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92화 (192/1,303)

192화 쉽게 확신하지 마 (2)

[띠띠띠띠띠.]

수혁은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바루다의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마냥 익숙해지기엔 너무 거슬리는 소리였기에, 바루다도 조금은 조정해 준 덕이었다.

“음.”

수혁은 몸을 일으킨 후에도 잠시 머리를 부여잡은 채 있었다.

어제 중동 지역 공부한답시고 좀 늦게 잤더니 피로가 밀려온 탓이었다.

[엄살입니다, 수혁.]

물론 바루다는 수혁을 마냥 그렇게 두지 않았다.

‘엄살이라니, 힘들다고. 너도 다 느껴지지 않냐?’

[느껴지니까 하는 얘기죠. 순수 수면 시간이 무려 5시간 반이었습니다.]

‘보통 6시간보다 적게 자면 피곤해하거든?’

[후후.]

‘웃어? 웃었어?’

기계가 웃다니.

웃음소리가 소름 끼치는 것과는 별개로 소름이 돋았다.

물론 언젠가 들었던 웃음소리를 그저 재생하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이렇게 적재적소에 틀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 어쩐지 싫었다.

불쾌한 골짜기, 뭐 이런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제가 수혁을 허투루 조련시킨 줄 아십니까.]

바루다는 수혁이 찜찜해하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아까는 웃더니, 이번엔 조련이라.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5시간 미만으로 자도 괜찮습니다. 정 힘들면 조태진 교수한테 말해요. 그럼 재워 줄걸요? 100% 확률로 그럴 겁니다.]

‘뭔 교수님이 그런 특혜를 줘.’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 조태진이?]

‘음…….’

사실 조태진뿐만 아니라 이현종, 신현태 모두 그럴 거 같았다.

모두 팔불출이라는 말이 실로 아깝지 않을 정도로 수혁을 싸고돌았으니까.

[아무튼, 일어나십쇼. 사고 치기 전에.]

‘아……. 그래, 그 환자……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유지상이 백 보고 있는 고형암 파트입니다. 유지상이 잡아낼 리가 없죠.]

‘교수님은?’

[언젠가는 잡아내겠지만, 수혁만큼 빠르진 못할 겁니다. 조태진이라면 모르겠는데, 다른 혈액종양내과 교수들이 모두 다 저보다 뛰어나진 못하죠.]

‘그래, 뭐…… 내 이름도 좀 껴 줘.’

[굳이 원한다면 끼워 드리겠습니다. 바루다를 탑재한 수혁 정도로 표현하면 되겠습니까?]

‘에이.’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맞는 말인데.

수혁 본체도 꽤 뛰어나지긴 했지만.

아직 바루다가 없으면 뛰어난 레지던트 수준을 넘어서긴 어려웠다.

교수 레벨과 경쟁하려면 아니, 교수 레벨을 넘어서려면 바루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탁.

탁.

해서 수혁은 부리나케 머리만 감고는 지팡이를 든 채 당직실을 빠져나왔다.

문제의 환자가 입원해 있는 병동은 당연히 암센터에 있었다.

수혁은 보통 본관에서 서식하고 있었기에 이동에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거리 자체도 멀지만, 수혁의 걸음걸이가 느리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 수혁아.”

그리고 특이하기도 해서 본관에서 암센터까지 이어지는 긴 복도를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수혁을 알아보고, 동시에 따라잡을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이번에 따라온 이는 다름 아닌 조태진이었다.

“아, 교수님. 벌써…… 오셨어요?”

“이번에 학회에서 교육 이사 맡았잖아. 학회 일이 만만치가 않다, 이거.”

“아……. 그럼 이번 전공의 수료 강좌 교수님이 맡으신 거예요?”

“그렇지, 뭐. 너야 신경 안 써도 돼. 너 레벨에서 들을 만한 강의는 없어. 그냥 대출해, 대출. 시간 낭비야, 너한테는.”

세상에 어떤 교수가 제자에게 대출이나 하라는 말을 할까 싶었지만.

조태진은 진심이었다.

처음에 수혁에게 도움을 조금이라도 줄 생각으로 짜 간 강의 표를 보고 학회장님이 한 말을 떠올리면 지금도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미쳤어? 대상이 무슨 혈액종양내과 펠로우 2년 차야? 아니지, 2년 차도 몰라 이런 건!]

그 말에 우리 수혁이 다 안다고 했을 땐 명패를 집어 든 학회장을 마주해야만 했다.

[미친놈이? 그래, 너네 어? 우수한 애 들어온 거 알어. 우리는 이번 연차 농사 쪽박이고. 그 말이 듣고 싶냐? 그래서 이래?]

진심으로 화가 났는지, 가발이 흔들리는 데도 모르는 거 같았다.

거기서 뭘 더 어떤 말을 한단 말인가.

그저 죄송하다고 하고 나온 후, 다른 프로그램을 짜 가야만 했다.

전 년도까지 교육 이사했던 선배의 도움을 받아서였다.

아직 아카데믹한 성향이 그대로 남아 있는 조태진으로서는 너무 기본적인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들었지만.

학회장은 좋아했다.

[그래, 이게 딱이야. 전문의가 되는 거지, 혈액종양내과 세부 전문의 되는 거 아니잖아. 모르면 안 되는 걸 가르치는 게 목적이라고. 최신 지견을 줄줄 꿰게 하려는 게 아니라.]

모르면 안 되는 거라.

‘우리 수혁이는 그런 건 다 알고 있지.’

조태진은 다시 한번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정말이야. 오지 마.”

“아……. 네. 근데 그거 안 들으면…….”

“뭐, 전공의 연수 평점? 내가 대출할게. 너 같은 애가 전문의 못 되면 대체 누가 전문의가 되니. 지금 전문의 자격증 받은 사람들도 태반이 반납해야 될걸.”

“그…… 감사합니다.”

수혁에게는 절대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연수 강좌라는 게 태반이 시간 낭비로 느껴질 정도의 실력과 데이터는 갖추고 있었으니까.

이번만큼은 바루다도 동의했다.

[역시 조태진은 알아서 이쁜 짓을 하는군요.]

‘야……. 교수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미운 짓 한다고 해요, 그럼?]

‘말을 말자…….’

조태진은 감사하다고 말하다 말고 또 어딘가를 아주 잠시 쳐다보고 있는 수혁을 보며 후후 웃었다.

‘신기가 있는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계속 의사만 해 주라…….’

안 그러면 너무 슬플 거 같았다.

태화 의료원이 아니라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의 손실일 터였다.

“아, 너 아침 먹을래? 내가 이거 또 기가 맥히게 싸거든?”

조태진은 어두운 미래 따위는 보기도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는 김밥을 건네주었다.

말이 김밥이지, 너무 두꺼워서 한입에 베어 물기도 힘들게 생긴 음식이었다.

“어……. 이거 안에 든 게…….”

“한우야. 한우 김밥이다.”

“와……. 대박이네요. 진짜 맛있는데요?”

“그렇지? 이렇게 맛있는데 와이프는 싫어한다니까.”

그냥 굽는 거보다는 맛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라는 말을 수혁과 바루다는 애써 삼켰다.

다행히 둘 다 교수 말에 토 다는 건 예의가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탄 수혁은 10층을 눌렀다.

당연히 같은 층으로 갈 줄 알았던 조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10층은 왜 가니? 거기 내 환자 있어?”

자기도 모르는 자기 환자가 있나 해서였다.

평소 환자 보기를 금같이 하라는 말을 하던 사람이기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내가 학회 일이 바빠졌다고 환자 보는 걸 등한시하게 됐나.

어릴 때 욕하던 교수들처럼 됐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휴. 놀랐네. 근데 왜 가?”

“아…….”

수혁은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반면 바루다는 아주 확고하고 또 단호했다.

[말해야죠. 어떻게든 어필합시다. 조태진이야 원장단도 아니고 기껏해야 부교수지만, 그래도 수혁 교수 되는데 한 손가락이라도 보탤 수는 있을 겁니다.]

이유가 좀 구차하긴 했지만.

수혁도 바루다 못지않게 어필하는 거 좋아하는 인간이지 않은가.

“그쪽에 위암 환자…… 말기라고 생각하고 워크 업 중인 환자가 한 분 있는데요. 어제 입원 차트 리뷰하다 보니까 좀 이상해서요.”

“입원 차트 리뷰를…… 왜 다른 담당 환자까지 해?”

“그래야 경험도 쌓이고 공부도 되니까요.”

“어이구, 우리 수혁이. 넌 역시…….”

조태진은 수혁을 번쩍 안아 들고는 어화둥둥을 시전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세 번 정도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까진 하지 못했다.

3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더니, 두 명이 올라탔기 때문이었다.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너 뭐 하니?”

“야, 수혁이 어지럽겠다. 내려놔.”

이현종과 신현태였다.

얼굴이 보송보송한 것이 방금 씻고 온 것이 분명했다.

[새벽에 둘이 지하 연습장 들리고 와서 사람 없는 3층 교수 탈의실에서 씻고 온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군요.]

그리고 바로 암센터에 있는 자기 환자 보고 본관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아, 아니. 너무 이쁜 짓을 해서.”

조태진은 예상외의 판잔에 일단 수혁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현종과 신현태는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얘 이쁜 짓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냐?”

“그러니까. 그리고 수혁이가 이쁜 짓을 해야 안아 줄 사람이야? 나쁜 짓 해도 어? 난 열 번은 안아 줄 용의가 있어.”

“아니, 형. 열 번은 좀…….”

“뭐, 뭐! 내 아들인데.”

“아니, 아들…….”

“뭐, 틀려? 어이구, 내 새끼.”

그리곤 삐뚤어진 애정을 과시했다.

그사이 엘리베이터는 쉬지 않고 10층으로 직행했는데, 수혁이 내리자 왜인지는 몰라도 다 같이 우르르 따라 내렸다.

“그…… 여기 환자 계셔요?”

“아니.”

“근데 왜…….”

“네가 있으니까.”

멜로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치면서였다.

이 중에서는 그나마 정상인 신현태가 난색을 표하며 이현종의 주책을 말렸다.

“형, 연애해? 왜 이래.”

“난 진짜 얘 있어서 내린 건데. 넌 그럼 왜 내렸어. 11층 무균실 가는 거 아냐?”

“그…….”

“지도 수혁이 땜에 내려놓고 내숭은. 근데 여기 왜 왔냐? 조태진이 이제 환자 많아져서 남의 병동에도 입원시키나?”

이현종은 최근 신진 4차 의료 기관들에 좀 밀리는 태화 의료원을 설마 조태진이 먹여 살리나 하는 얼굴로 물었다.

조태진은 여기서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수혁이가 글쎄 혈액종양내과 환자 전체 병동 차트 리뷰를 하다가 이상한 환자를 발견했다지 뭡니까. 그래서 온 거예요. 아까 안아 준 것도 그거고.”

“아니, 그런 기특한 일을 했는데 그 정도로 끝냈어? 미쳤어? 야, 현태야.”

“왜 형……. 눈이 왜 그래. 형 요새 좀 이상해.”

“헹가래 한번 가자.”

“아니……. 형, 힘도 약한 사람이. 놓친다, 그러다?”

“야, 나 드라이브 몰라? 잘 휘둘러, 인마.”

“골프채랑 수혁이랑 같냐고…….”

신현태는 투덜대면서도, 동시에 병동을 오가는 환자들 및 간호사들, 보호자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위치를 잡긴 잡았다.

수혁은 이현종의 기행에 이미 반쯤 포기한 지 오래라 온몸에 힘을 빼고 기다렸다.

“이야, 우리 수혁이 대박이다!”

이현종은 말한 건 지키는 사람이라 정말 병동 스테이션에서 헹가래를 쳤다.

“뭔 일이래.”

“몰라, 뭐 상이라도 탔나.”

뭣 모르는 보호자들은 심지어 박수까지 쳐 주었다.

그렇게 네다섯 번이나 천장에 살짝 부딪히고 내려온 수혁은 지팡이를 다시 짚었다.

그리곤 자신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세 교수를 마주했다.

“어떤 환잔데 그래?”

“이렇게 직접 오는 거 보니까 어? 장난 아닌 거 아냐?”

“빨리 말해 봐.”

그 뒤로는 유지상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왜 저렇게 거물들이 모여 있지 하면서였다.

그 이유가 자기 환자라는 건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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