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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닥터-194화 (194/1,303)

194화 쉽게 확신하지 마 (4)

여포성 림프종(Follicular lymphoma).

이름 어디에도 ‘암’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엄연한 암이었다.

그럼에도 수혁이 당당하면서 또 어렴풋이 뿌듯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 여포성 림프종의 특성 덕이었다.

“72세에 여포성 림프종이라면…….”

이현종은 자신이 생각하던 질환 중 하나가 맞았는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마냥 웃기만 하진 않았다.

벌써 몇 분 전부터 이 질환을 떠올리고 있었던 만큼 할 얘기도 많았다.

“사실상 증상만 없으면 딱히 치료할 필요는 없지.”

암이라고 다 엄청 빨리 자라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아주, 아주 느리게 자라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리고 여포성 림프종은 그중 대표 격인 녀석이었다.

젊은 나이에 걸렸다면야 당연히 치료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노인에서는 그냥 경과 관찰만 하는 경우도 많았다.

“네. 그럼 조기 위암에 관해서만 치료 계획을 수립하면 됩니다. 이건 제때만 치료하면 기대 여명을 거의 자연 수명으로 늘릴 수 있어요.”

“그렇지. 아까 내시경 다시 띄워 봐.”

“네.”

이현종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시경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봐도 1.5cm가량의 조기 위암이었다.

이 정도면 최근엔 진짜 내시경으로도 떼어 낼 수 있었다.

정확한 계획을 세우자면 내시경 하 초음파를 봐서 침윤 깊이를 보긴 해야겠지만.

설령 내시경으로 하지 못하더라도 부분 절제술 정도의 수술만 시행하면 될 일이었다.

현대 의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고, 대한민국에서 위암 수술은 거의 외과 의사들의 기본기 같은 개념이 되어 온지라 예후도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했다.

“근데 병리과 슬라이드를 너 혼자 리뷰한 거야?”

“아……. 네. 아직은요. 차트 결과만 보고 한 거라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주치의랑 얘기해서 병리과에 슬라이드 리뷰 의뢰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 그래야지. 확실히 네 말대로 이런 임상 정보 추가되면 판독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커.”

이현종은 역시 우리 수혁이는 뛰어나기만 한 게 아니라 신중하기까지 하다며 껄껄 웃었다.

그리곤 임상과에서 제대로 된 그리고 풍부한 정보를 병리과나 영상의학과에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떠들었다.

대상이 레지던트였다면 다들 ‘네’라고 했겠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건 과장 하나와 부교수 하나였다.

“형, 나도 알지. 그건. 우리 진단검사의학과랑 얼마나 자주 미팅하는데.”

“원장님……. 저 혈종이에요. 저희는 노상 영상, 병리랑 보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저어 가며 개겼다.

신현태야 과장이기도 하고 또 몇 년 차이도 안 나니 그럴 수 있다 칠 수 있다지만.

조태진 이놈은 학번도 헷갈릴 정도로 아랫놈 아닌가?

‘이게 다 현태 이놈이 개겨서 배우는 거야……. 어휴…….’

내가 과장일 때는 안 이랬는데.

나는 정말 선배들한테 잘했는데.

이현종은 자기 선배들이 들으면 바로 작고할 거 같은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과장 됐다고, 원장 말 무시하냐?”

“무시한다는 게 아니라, 당연한 얘기를 하니까 그러지…….”

“너 인마…… 어? 누가 엿듣고 있었네. 야야, 뒤에 봐. 누가 우리 말 다 엿듣고 있었어!”

“응?”

그러던 이현종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플랜이 바뀌는 기분이 들어 귀를 기울이고 있던 장규선이었다.

“어어.”

따지고 보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무 쓰잘데기없이 긴장됐다.

원장이 손가락질하고 있는 데다가, 교수가 둘이나 더 뒤를 돌아보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뭐야. 너, 뭐야.”

이현종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원장이기 전에 내과 교수고, 그렇다면 이제 곧 3년 차 될 레지던트들 얼굴 정도는 알아야 정상이겠지만.

아쉽게도 이현종은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 데 반해 딱히 얼굴 기억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지간히 잘하거나, 잘하지 못하지 않는 이상엔 어렴풋이도 기억 못 했다.

그 정도가 어찌나 심한지, 심지어 학회에서 만난 태화 출신 타 병원 교수들 인사도 본의 아니게 씹을 때가 있을 지경이었다.

“아니……. 아니, 전…….”

“너 설마 칠성에서 보낸 프락치냐?”

그러니 동기들 사이에도 존재감이 없는 장규선을 기억할 리는 만무했는데.

그렇다고 프락치 운운하는 건 좀 아니었다.

아무리 요새 칠성하고 아선에서 잘 키운 주니어들 빼 가고 있다곤 하지만.

걔들이 설마하니 이 이른 아침에 병동 스테이션에 프락치를 심어 두겠는가.

다 학회 통해서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는지 전해 듣고 있을 텐데.

“아니, 형. 프락치라니. 얘 2년 차야…….”

“2년 차? 2년이나 있었다고?”

“그래, 수혁이 동기야.”

“근데 왜 내가 몰라.”

“그건…….”

그건 형 잘못 아냐? 라는 말을 참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현태는 역시나 인격자이니만큼 참았다.

원장 체면 좀 살려 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프락치 운운한 시점에서 망한 거 같긴 했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 보기로 했다.

“아무튼…… 장규선 선생 맞지? 혈종 돌아?”

“아, 네. 과장님.”

“이른 아침부터 회진 준비한다고 고생이 많네, 허허.”

“아닙니다, 과장님. 환자가 있으면 최선을 다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규선은 연신 수혁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발 지금까지 논의한 환자가 자기 환자란 말만은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다.

그걸 알게 되면 도대체 이 괴팍한 원장이 뭔 소리를 할지 알 수 없지 않은가.

프락치라는 소리야 억울하다고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바보, 멍청이 소리 나오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거 같아서 정말 상처 될 거 같았다.

“어이구, 기특하네.”

“아뇨……. 그럼 저는 환자 보러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해서 재빨리 자리를 뜨려는데, 이현종이 그를 불렀다.

“잠깐. 장규선이라고?”

“아, 네. 원장님.”

“이 환자, 네 환자지?”

“네?”

“멍한 표정 짓지 말고. 아까 엄청 진지하게 엿듣고 있던 거 다 봤어, 인마.”

“아…….”

신현태가 제자한테 인마가 뭐냐고 뭐라고 했지만.

이현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처럼 기인이라는 소문도 안 났을 터였다.

그저 자기 하고픈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너 저번 달 이어서 도는 거지?”

“네, 원장님.”

“그럼 이 환자 처음부터 본 거네?”

“아……. 네, 그렇습니다.”

“흠.”

이현종은 아주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컴퓨터 화면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얘기한 환자는 이제 입원한 지 벌써 열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무의미한 기간이라고 깎아내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이거저거 시도한 흔적은 있었으니까.

본 스캔도 해 보고, PSA도 내보고, 조직 검사도 해 보고.

어찌 되었건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기는 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 녀석이 한 걸까?

그건 아닌 듯했다.

“장규선 선생. 이리로 와 봐.”

“어……. 네.”

“아……. 나, 이거야 원. 자식이 말야.”

부르는 투가 어디 시장 뒷골목 깡패 형들 같았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 조태진이 나서려 했는데, 의외로 신현태가 막았다.

“쉿.”

“네? 아니, 원장님 사고 치실 거 같은데…….”

“사고? 아냐, 아냐. 현종이 형 태어나서 아랫사람 친 적은 없어.”

윗사람을 친 적은 있었는데.

그때도 그 윗사람이 더 아랫사람을 때려서였다.

신현태가 이현종에게 절대 충성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두들겨 맞았던 엉덩이가 아파 오기도 하고, 그야말로 발광하듯 미쳐 날뛰던 이현종이 눈에 선해 오기도 했다.

“그리고 현종이 형 눈 봐라. 진지하잖아. 의학 얘기할 거란 뜻이야. 저 형이 저래 봬도 잘 가르쳐.”

“아……. 하긴.”

“그니까 그냥 들어. 아마 수혁이한테도 들을 만한 얘기일 거야.”

“네, 형. 아니, 과장님.”

신현태까지 무게를 잡자 조태진도 덩달아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간호사들이 보기엔 다 웃기는 장면일 뿐이긴 했다.

언제는 뜬금없이 헹가래를 치더니, 이제 와서 저러고 있어?

물론 원장 앞에서 그런 티를 낼 간 큰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이현종은 아까 그 톤을 유지한 채 입을 열 수 있었다.

“너 차트한 것 좀 봐. 단 한 번이라도…… 담당 교수가 왜 이런 처방을 내는지 고민한 적 있어?”

“그…….”

장규선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루틴하고는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보통 조기 위암이 오면 내시경이 됐건, 복강경이 됐건, 개복이 됐건 어찌 됐건 절제하고 경과 관찰이지 않은가.

반대로 진행 암인 경우엔 그에 맞춰 항암 치료 스케줄을 잡아 주었다.

하지만 이 환자의 경우에는 이것저것 안 하던 검사를 꽤 했던 참이었다.

‘너무 바빴어…….’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고민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뭐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현종이 말을 이었다.

“바쁜 거 알아. 나도 레지던트 해 봤고, 지금도 바빠. 근데…… 너 의사잖아.”

“네…….”

“의사가 왜 바쁘니? 환자 보느라 바쁜 거 아냐? 루틴하고 달라졌으면 왜 이러나 고민을 해야지. 뭐 했어?”

“그…….”

“뭐. 태화 의료원 교수님이니까, 그분이 하는 건 다 맞겠지. 이런 거야? 그런 거야?”

“아…….”

이번에도 정곡을 찔린 장규선은 아예 고개를 숙였다.

실제로 에이, 교수님이 알아서 하겠지. 뭐. 이러고 있었던 탓이었다.

대부분 그렇기도 했다.

하지만 100% 그럴까?

아쉽게도 의학은 그렇게 만만한 영역이 아니었다.

“너도 2년 차 말이잖아. 치프고. 곧 전문의야. 고민해야지. 이 케이스는 특히 고민할 만한 케이스잖아. 위암이라고 확신할 수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케이스 아냐?”

“네…….”

일반적으로 개 같은 케이스라고 볼 수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거 같다가, 또 동시에 이것도 저것도 가능할 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현종은 바로 이런 케이스가 내과 의사가, 그중에서도 훌륭한 내과 의사가 필요한 이유라 믿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만약 이 환자를 계획했던 것처럼 완화 치료만 하면 어떻게 될까.

10년 이상도 건강하게 너끈히 살 사람이 불과 1, 2년 안에 고통 속에 죽게 될 것이 뻔했다.

“쉽게 확신하지 마. 의사는 그러면 안 돼. 맨날 보는 케이스라도 의심해야 해. 초보 의사면 더더욱 그래야지. 경험이 부족하잖아?”

“네, 원장님.”

이현종은 여전히 진지한 눈을 한 채 장규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정말 이런 얘기 안 하려고 하는데.”

그러다 수혁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함박웃음을 지은 채였다.

“우리 수혁이 좀 봐라. 솔직히 너랑 실력이 비교가 되니? 어? 쟨 벌써 논문도 쓰고, 케이스 리포트는 수도 없이 하고. 지금 펀딩 받아서 연구도 하는데…….”

“어, 형. 애 기죽이지 마요.”

“넌 가만히 있어, 인마. 어? 수혁이는 끊임없이 의심한다고. 이게 이상한 건지, 아니면 괜찮은 건지. 그래서 저렇게 잘하는 거야. 물론…… 물론 네가 의심한다고 수혁이가 되는 건 아냐! 그건 내가 확신해. 너도 확신해야 하고. 그래도 좀 나아져.”

“형……. 자꾸 선 넘는 거 같어…….”

“아무튼, 의심하라고. 쉽게 확신하지 말고. 우리 수혁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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