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96화 (196/1,303)

196화 하지 위약? (2)

“뭘 또 보러 가……. 우리도 일해야지.”

신현태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현종을 돌아보았다.

누가 보면 할 일 하나 없이 탱자탱자 놀기만 하는 줄 알 터였다.

새벽에 골프 치고 아침엔 레지던트 브리핑 듣고, 이젠 외래 구경 가겠다고 하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일…….”

“그래, 일. 형 원장이야, 원장! 봤죠? 이번에 보복부 발표 자료. 청구 건수 태화가 3위야……. 생명에서 가만히 있겠어요?”

“칠성이랑 아선처럼 돈을 붓던가, 그럼. 거긴 외래동 하나가 통째로 올라갔잖아. 칠성 가 봤냐?”

“아뇨. 요새 바빠서…….”

“이, 이봐 이거. 이거. 어? 난 인마 퇴근하고 시간 남으면 거기랑 아선 가 본다고.”

“어…….”

혹시 자기가 프락치 짓 하고 있어서 남들도 의심하는 건가.

신현태는 불온한 생각을 떠올렸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진 못했다.

지금 그랬다간 죽을 거 같았다.

진심이었다.

“요새 아선…… 교수 외래 늦어도 이틀이면 예약돼. 거의 다 당일이라고.”

“어……. 어떻게 그래요?”

“우창윤 그 새끼 때문이지.”

“우창윤?”

우창윤 교수.

재미도 없고, 딱히 윗사람 비위 맞추는 성격도 아닌데 승승장구하는 인물이었다.

내분비내과 차기 학회 이사장이라는 얘기도 솔솔 들리지 않던가.

나이를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자식……. 아선 병원 기조실장 됐어.”

“네? 나보다 거의 8년은 아랜데?”

“그래 인마. 50도 안 돼서 기조실장이야. 그 자식은 일생이 신호 위반이라니까. 추월 차선 탔나 봐. 결혼도 그거 어? 사고 쳐서 했지?”

“23살인가, 24살인가. 그때 했죠, 아마.”

“넌 서른 넘어서 했지?”

“네, 아니. 근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왜 자꾸 얘기가 딴 데로 새요.”

“아아, 맞아.”

이현종은 손사래를 치고는 말을 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면서였는데,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자식 그거, 다른 건 몰라도 잔머리 굴리는 거는 신묘하잖아.”

“그쵸. 공부 안 하고 차석인가 했지. 에이, 짜증 나는 놈.”

“아무튼, 그놈 태화에서 발령 못 받고 아선 갈 때 이를 갈았다나 어쨌다나. 타도 태화래. 이번에 기조실장 되자마자 오전에 환자 100명씩 보겠다고 했대.”

“100명? 하루도 아니고 한 타임에?”

“그래. 그게 다가 아니야, 인마. 예약 환자 70명 정도에 30명은 당일이야.”

“당일…….”

신현태는 현기증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병원 복도라 손잡이가 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우스운 꼴을 보인 셈인데.

이현종은 오버네 어쩌네 하는 말을 하는 대신 손을 잡아 주었다.

“그래, 어지간하면 당일로 봐 줘. 내분비내과가 원래도 환자 많이 보는 관데 솔선수범하니까 어떻게 되겠냐? 내과 전체에서 적극 지원하고 나서는 바람에 거기 지금 태반이 당일이야.”

“하……. 어쩐지 요새 신환이 좀 줄더라니. 기다릴 필요 없으니까 그리로 가는구나.”

“그래. 칠성은 아예 외래동 하나 더 세워서 외래 전담 교수들 뽑고 있고. 이런데 내가 뭘 어떡해. 니들 굴릴까? 굴려?”

이현종은 반쯤 돌아간 눈으로 성질을 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굴려서 병원이 잘 돌아가고 또 환자를 잘 볼 수 있으면 벌써 굴렸을 사람이 이현종 아닌가.

‘그건…… 내 신념에 맞지가 않지.’

하지만 이현종은 의사가 어느 정도 시간이 있어야 제대로 된 진료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있는 사람을 굴려서 성과를 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했고.

때문에 줄기차게 요청하는 것이 제대로 된 교수들을 뽑아 놓고 성과 운운하라는 것이었는데, 아쉽게도 기업 논리에는 잘 맞지가 않았다.

모기업, 즉 쩐주인 태화 생명에서는 이현종의 요구를 성의껏 검토해 본 적도 없을 지경이었다.

최소 비용을 들여서 최대 효과를 뽑아야 하는데.

아예 정반대 소리를 하고 있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굴리긴 뭘 굴리냐…… 내가 인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냐. 청구 건수가 괜히 밀리겠냐?”

“그렇…… 그렇네요. 근데 미쳤네, 이놈이? 이건 대놓고 선전포고하는 거 아니에요?”

“선전포고지. 문제는 칠성은 받았어, 그걸. 박국진 그놈도 보통 아니잖아. 기업 의지도 있고. 우리 태화만 가운데서 찐바 되게 생겼어.”

“어쩌지? 나 원장 될 무렵엔 3위 픽스 되는 거 아니에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인마. 나도 다 생각이 있어. 넌 그냥 수혁이 잘 보필이나 해.”

“왜 또 기승전 수혁이야.”

“그런 게 있어, 인마. 암튼, 난 간다. 너 말대로 일해야겠다, 일.”

원장과 과장이 병원 걱정에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을 때 즈음, 수혁은 외래에 있었다.

둘과는 달리 제법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미 차트 리뷰도 해 놓은 데다가 아직은 당일 접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반쯤은 칠성과 아선이 주도하는 치킨 게임 때문이라는 건 꿈에도 알지 못했다.

[외래 환자가 인계받았던 거보다 적네요.]

‘그러니까. 내가 처음 보는 거라……. 재진이 없어서 그런가?’

[레지던트 외래에 큰 기대를 안고 오겠습니까. 그냥 받던 약 받으러 오는 거죠.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래. 진짜 요새 우리 병원 어렵긴 한가 보다.’

의대 입학 할 때만 해도 태화 의과 대학의 위용은 대단한 것이었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그야말로 의대의 성골 중의 성골이라고나 할까.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 빛이 바래 가고 있었다.

끝없이 돈을 들이붓는 두 병원 아선, 칠성 때문이었다.

“다음 환자 부를까요?”

“아, 네.”

물론 수혁은 이제 겨우 레지던트일 뿐이라 걱정이 아주 많진 않았다.

가슴 한켠으로는 환자가 줄면 좋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바루다에게 들키면 곤란하니, 정말 몰래 떠올리긴 했지만.

“좀 어떠셨어요?”

“뭐 똑같죠.”

그럴 줄 알았다.

리뷰할 때 예상했던 대답과 똑같지 않은가.

“처방 드릴게요. 관리 진짜 잘하고 계시거든요? 이대로 해 주세요.”

“아유, 벌써 몇 년째인데. 올 때마다 잔소리네.”

“노파심이죠, 노파심.”

“그래도 그 덕에 관리 더 잘하는 거 같아. 고마워.”

해서 수혁은 미리 써 두었던 약을 처방해 주며 시계를 확인했다.

예정되어 있던 시간보다 무려 30분이나 일찍 끝나 버린 상황이었다.

그냥 올라가도 무방하겠지만.

[당일! 당일이라도 봐야 합니다! 오늘은 너무 날로 먹었어요!]

바루다가 지랄하는 통에 그건 좀 어려워 보였다.

게다가 이제 수혁도 좀 이상해진 마당이라, 바루다의 말이 맞는 것처럼 생각되기까지 했다.

“혹시 외래 접수 쪽으로 당일 문의 들어온 거 없어요?”

해서 수혁은 사원에게 어지간한 의사들은 절대로 하지 않을 만한 질문을 던졌다.

특히 이 사원은 이런 종류의 질문은 아예 처음이었다.

외래 끝나면 도망치듯 사라지는 사람도 많은데, 일거리를 찾는다니.

‘원장님 아들이라 그런가.’

하지만 아주 이상하게 바라보진 않았다.

원장 아들이라면 주인 의식이 있을 거 같기도 했으니까.

“네, 알아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수혁은 미리 사 온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수혁이야 그냥 쓰기만 한 음료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캬.]

바루다가 중독이었다.

“저, 선생님. 정형외과 외래 쪽에서 혹시 당일 가능한지 문의가 들어온 게 있긴 합니다.”

“정형외과요?”

“네. 김선웅 교수님 환잔데. 처방받은 약 드시고 속이 좀 쓰리다고 하시네요.”

“아.”

정형외과는 통증을 많이 보는 과 중 가장 대표적인 과라고 볼 수 있었다.

통증을 다스리기에 가장 일반적인 약은 아무래도 진통소염제 아니던가.

부작용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흔한 건 역시나 위장관 장애였다.

[꽝이네.]

그렇다 보니 부르기도 전부터 벌써 바루다가 초를 쳤다.

수혁 또한 김이 팍 새 버렸지만, 기왕 보기로 한 거 뭐 어쩌겠는가.

“네, 불러 주세요.”

“네, 선생님. 김선웅 교수님이 좋아하시겠네요.”

“네, 뭐 하하.”

정형외과 김선웅 교수.

험악하기로 소문난 정형외과에서 유일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사람 좋은 교수의 전형이라고 보면 되었다.

수혁도 다리 때문에 한창 김선웅 교수에게 진료받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 봐야 속 쓰림 환자나 보내는군요.]

‘의사가 그럼 환자 가려 받냐?’

[수혁에게 보낼 환자면 좀 가려서 보내도 되죠. 이 바루다가 함께 볼 텐데.]

‘레지던트 당일 외래로 쏜 건데 그걸 내가 볼지 딴 사람이 볼지 어떻게 알어.’

[하긴 그렇겠네요. 이제라도 알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 자식이 대체 무슨 수를 써서 이제라도 알게 해 주겠단 것인지 불안해질 무렵, 환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 42세. 다리가…… 약간 불편해 보이네요.]

‘김선웅 교수님이 다리 보시니까, 뭐. 그럴 만하지.’

[뭐라도 있을 줄 알고 봤는데 역시나 그렇군요. 문진하고 별거 아니면 제산제 줍시다.]

‘그래야겠어. 음?’

바루다처럼 수혁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차트를 깠는데, 이상하게 길었다.

[병력이 좀 있네요?]

환자 나이도 젊고, 또 혈색이 좋아서 기껏해야 다쳐서 치료 중인가 보다 했는데.

병력이 꽤 복잡했다.

우선 처음 이 병원에 온 주소 자체가 상당히 심각한 증상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 하지 위약으로 왔다…….’

[그래서 MRI를 찍었네요, 1cm가량의 덩이가 T3 레벨에 관찰됩니다.]

‘조직 검사 리포트는 비특이적인 양성 종양으로 나왔어. 수술하기엔 조금 위험한 사이트로 생각하셨는지, 우선은 스테로이드를 쓰기로 했네.’

[스테로이드 때문에 속이 쓰린 거군요, 결국.]

복잡한 병력에 돌고 돌았지만, 그 과정이 조금 흥미로웠을 뿐.

결과는 같아 보였다.

해서 제산제를 주려는 순간 오늘 아침 이현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함부로 확신하지 말라고 하셨었는데.’

[이런 건 확신해도 됩니다, 수혁.]

‘아니, 그래도 일단 문진은 해 봐야지.’

[귀찮아할 거 같은데.]

바루다가 보기에 이 환자는 벌써 귀찮은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딱 봐도 그냥 정형외과에서 약 안 주고 여기로 가 보라고 한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하지만 수혁은 일단 하기로 했던 질문을 던졌다.

“다리 힘이 떨어지는 증상으로 입원하셨었네요?”

“네? 아, 네. 그거 이제 좀 좋아졌는데.”

“당시 소변 보는 건 좀 어떠셨어요?”

“응? 아니, 그런 걸 왜 물어봐요?”

“보니까 척수 신경을 누르는 덩이가 있어서요. 그런 경우, 소변 보는 게 불편해질 수 있어요. 꽤 위 레벨이라.”

“어…….”

환자는 나갈까 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아까 들어오기 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천재…… 라고 했지?’

외래 사원이 그런 설레발을 떠는 건 처음이었다.

적어도 김선웅 교수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천재니 뭐니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짧게 입원한 것도 아니고, 거의 열흘이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불편하긴 했어요.”

“지금은 어떠세요?”

“좋아지긴…… 했는데.”

“아직도 좀 그런가요?”

“네.”

“흐음…….”

질문을 던지면서도 쓸데없는 짓이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제산제 주라니까.]

바루다도 그랬고.

근데 왜 계속 이현종의 목소리가 맴도는 걸까.

‘이상해. 쉽게 확신하면 안 될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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