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쉽게 확신하지 마 (1)
[맛이 아주 좋더군요.]
바루다는 상당히 흡족했는지, 오래된 팝송까지 흥얼거렸다.
흥얼거린다기보다는 수혁의 머릿속에 재생한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로 선명한 음악 그 자체였는데, 수혁으로서는 딱히 거슬리진 않았다.
어차피 바루다가 아는 노래는 전부 수혁이 들어 본 노래뿐이지 않은가.
취향이랄 것도 없는 놈이라, 수혁이 제일 많이 듣는 노래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청력 손상 걱정도 없고, 배터리 걱정도 없는 오디오 하나를 늘 품고 다닌다고 보면 되었다.
‘응, 좋더라. 특히…… 난 솥밥이 좋았어. 곰탕도 녹진하니…… 아주 좋더라.’
[고기도 좋더군요. 뭔 장난질을 쳤는지는 몰라도, 맛이…….]
‘생각해 보면 당연히 맛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가격이 얼만데.’
[인당 25만 원. 그거 한 열 번 먹으면 수혁 월급이 살살 녹겠군요.]
‘자꾸…… 자꾸 그런 식으로 어두운 현실 느껴지게 할래?’
[어둡지는 않죠. 국내 평균보다 수혁의 월급이 더 높습니다.]
‘시급으로 하면?’
[시급은…… 계산하겠습니다. 8000원 정도 되는군요. 소수점은 의미 없으니 제했습니다.]
‘아주 낮진 않네, 그래도.’
선배들 얘기 들어 보면 그땐 짜장면 하나 먹기 힘들었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주당 근무 시간이 100시간가량으로 내려오면서 많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딱히 위안이 되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도 집이 아닌 병원에 누워 있었으니까.
[이런 시간은 근무 시간에서 빼고 있는 거 아닙니까?]
‘어쩌겠어. 나도 3년 차 되면 나가서 공부해야 되는데. 그 시간 미리 땡겨서 일하는 거지.’
[노동부에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교수 못 되고, 내과 전문의도 될 수 있을까 말까 같은데.’
[입 다무셔야겠네요.]
‘어……. 그렇지. 그렇긴 한데.’
기계면 누구보다 원칙주의자여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쩌다 이 깡통이 이렇게 세태와 야합하게 됐을까.
너무 세속적인 나 때문인가 싶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바루다는 그러지 않았다.
녀석은 아까 이현종과 김병준 사장이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하고 있었다.
[내년 초 두바이에 가겠군요. 태화 생명 사장단도 가는 일정이니, 미국 연수 따위랑은 차원이 다른 사건입니다.]
‘어…… 그렇더라. 병원 짓는지도 몰랐네.’
[그쪽은 보험이 없는 데다가, k-의료가 요새 전 세계적으로 각광 받고 있으니 부르는 게 값이겠지요. 특히 간 이식은 대한민국이 최고 아닙니까.]
‘음, 그렇지.’
원래는 태화가 최고였는데.
최근 박국진이 10억씩 주고 빼 가 버린 인재들 때문에 칠성이 가파르게 역전하고 있었고.
아선 또한 미래 그룹에서 미래 먹거리 운운하면서 거액을 투자받으면서 왕좌에 올랐다는 말은 둘 다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누구나 알면서 동시에 가슴 아픈 얘기는 안 하는 게 답이었다.
[그쪽 현지에서 바로 할 수 있게 되면 경쟁력이 있겠죠. 태화 생명으로서는 당연한 투자입니다.]
‘그 짓 하느라 본진 경쟁력 날아가는데?’
[그런 건 원장 되면 걱정하시고.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어떻게 가서 사장단에게 어필해서 빨리 교수가 되느냐입니다. 펠로우 할 생각 없죠?]
‘생각이 없진 않지. 한 명도 안 하고 교수 된 사람이 없는데.’
[그 사람들은 제가 없었으니까요.]
‘그건…….’
재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처음엔 이 자식이 있어서 귀찮기만 하고 힘들었지만.
이젠 바루다가 있는데 최고의 의사가 되지 못하는 게 일종의 죄악 같았다.
어찌 보면 그날 사고당한 게 행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어떻게 어필을 해, 근데.’
[잘해야죠.]
‘잘하잖아? 잘했고. 그러니까 오늘 밥도 사 주셨지.’
[이거론 안 됩니다. 수혁이 말했듯, 펠로우 과정을 건너뛰고 교수가 되는 건 특혜예요. 이 병원이 이현종 병원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이현종도 결국은 계약직이에요. 주인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그…… 그 말이 좀…….’
[왜요? 이 병원이 의사들 겁니까?]
‘태화…… 그룹 거지.’
[그러니까요. 주인에게 어필해야죠.]
계속 맞는 말인데.
딱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의사들은 피고용인이면서 딱히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어찌 보면 참 건방진 생각인데, 다들 그렇다 보니 이상하단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바루다는 기계다 보니 훨씬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어필하는데?’
그리고 수혁은 이런 바루다를 존중하는 편이었다.
100에 99는 맞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면 안 되었다.
최소한 잠이라도 제대로 자려면, 그랬으면 안 됐다.
[공부해야죠.]
‘뭔 또 공부야, 결론이!’
[중동 지역에 호발하는 질환에 대해 아는 거 있습니까?]
화를 내면 어쩌겠는가.
별로 소용이 없는데.
[모르죠? 제가 다 데이터 검색해 보고 하는 말이에요. 없어요, 아는 게.]
원래 팩트로 조지는 놈이 제일 무섭고 짜증 나는 법이었다.
그리고 바루다는 그 팩트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없긴…… 없긴 왜 없어…….’
[없는데요? 텅텅 비었어.]
‘텅 비었다니. 내가 얼마나…… 얼마나…….’
[수혁은 아직 국내용이에요.]
‘미국에선 통했잖아!’
[연수생 신분으로는 통했죠. 거기 난다 긴다는 교수들하고 정면 승부 가능합니까?]
‘으음.’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교수들하고 정면 승부라.
솔직히 태화엔 이제 수혁이 넘어섰다고 생각할 만한 교수들도 드문드문 보이긴 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레벨로 평가받는 교수들은 어려웠다.
미국은 그런 교수들이 여기보다도 많은 곳이었다.
[물론 미국 데이터는 그때 좀 가져오긴 했습니다. 왓슨을 통해서. 좀 나을 거예요. 하지만 중동은…… 자신 없군요.]
‘자신이 없어? 네가?’
[더 자세히 말하면 수혁을 데리고 어필할 자신이 없습니다.]
‘쓸데없이 자세하네, 이놈이.’
[원하는 줄 알았는데요.]
‘이런 걸 원하는 놈이 어딨어!’
[아무튼, 공부하시죠. 중동 지역 질환. 새로운 영역이다 보니 오랜만에 설레는군요.]
‘하아.’
공부라.
누군가 이런 말을 하긴 했더랬다.
공부는 평생 하는 거라고.
근데 그 말 한 사람이라고 정말 평생 했을까?
이렇게 죽을 것처럼 열심히?
수혁은 아마 아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띠띠띠띠띠.]
‘아, 딴생각한 거 아니라고!’
[수혁의 뇌 기능 양상을 분석한 결과 쓸데없는 부분에 에너지가 쓰이고 있습니다. 속일 생각은 마십시오.]
‘이런 망할. 원래 이런 기능은 없었잖아?’
[수혁만 진화하나요? 저도 진화합니다.]
‘그 말은 좀 무서운데……’
[스카이넷 떠올렸죠?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노땅 소리 듣습니다. 요새 누가 터미네이터 본다고.]
‘하아…….’
사람은 이렇게 한숨과 눈물 섞인 공부를 평생 해서는 안 됐다.
그랬다간 우울증에 빨리 죽고 말 터였다.
[잘하셨습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준비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혁도 이제 바루다 못지않게 욕심이 쌓인 마당 아니던가.
어떻게 어떻게 꾸역꾸역 끝내긴 했다.
매일 할 생각이 들 때마다 한숨이 나오긴 했지만.
아무튼, 끝내고야 말았다.
‘이제 자야지.’
[잠깐만요.]
‘왜 또.’
[입원 환자 리뷰 안 합니까?]
‘다 했잖아. 내가 그런 거 빼먹는 거 봤냐?’
[이제 치프 대행입니다. 모든 환자를 봐야죠. 안대훈, 전적으로 믿을 수 있습니까?]
‘음…….’
친한 녀석인 데다가 자신을 곧잘 따르기까지 하는 놈이라 잘했으면 싶었지만.
수혁은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일로까지 끌고 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자. 어떤 환자 있는지. 다른 애들 환자들도 좀 봐야지?’
[당연하죠. 조태진 교수 환자 말고도 보시죠.]
‘알았어.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니까.’
[그럼요. 제가 있으니까요.]
깐족거릴 때는 머리에서 떼 버리고 싶은 녀석이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든든한 것이 바루다이지 않은가.
수혁은 바루다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차트를 하나하나 까 보았다.
대부분은 아니, 절대다수의 차트에서 문제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명색이 태화 의료원 아니던가.
1년 차는 좀 못하더라도 백 보는 2년 차나 펠로우, 교수들은 최고 수준이었다.
‘흐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걸리는 건 또 아니었다.
[흐음.]
수혁은 바루다의 반응에 이게 단지 자신의 촉만은 아니란 것을 확신하고는 차트를 더욱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냥 내용만 보면 사실 별다를 거 없어 보이긴 했다.
검진에서 위암이 발견됐고, 이에 대해 더 자세한 검사를 하기 위해 입원한 72세 남자 환자.
이미 검사는 꽤 진행이 되어 있었다.
‘CT상 뼈에 전이가 있네.’
[한두 개가 아닌데요? 다발성 골 전이입니다.]
위암과 같은 고형암에서 전이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말기에 해당하게 되는데, 이 환자는 그 전이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주로 뼈에 분포해 있었는데 아직 증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통증에 관한 기술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간혹 1년 차들은 이런 걸 빼먹기도 하기에 간호 기록도 뒤져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투약 기록도 없습니다. 환자는 통증을 호소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아, 통증 사정했네. 2점이야. 골 통증이라고 보긴 어렵지.’
[이상…… 하군요.]
‘그렇지? 이 정도로 전이가 있는데 통증이 없다니.’
암은 아프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일 테지만.
그건 조기 암일 때 얘기였다.
진행하고 나면 사실 암만큼 사람을 아프게 하는 질환도 드물었다.
물론 노인 인구에서는 증상이 비특이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이었다.
의사는 이러한 것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서는 안 되었다.
아주 작은 단서가 의외로 큰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PET CT 띄워 보시죠.]
‘안 그래도 띄우고 있어. 얘가 요새 좀 느려.’
[바꿔 달라고 하세요. 기계는 때가 되면…… 음. 아닙니다. 아끼고 사랑해야죠. 고쳐서 씁시다.]
‘정체성에 혼란 오냐?’
[시끄러워요. 빨리…… 음. 뭐야 이거.]
‘딴청 피우긴…… 음. 뭔 임파선에 전이가 이렇게 많이 됐어? 원발 병변이 어떻길래 이러지?’
[어마어마하게 큰가 본데요? 뭐, 가능한 얘깁니다. 아직 노인 인구에서는 검진이 대중화되지 않았으니까요.]
대한민국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한 나라 중 하나 아닌가.
복지도 그만큼 빠르게 좋아져 왔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중에서도 노인은 일차적으로 소외되어 온 편이었다.
때문에 암이 천천히 자라는 노인에서 진행 암이 발견되는 비율이 오히려 젊은 사람보다 더 높았다.
수혁과 바루다는 각자 엄청나게 커다란 종양을 상상하며 환자 내시경 소견을 띄웠다.
처음부터 위가 나오진 않았다.
당연하게도 식도 사진이 먼저 놓여 있었다.
‘아이구, 식도는 관리 잘하셨네. 소식했나? 전혀 뭐 역류 소견도 없어.’
[그러니까요. 내려봐요. 일단.]
‘알았어. 음.’
[음.]
그렇게 쭉쭉 내리면 위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 환자는 전이암 환자니까 위보다도 암이 보여야 정상이었고.
하지만 둘이 확인한 것은 조기 위암 병변이었다.
‘작은데?’
[이상…… 하네요?]
‘왜 이렇게 작어?’
[이 정도 위암에서 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