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97화 (197/1,303)

197화 하지 위약? (3)

[명의병 도졌네. 명의병 도졌어.]

수혁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의심이었으니.

바루다가 비아냥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명의병이라는 비난은 일견 합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명의병이란 병원에서 꽤 다양한 순간에 쓰일 수 있는 진단명이었는데, 이땐 우연히 하나 얻어걸려서 맞춘 놈이 간단한 진단명도 죄 꼬아서 생각하는 상황에 쓰면 딱 되었다.

‘음, 아닌가?’

[일단 제산제 줘서 보내라니까요.]

‘근거는?’

[조직 검사까지 해서 양성 소견 나왔잖아요. 증상 컨트롤 되고 있고. 일단 지켜봐도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증상 컨트롤 때문에 생긴 속 쓰림을 해결해 주는 거예요. 자꾸 이러면 이제 환자 안 보내 줄걸요.]

‘하긴. 김선웅 교수님한테 폐 끼칠 수는 없지…….’

바루다가 조금이라도 동조를 해 주었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니 더 버틸 이유가 없어 보였다.

“하아.”

무엇보다 환자가 짜증이 가득해 보였다.

한창 일할 나이에 큰 병원 다니고 있는 것도 싫은데.

예상했던 시간보다 지체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선 경험적으로 제산제를 처방 드릴 거예요. 이걸 먹는 데도 증상이 지속될 경우엔 내시경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네네.”

환자는 자기 생각보다 훨씬 늦어졌음을 온몸으로 증명하려는 듯 약 처방하겠단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수혁은 그런 환자를 그냥 보낼까 하다가 한마디만 보태기로 했다.

“아, 환자분.”

“네?”

환자는 당연하게도 조금은 짜증 섞인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손으로는 미닫이문 문고리를 쥐고 있었다.

보통은 사원이 해 주는데.

얼마나 서두르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혹시라도 다리에 힘 빠지는 증상이 다시 생기면 꼭 오셔야 됩니다.”

“아……. 난 또 뭐라고. 알겠어요. 근데 좋아지고 있으니, 걱정할 건 없습니다.”

꽤 용기를 낸 말이었지만, 환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만 남기곤 사라졌다.

예정되어 있던 시간보다 훨씬 일찍 마감해 버린 진료실 안엔 다시 적막감이 감돌았다.

사원은 또 수혁이 다른 당일 환자 운운하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수고하셨습니다!”

동시에 인사까지 후루룩 마치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 네. 수고하셨어요.”

수혁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바루다는 쿵 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만 바라보고 있는 수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한심하다는 눈을 하고서였다.

[어째 수혁만 보면 거의 다 등을 보여주는군요.]

‘아니, 인마. 그냥 사원이야……. 연애 대상이 아니라고.’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닌데. 찔리나 봅니다.]

‘아오, 이 자식은…….’

수혁은 고개를 털어 내고는 아직도 남아 있던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이야 형편없어졌지만, 카페인 함량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바루다의 기분을 좋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수혁은 녀석이 거의 취할 지경이 될 때까지 커피를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야.’

[네, 수혁.]

예상대로 고분고분한 답변이 들려왔다.

수혁은 언젠가 AI에 관한 책을 쓸 기회가 되면, 커피가 당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남기리라 다짐하면서 차트를 가리켰다.

방금 나간 환자의 차트였다.

‘이거 한번 리뷰나 해 보자.’

[리뷰요?]

아까 같았으면 쓰잘데기없는 짓 그만두고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을 녀석이었다.

특히 오늘 점심은 한 달에 한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 보쌈이지 않던가.

심지어 배급도 아니고 자율이었다.

양껏 퍼먹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바루다는 산더미처럼 쌓인 보쌈을 볼 때마다 역시 태화가 최고라는 말을 남기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커피 때문에 거의 만취 상태였기에 조용했다.

‘그래. 여기 봐 봐. 김선웅 교수님한테 가서 입원하기 1주일 전에 하지 위약이 생겼다고. 이 증상만 봐도 드물잖아.’

[흐음…….]

확실히 급작스럽게 생기는 하지 위약은 드문 증상이긴 했다.

노인 인구에서야 뇌출혈, 뇌경색 등 유발 가능한 질환이 수두룩했지만.

방금 왔다 간, 건장해 보이는 마흔두 살의 남성에게는 더더욱 드물었다.

[증상은 드문데, 이미 조직 검사까지 한 상황 아닙니까?]

물론 단박에 수혁의 의심에 동조하진 않았다.

현대 의학에 있어서 진단 툴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조직 검사 결과가 떡하니 나와 있어서 그랬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영상 검사에서는 안 그렇게 보이는데, 조직 검사에서 암이 나왔으면 암이었다.

여러 말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쉽게 확신하지 마.]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빈틈이 없는 검사일까?

그건 아니었다.

특히 이 환자처럼 어떤 특정 질환이 진단되지 않고 꽝이 나온 경우라면 의심할 만한 틈이 있었다.

‘아니, 잘 봐. 조직 검사 리포트가 그냥 비특이적 림포이드 티슈라고만 나와 있잖아. 임상적으로 판단하라는 의견도 있고. 이게 흔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냐? 태화 의료원 병리과 수준 고려했을 때?’

[흐음…….]

태화 의료원 병리과는 수준이 굉장했다.

워낙에 많은 수술과 검사를 하고 있는 병원이지 않은가.

검체가 쏟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동결 절편 검사 정확도마저 99.9%를 상회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이건 검체 오류라고 봐야 해.’

[검체 채취 영상의학과에서 초음파 하 세침 흡입 검사했는데요? 영상의학과 수준은 떨어진다고 보는 겁니까?]

‘아니……. 얘기가 왜 그리로 흘러.’

[그럼 어디로 흘러야 하는 겁니까?]

이 자식이 왜 이렇게 시비를 거나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비가 아니라 정말로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바루다는 아예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녀석은 객관적인 정보를 가지고 추론하는 기계이니까.

지금 수혁이 하고 있는, 이른바 촉에 의존한 추론은 주특기가 아니었다.

‘지금 주어지지 않은 정보에 의한 오류.’

[주어지지 않은 정보라.]

그렇다고 아예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가이드만 해 주면 여전히 그 어떤 툴보다 뛰어난 분석가로서의 모습을 보여 줬다.

지금도 그랬다.

[입원 이후론 모든 정보가 오픈되어 있습니다.]

바루다의 말이 옳았다.

인원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한 병원에서는 정형외과나 신경외과처럼 바쁜 과 차트는 보지 않는 게 더 낫다는 말이 있지만.

여긴 맨파워가 괜찮은 병원이지 않은가.

매일매일 환자의 주관적 증상은 물론이오, 객관적 소견 및 그날그날 달라지는 어세스에 플랜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간호 기록도 완벽했고, 꼼꼼한 김선웅 교수의 첨삭까지 더해져 있었다.

입원 이후의 정보를 찾기 위해 환자를 들들 볶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말이었다.

‘입원 이전은 어때?’

[하지 위약이 심해지면서 1차 진료 기관에 내원했다. 이 말 말고는 정보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질환을 의심했는지, 어떤 치료를 했는지는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의료 기관을 갔는지도 불명이군요.]

적어도 차트엔 적혀 있지 않았다.

레지던트도, 담당 간호사도, 심지어 김선웅 교수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진 않은 모양이었다.

부주의해서였을까?

그렇다기보다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라 여겨졌을 가능성이 더 컸다.

태화 의료원은 허술한 병원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스캔 자료 뒤져 보자.’

하지만 수혁은 한줄기 의심을 이어 나가는 중이었다.

바루다는 그런 수혁에게 커피를 뇌물로 받은 참이라 일단 동조해 주고 있었고.

해서 별로 의미 없어 보이는 짓거리에도 크게 토를 달지 않았다.

[있네요. 1차 진료 기관에서 쓴 진료 의뢰서.]

대학 병원 진료라는 게 그냥 아, 가 볼까 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만약 그게 허용되어 있다면 대학 병원은 너무 많은 환자들에 의해 압사당하고 말 터였다.

사람 심리라는 게 아무리 가벼운 질환 같아도 어쩐지 큰 병원에 가고 싶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1차 진료 기관이 거름망 역할을 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때 필요한 서류가 바로 이 의뢰서였고, 의뢰서에는 1차 진료 기관에서 진료 본 의사가 생각하는 질환과 이때까지 한 처치 등이 적혀 있기 마련이었다.

‘원인 미상의 하지 위약에 대해 진료 의뢰 드립니다. 고진 선처 부탁드립니다. 진료 가능 일자까지 우선 증상 조절을 위해 스테로이드 5일간 처방하였습니다. 으음…….’

[이럴 거 같았습니다. 하지 위약이 로컬에서 보기엔 너무 과한 증상이죠. 오래 끌기는 어려워요.]

수혁의 생각과는 달리 1차 진료 기관에서는 정말이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의뢰를 한 참이었다.

여기서 뭐라도 좀 많이 했으면 그만큼 오류가 쌓였을 텐데.

초진만 보고, 아 이건 안 될 각이다 싶어서 보낸 모양이었다.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기세등등해진 것은 바루다였다.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뭐 어차피 시간은 딱 맞췄네요. 12시에요. 밥 먹으러 갑시다. 보쌈 떨어지면 아무래도 못 참을 것 같습니다.]

‘음…….’

[어허.]

‘알았어. 알았어. 가자.’

[좋은 태도입니다.]

수혁도 딱히 더 할 말은 없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지팡이를 짚은 채 지하 식당으로 향했다.

딸각.

딸각.

옛날보다야 훨씬 익숙해져서 속도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뛰는 거에 비하면 느렸다.

[저저. 나이도 먹을 만큼 놈들이 보쌈이라니까 뛰는 거 보세요. 이거 봐요, 아까 갔으면 안 기다렸지. 이제 30분 걸리게 생겼어.]

‘오후에 회진 준비만 하면 되는데, 뭐.’

[느긋한 것 좀 보라지. 보쌈 떨어지면 어쩌려고.]

‘전에 보니까 돈가스 튀기더만.’

[돈가스랑 보쌈이 같습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복장이 터진 바루다가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수혁을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하윤이었다.

머리도 감지 못한 채 작은 책자를 가운 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꼭 3월 인턴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는데, 이맘때 인턴들은 다 이랬다.

특히 인기 많은 과에 지원한 인턴일수록 더더욱 추레해졌다.

전공의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선배!”

“어, 하윤아. 공부…… 열심히 하는구나?”

“네, 최선을 다해야죠.”

“근데…… 올해 우리 내과 거의 일대일 아냐? 너 정도면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될 텐데…….”

“복습하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인턴 돌고 보니까 뭔가 좀 다른 느낌도 들고요. 재밌어요.”

“아.”

공부가 재밌구나.

학생 신분도 아니고 인턴인데.

당장 밤잠 설쳐 가며 일할 때 아닌가.

말이 안 되는 애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루다가 한숨을 쉬었다.

[저게 보통이겠죠.]

‘아니, 아닌데.’

복장 터지는 소리를 해 가면서였다.

“선배는 지금…… 혈종이죠?”

“어? 어.”

“혈종이 제일 힘들다던데…….”

“아무래도 뭐, 그렇지.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저도 얼마 전에 내과 돌 때…… 조직 검사 결과 마스킹 된 환자 본 적이 있는데……. 암 아니라고 알고 지내다가 다 번지고 온 거 보고 참……. 우리 병원에서 진단한 건 아니어서 그나마 부담은 덜했는데, 그래도 보기가 안 좋더라고요.”

“아, 그런 경우 있지. 마스킹…… 잠만, 마스킹?”

“네. 왜요? 선배, 어디 가요, 갑자기? 줄 서다 말고.”

“어……. 잠깐만 갈 데가 생겼어.”

“선배?”

하윤은 존경해마지 않는 선배가 줄에서 이탈하는 것이 안타까워 목소리 높여 불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같이 이탈하진 않았다.

배고프니까.

[야, 이수혁! 너 미쳤어?]

보쌈 줄에 서 있던 수혁을 애타게 부르는 건 비단 하윤뿐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바루다가 더했다.

바루다는 수혁이 이탈하면 속절없이 같이 이탈해야 했으니까.

[이 새꺄! 돌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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