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고칠 수도 있다고? (2)
“서 있을 수도 있다, 이거지.”
수혁을 포함해 이현종, 신현태, 조태진은 내과 과장실에 있었다.
아직 환자에게는 암이네 뭐네 떠들진 않은 상황이었다.
우선 PET CT를 포함해서 시행해야 할 검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한 조직검사를 100% 믿을 수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아니, 저는 확신한다니까요?]
정영훈 교수는 이렇게 말했지만.
정작 환자를 담당하고 있는 조태진 교수가 거부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서 일단은 증상에 대한 치료만 시작한 채, 다학제 케이스에 밀어 넣었다.
다학제란 비단 혈액종양내과 교수인 조태진뿐만 아니라, 병리과, 영상의학과, 핵 의학과, 방사선 종양학과, 심지어 수술이 필요하다면 해당 외과계 교수까지 들어와야 하는 회의를 의미했는데.
거기 올라갔다는 건 거기서 토의하기 전까지는 다른 걸 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까요. 서 있을 수 있다면……. 그건 꽤 커다란 의미가 있는데.”
덕분에 내과 교수들과 수혁은 오로지 김선웅 교수가 말했던 수혁의 다리에 대한 논의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근데 아직은 확립되지 않은 치료인 거 아닌가?”
신현태는 아까부터 먼눈을 한 채, 자꾸만 선다는 것만 얘기하고 있는 이현종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이 양반은 지금 수혁이 무조건 순환기내과 시킬 생각만 하고 있을 터였다.
‘수혁이 생각도 물어보고 해야지, 형…….’
해서 일단 제동을 걸었다.
“희망을 줘야지! 뭔 확립이야!”
당연히 이현종은 화를 냈고.
“아무튼, 수혁이랑 얘기해야지.”
신현태는 무시하고 수혁을 바라보았다.
수혁도 지금은 이현종은 무시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기에 신현태만 바라보았다.
“그…… 말씀하신 논문 아까 잠깐 봤는데요.”
“어, 벌써 봤어?”
“네. 확실히 가능성은 있어 보여요. 긍정적인 결과도 보고 있는 거 같고……. 이비인후과 쪽 데이터 보면 근육 톤 유지하거나 증가하는 것에 관한 연구가 많이 되어 있더라고요.”
“으음. 나도 오면서 물어봤거든? 그, 알지? 이비인후과 이 교수님.”
“아, 네.”
“나이는 어려도 뭐 학술적으로는 어마어마하잖아? 들어 보니까 이미 이비인후과 쪽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치료라고 하더라고. 더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지, 이론을 뒤집기 위한 움직임은 없다고 봐도 된다고.”
“아, 그렇군요. 오…….”
수혁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솔직히 이비인후과라고 하면 작은 과 아니던가.
비단 의사 수만 가지고 하는 얘기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내과에서 오, 좀 좋은 논문이라는 얘기 들으려면 인용 지수가 적어도 5는 넘어야 했고, 진짜 좋다 이러면 10점을 넘어 20점도 넘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비인후과는 공식적으로 이비인후과 명함 달고 있는 논문 중 제일 높은 게 2점대였다.
국내 학회 얘기가 아니라 국제 학회지가 그랬다.
[개무시하고 있었는데, 확실히 분야가 다르니까 관련 지식이 하나도 없군요.]
‘그러니까…… 마이너 과라 학생 때도 사실 거의 안 배운 분야이기도 해서……. 해부도 그렇고 진짜 잘 모르긴 해.’
[반성합니다. 이제부터 수혁 공부 스케줄에 마이너 과에 대한 것도 넣겠습니다.]
‘음.’
아마 평소 같았으면 가뜩이나 많이 하는 공부에 뭐 하나 더 끼어 넣는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테지만.
지금은 수혁도 이비인후과에 상당히 매료된 참이지 않은가.
해서 그러마하고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 순간 바루다는 스케줄을 추가했다.
수혁이 큰 실수를 저지르는 동안 신현태는 한없이 진중한 얼굴이 된 채 입을 열었다.
“문제는 이게 얼굴이 아니라 다리라는 거야. 다리는 얼굴이랑은 많이 다르잖아.”
“누가 그걸 모르나.”
“다리는 체중이 부하 되니까……. 수술하고 나서 재활에도 시간이 걸릴 거야.”
“모르냐고.”
“그래서 말인데. 좀 더 알아보고…… 김선웅 교수가 이 분야 대가인 것은 또 아니니까. 더 잘하는 사람 있는지 보든지, 아니면 내가 형이랑 돈 보태 줄 테니까 외국 가서 받던지. 그 논문 낸 데가 아이오와 주립 대학이더라고. 거기 연줄 있거든.”
“야, 씹냐?”
이현종이 중간중간 끼어들었으나 별 상관은 없었다.
한번 무시하기로 한 이상 흔들릴 만큼 물렁물렁한 신현태는 아니었으니까.
만약 그랬으면 과장도 수혁 다쳤을 때쯤 해서 중간에 관뒀을 터였다.
“게다가 중동 가는 거. 그거 생각보다 큰 건이야. 현종이 형이 제대로 물었어.”
“어, 그렇지. 내가 물었지.”
“가서 잘하려면……. 다리 좀 불편해도 일단은 참자. 재활 보통 일이 아닐 거야.”
“잘해야지. 내가 따 온 건데.”
“근데 수혁아, 네 생각이 제일 중요하긴 하거든. 어떠니? 나는 너 수술받고 재활하면서 1년 쉬고 싶다고 해도 응원할 생각 있어.”
“어……. 그건 좀 그런데. 그래도 네 생각이 중요하긴 하지.”
신현태는 하고 싶었던 말을 주르륵 쏟아 낸 후, 가만히 수혁을 바라보았다.
망막 상에 비친 수혁의 모습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어쩌다 이놈을 어찌 보면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하게 됐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이현종이 아빠라고 치면 제 아비보다야 인물이 백배 나았지만.
그게 과연 수혁의 인물이 좋아서일까?
만약 그렇다면 신현태는 시력 검사부터 받아야 할 터였다.
‘넌 인마……. 넌 천재잖아. 너 같은 놈이 잘돼야 우리나라 의학이 산다.’
다 수혁의 머리와 됨됨이를 봐서였다.
신현태 생각에 수혁만 한 인재는 현시점 전 세계 어딜 가도 없었다.
“음.”
수혁은 신현태의 따뜻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받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중동 건이 크긴 큰가 봅니다.]
바루다와의 대화를 위해서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수혁을 제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바루다는 그러한 존재들 중 제일 합리적이고 또 이기적인 선택을 내려 줄 수 있는 녀석이었다.
수혁으로선 달리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응, 신현태 과장님이 과장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말하는 거 보면.’
[묘하게 라임 들어갔는데 드립 친 겁니까?]
‘아니, 우연인데.’
[하긴 그럴 거 같았습니다.]
‘왜 실망하냐?’
[아무튼, 중동 건은 반드시 수행해야 합니다.]
중동행은 내년 3월 말로 잡혀 있었다.
그 말은 정규 3년 차를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중간에 관두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리가 많이 불편했다면 지금 당장 수술하고 1년 정도 유예를 둘 수도 있겠지만.
글쎄, 그래야만 할까?
[맨날 병원에만 있는 사람이 다리 당장 고칠 필요가 있을까요?]
‘남처럼 얘기하지 말고.’
[방금 수혁도 꼭 고쳐야 하나 고민했잖아요?]
‘내가 내 다리 가지고 고민하는 거랑 네가 그렇게 얘기하는 건 달라.’
[뭐가 다른지 모르겠네요. 이게 공감인지 뭔지 하는 겁니까?]
‘그래.’
[불편하군요, 휴먼.]
바루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치료는 뒤로 미루는 게 어떻겠습니까? 100% 보장도 없는 데다가, 전문의 시험 보는 시간을 활용한다면 1년 안 쉬어도 됩니다.]
‘그게 좋겠어. 과장님 말대로 좀 알아보고. 정 불안하면 다른 병원 가지, 뭐.’
[칠성이나 아선 갈 생각은 아니죠?]
‘미쳤냐? 거기 가면 나 암살당할걸.’
모르긴 해도 범인은 이 셋 중 하나일 터였다.
미국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건 괜찮아도, 저 두 병원은 안 됐다.
최근에 어떤 교수님이 자식 아파서 집에서 가까운 칠성 병원 응급실 갔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겪었던 수모를 떠올리면 끔찍할 지경이었다.
마음을 정한 수혁은 씨익 웃으며 동시에 세 교수의 손등을 쓸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다리 치료가 가능하다는 게 좀 놀랍긴 한데요. 그렇다고 이미 잡힌 일정 수정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교수님들 말씀대로 중동 가고…… 3년 차 말에 수술받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아, 그래. 그렇구나.”
“그래, 그래.”
이 셋은 어차피 수혁이 뭔 얘기를 해도 지지할 사람들이었기에 한동안 잘했단 말이 이어졌다.
“근데 말야.”
이현종이 의미심장한 얼굴이 된 채 입을 연 것은 대략 5분 후의 일이었다.
이 사람이 의미심장한 얼굴 할 때 좋은 얘기가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는 신현태가 말리려 했지만.
이현종이 워낙에 서둘렀기에 소용은 없었다.
“수혁이 수술하면 설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럼 순환기내과도 고려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
벌써 아까부터 생각하던 발언 아니던가.
망설임이 있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아.”
수혁은 미처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기에 입을 벌렸다.
[그렇네요, 그렇게 되면 순환기내과도 고려 대상에 올라갑니다.]
바루다야 별로 놀라지 않고 변수에 집어넣었지만.
신현태와 조태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예전에 한 협정을 이현종이 깨 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 수혁이가 직접 고르기 전까지는 꼬시지 말자.]
그때까지만 해도 이현종이 진짜 멋져 보였더랬다.
원장인 데다가 아무튼, 대외적으로는 아버지이니 제일 유리한 입장 아닌가.
그런데 그 고지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느낌이었으니 존경하는 마음이 들지 않으면 후레자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거 다 순 그짓말이었다.
“이 형, 이거! 다리 때문에 어차피 못 가니까 그런 말 했던 거구만!”
“와……. 나 세상을 배우는 느낌입니다, 지금.”
신현태와 조태진은 배신감에 몸서리를 치다가 수혁을 향했다.
뭐 어쩌겠는가.
이미 러브 콜이 시작됐는데.
그렇다면 질 수 없었다.
“수혁아, 감염…… 감염내과가 병원의 기둥이다. 너 협진 좋아하잖아. 모든 과가 다 연락해.”
“과장님, 솔직히 그거 광범위 항생제 풀어달라는 게 대부분이잖아요. 대세는 암이죠. 수혁아, 앞으로 암이 완전히 정복될 거 같니? 네가 오면 가능할 것도 같다. 암을 정복한 의사, 이수혁. 벌써 울 거 같다, 나.”
“뭔 소리야. 순환기가 짱이지. 이제 슬슬 판막질환도 우리가 할 거야. 언제까지 심장 수술하는 데 가슴 열겠냐. 어? 내과가 딱 해야지.”
다들 절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현종은 늘 강의 피피티에 끼워 넣는, 활 쏘는 포즈까지 하고 있었다.
“감염!”
“혈종!”
“심장!”
치열하긴 했지만.
다들 이 생각은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셋 중 하나를 선택할 거라고.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생각보다 김선웅이 입이 싼 탓이었다.
“어, 진짜? 그걸…… 호지킨을 임상적 추론만 가지고 진단했다고? 뻔히 다른 진단명이 있는데?”
“그랬다니까. 와……. 나 진짜 놀랬잖아. 걔 아니었으면……. 어이구, 진짜 어쩔 뻔했어. 환자 죽었다.”
“아깝다, 아까워.”
“응? 뭐가 아까워.”
김선웅은 병원 옆으로 들어선 아파트 대단지에 살았는데, 워낙에 가까운 데다가 학군도 좋고, 병세권이다 보니 다른 교수들도 많이 살았다.
애도 없는데 유학 가겠다는 아내 덕에 기러기가 된 김선웅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거의 매일 퇴근하고 시간 죽일 친구 찾기가 수월했으니까.
오늘의 타깃은 소화기내과 장강명이었다.
장 교수는 손을 절레절레 저어 대고는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너무 똑똑하잖아. 나도 걔 주치의로 둬 봤거든. 진짜 미친 수준이야. 우리나라가 소화기내과는 압도적으로 전 세계 톱이잖아. 걔 오면 정말 세계 1위 만들 수 있지. 근데…… 그놈의 다리 땜에 내시경은 못 하잖아. 뭐…… 간 하면 된다고 해도. 그래도 알지? 내시경은 기본이야.”
“아……. 그거? 설 수는 있을 거 같은데. 치료하면.”
“그래? 진짜야?”
“어.”
“야, 그거 자세히 말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