저 신현태입니다.”

“오, 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신 과장님이셨구나. 얼마 전 최 사장님 취임식에서 봤죠?”

“네. 하하. 아버님하고도 따로 보셨다고요?”

“어어, 그렇죠. 신 이사님하고도 봤죠. 이번에 무선 이어폰 그거 신 이사님 아이디어였다고 하던데. 참 대단해요. 저도 아주 잘 쓰고 있습니다.”

김병준 사장은 껄껄 웃으면서 태화 임원들은 쓰든 안 쓰든 가지고 다니는 은하수 폰을 슬쩍 내보였다.

일종의 충성 서약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사실 업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긴 했다.

태화 계열 전체가 이걸로만 소통이 가능한 앱들로 채워져 있었으니까.

심지어 수술실에서 아이폰은 안 터진다는 괴담도 있었는데, 몇몇 레지던트들이 확인해 본 결과 사실이었다는 말이 있었다.

“제가 전해 드릴게요. 좋아하시겠네요.”

아무튼, 신현태는 사람 좋은, 예의 그 보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보고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미소였다.

“죄송해요, 저희 원장님이 좀 팔불출이라.”

“아뇨, 아뇨. 죄송할 건 없죠. 하하. 자식 자랑이야, 뭐. 늘 하고 싶은 거 아니겠어요?”

“근데 사실 저도 어디 가면 얘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긴 합니다.”

“오……. 그래요?”

과도한 자랑에서 다른 방향으로 화제를 전환하려나 했는데.

이제 보니 그런 시늉만 하고 다시 급발진이었다.

김병준은 이제 정말로 호기심 어린 얼굴이 되었다.

이현종이나 신현태나 어디 가서 쓸데없는 소리 할 만큼 시간 많은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대체 얘가 어떻길래 이래?’

신현태는 김병준 사장의 얼굴에 관심이 도는 것을 확인한 후, 아까부터 망설이던 멘트를 꺼냈다.

교수 된 입장에서 정말이지 자존심을 내려놓는, 그런 말이었다.

“어유, 말도 마세요. 오늘 컨퍼런스에서는 제가 모르는 걸 얘가 맞혔다니까요?”

“네? 에이…….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믿기지가 않는 말이었다.

수혁은 원래도 어리지만, 심지어 나이보다도 더 어려 보여서 어떻게 봐도 애송이였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신현태는 생긴 것도 그렇고 학회 내 위치도 상당한 사람이었다.

둘을 비교하려는 건 실례라 여겨질 지경이었다.

“아아, 진짜예요. 진짜로 그랬어요.”

그리고 제대로 된 동료라면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해도 눈 감아 주는 게 예의일 터였다.

하지만 이현종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수혁을 밀어주러 나온 자리가 아니라 정말 우연히 만난 자리라 해도 이랬을 터였다.

“어, 진짜로요?”

“네. 그렇다니까요.”

“흐음……. 어떻게…… 흐으음…….”

김병준은 다시 수혁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그런데 원장에 과장까지 쌍으로 끼고돌면서 띄워 주고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비싼, 일 인분에 25만 원짜리 식당에까지 데려와서.

‘아들…… 아니잖아?’

게다가 김병준은 이현종이 아들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태화가 어떤 기업인데 병원 원장이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을 검증도 안 해 보겠는가.

그 결과 본인 입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건 맞는데, 실은 아니라는 걸 알아낸 지 오래였다.

굳이 그걸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뭐 둘이 누구 죽였는데, 얘만 알고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둘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설령 그렇다 해도 아들을 왜 사칭한단 말인가.

그것도 이수혁이라는 친구가 아니라 원장이 직접.

실력이 레지던트급을 아득히 뛰어넘었다고 봐야 했다.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가 가는데, 그래도 가슴으로 납득이 되진 않았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애들 뽑아서 굴려 봐야 신입은 신입이지 않은가.

‘아니, 지 입으로 그랬잖아?’

게다가 이현종이 그런 적도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1년 차도 2년 차 못 이긴다고.

“어이구, 우리 보물 이거.”

그사이 이현종은 수혁의 볼을 꼬집으며 계속 주접을 떨었다.

김병준을 비롯한 계열사 주요 임원들은 이미 수혁이 아들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였다.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명색이 원장이라는 사람이 체면을 잃고 이러고 있는데 아무 소용이 없다면 그것도 좀 슬픈 일 아니겠는가.

“그…… 그럼 벌써 미국은 다녀왔나요?”

두 어른, 그러니까 현직 원장과 아마도 차기 원장이 유력한 양반 둘이 야단법석인데 뭐라도 던져 주긴 해야겠단 생각이 든 김병준 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둘은 또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그럼요. 거기 가서도 어유, 말도 마요. 파이자에 초청을 받았다니까? 저는 얼마나 잘하면 그러나 상상도 안 가요, 어휴.”

“그러니까. 병원에서도 뭐 전설이 왔네, 어쩌네. 어유, 내가 다 부끄러워서. 하하.”

김병준은 이제 제발 이 지랄을 끝내고 먹기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태화가 두바이에 병원 짓는 거 알고 계시죠?”

“어…….”

“그러니까 회의 좀 들어오세요, 원장님.”

“그, 미안합니다.”

“아무튼, 정식으로 오픈 전에 왕족들…… 와서 진료를 본대요. 알죠? 걔네 왕족 많은 거. 다음 주 중으로 공문 보내서 지원받으려고 했는데…… 거기 한번 보내 보면 어때요? 메인은 말고, 서브로.”

“어이구, 좋죠.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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