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야, 그럼 소화기도 (1)
장강명 교수는 며칠 전 김선웅 교수에게 들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야, 이수혁 아주 잘 걷지는 못해도…… 서 있고, 짧은 거리는 걸을 수 있을걸.’
비록 치료를 잘 받아야 가능하다는 전제 조건이 붙긴 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수혁에겐 있었다.
‘걔…… 걔 들어오면 센터 힘이 더 커질 텐데.’
비록 현재 내과 과장은 감염내과인 신현태고, 또 나름 과장 일을 잘하고 있는 데다가 확고한 원장 라인이라 차기, 또는 차차기 원장이 확실시되고 있지만.
실제 내과 내에서 가장 힘이 강한 분과가 어디냐고 한다면 소화기내과였다.
뭐 대한민국에 워낙에 위암, 간암이 많기도 한데.
병원 내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곳인 검진센터가 바로 소화기 내과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장강명 교수가 센터장이기도 했고, 전에도 소화기내과 교수가 했고, 아마 다음에도 그럴 터였다.
검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위·대장 내시경을 소화기내과에서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만있자…….’
장강명 교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떠올리던 수혁의 얼굴을 잠시 지운 채 달력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간다더니.
어느새 말일이었다.
그 말은 곧 새 레지던트들이 온다는 뜻이었다.
사실 평소라면 새 놈들이 오건 말건 별로 관심 두지 않았을 터였다.
누가 와도 어차피 그놈이 그놈인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음 달은 달랐다.
‘이수혁이 온다, 이거지.’
장강명 교수에게 배정되어 있진 않았다.
얼마 전에 교수로 발령받은 김유나 교수에게 배정되어 있었다.
계속 다리가 낫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러니까 소화기내과에 오지 않을 거라 여겼다면.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을 테지만.
이젠 아니었다.
“어, 김 교수. 나야, 장강명.”
“네네, 분과장님. 어쩐 일로…….”
“외래 보는 데 전화한 건 아니지?”
“네, 아닙니다. 연구 시간이라 시간 있습니다. 제가 과장님실로 갈까요?”
“아, 아니아니. 그런 일은 아니고.”
아무래도 장강명 교수가 직접 내시경 가르치고 논문도 쓰게 해서 교수까지 키운 사람이라 그런가 싹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긴 지금도 논문 쓰고 있지.’
똑똑하고 성실하고.
최고의 제자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혁이 오면 어찌 될까.
아마 장강명은 그 녀석 키우는 데 주력하게 될 터였다.
김유나 교수도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녀석은 다르니까.
“다음 달 주치의가 이수혁 선생으로 되어 있던데, 맞아?”
“아……. 네. 확인해 봐야겠지만,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맞을 거야. 내가 지금 그거 보고 있어.”
“네네.”
“걔 이번에 내 주치의로 좀 해 주면 어때? 나는…… 나는 유지상? 얘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유나 교수는 정말이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대학 병원 사람들은 다 이런 법이었다.
상명하복이 무슨 군대 같았다.
“어, 고마워. 말일 회식에 오지? 전공의 페어웰.”
“네, 그럼요.”
“그래…… 그럼 그날 보자고.”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장강명은 김유나 교수의 발랄한 감사 인사를 뒤로한 채 다시 달력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은 곳이야 새하얀, 언젠가 제약회사 직원이 건네준 달력이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다시 수혁의 얼굴이었다.
‘원장님한테는 좀 죄송하지만…… 순환기내과는 이미 완성된 학문 아냐? 그에 비하면 소화기는 뭐 무궁무진하지.’
학문하는 사람한테 하기는 미안하지만.
장강명 교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심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메커니즘이 단순하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인공 장기 중 제일 먼저 개발되고 있는 것이 심장이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소화기는 우주나 심해였다.
미지의 영역이라는 뜻이었다.
‘수혁이를 위해서는 소화기가 답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짜 소화기만 한 게 없어요.’
만성 질환입네, 뭐네 하면서 내분비내과 쪽이 요새 좀 깝죽대고 있긴 하지만.
환자가 많으면 뭐 하겠는가.
돈을 못 버는데.
아무리 원장 아들이라 해도 돈 생각을 어찌 안 할 수 있을까.
그런 거 다 감안하면 역시 내과는 소화기내과란 생각만 들었다.
장강명은 그 생각을 실제 수혁을 마주할 때까지 이어 나갔다.
“아, 이수혁 선생. 어서 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밝은 표정을 지으며 수혁을 불렀다.
일부러 병동이 아니라, 검진센터 쪽에서 보기로 한 참이었다.
아무래도 돈 버는 첨병인 데다가, 각 대형 병원들끼리 경쟁이 붙은 분야였기에 인테리어도 남달랐다.
그야말로 럭셔리 그 자체였다.
정작 내과 레지던트지만 검진과는 거리가 멀었던 수혁은 이곳에 제대로 와 본 것이 처음이었다.
[장난 아니네요?]
‘우리 병원 순이익은 다 여기서 난다는 말이 있으니까. 그 어디더라. 강남 지 병원은 아예 검진으로 특화해서 지금 기업이야, 기업.’
[아, 그때 주워들었지요. 같이 들은 거 혼자 알고 있는 거처럼 말하지 마세요.]
‘에라……’
바루다와 모처럼 투닥거릴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장강명 교수는 그런 수혁의 반응이 기꺼운지 허허하고 웃었다.
“여기 와 볼 일이 거의 없지? 병동 환자들 내시경은 여기서 안 하니까.”
“아, 네. 처음 와 봤습니다.”
“그래, 우리 센터 새로 지은 지도 얼마 안 되긴 했고. 아, 헬로.”
그리곤 일부러 지나가는 외국인을 향해 정겹게 인사를 건넸다.
외모만 봐서는 어디 나라 사람인지 감도 안 잡힐 지경이었다.
옆에 붙어 다니는, 국제 진료부 소속 간호사의 말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분이야. 아무래도 러시아 검진센터랑 비교하면 여기가 압도적이거든. 그 외에도 몽고, 중국도 그렇고…… 중앙아시아 쪽 VIP들도 많이 와. 방금 지나간 사람 있지? 단골인데…… 누군지 알겠어?”
“어……. 아뇨. 모르겠습니다.”
“TV에 가끔 나왔었는데. KGB 전 국장이야.”
“네?”
“저기 지나가는 저 여성분. 저분은 몽고 대통령 따님이고.”
“와…….”
장강명의 의도대로 수혁은 십분 놀라고 있었다.
이제 한창 뜨고 있는 나라들 귀빈들이 죄 와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실은 아직 놀라려면 먼 상황이었다.
“근데 이렇게 보이게 다니는 사람들은 진짜 VIP가 아냐.”
“아……. 그럼?”
“사우디 왕족 같은 사람들은 남들 없는 시간에 와. 태국 하이쏘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본인들이 아예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하거든. 그렇게 하다가 마음에 드니까……. 아, 전해 들었는데 이번에 중동 간다고 했지? 두바이에 우리 새로 짓는 병원.”
“네. 교수님. 저도 가게 됐습니다.”
“거기 나도 가. 왕족들 안면 튼 사람이 나거든. 여기 있으면 아무래도 그런 기회가 많지.”
“아……. 그렇군요. 와…….”
수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누가 봐도 순진한 레지던트 그 자체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것을 감지한 탓이었다.
[장강명 교수와 직접 이렇게 대화해 본 적은 없습니다. 교수와의 대화는 제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데이터화해 두는데, 장강명 교수와는 회식 자리 외에는 전혀 접점이 없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지?’
속으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장 교수 응대하는 건 전혀 소홀하지 않았다.
하도 이런 일을 많이 겪다 보니 어지간한 멀티 플레이는 가능하게 된 덕이었다.
[바로 직전 만남과 오늘 만남 사이의 변수를 계산하겠습니다. 약간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괜찮아. 아까 커피 마셔서 아직도 심장 뛰어.’
[잘됐군요.]
카페인의 힘을 빌린 바루다가 수혁의 두뇌 일부를 더 끌어다 썼다.
분석하는 동안에는 딱히 할 일이 없는 게 수혁이었다.
덕분에 넘어지지 않고 자연스레 걷는 데에만 신경 쓸 수 있었다.
“어이구, 내 정신 좀 봐. 너무 넓지? 지팡이 짚고 걷는 건 괜찮아?”
조금 비틀거리는 건 괜찮았다.
다들 수혁의 다리가 말썽이라고 지레짐작할 뿐이었으니까.
“아, 네. 괜찮습니다.”
“그래. 그래도 이쯤 하지. 센터가 워낙에 커서 말야. 하하.”
“네, 정말…… 정말 대단하네요.”
수혁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동안 바루다는 결괏값을 출력했다.
[총 원내 이벤트가 212가지 있었습니다. 그중 태도 변화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칠 만한 변수만 추려 보니, 하나가 남았습니다.]
‘뭔데?’
[다리입니다. 김선웅 교수 입에서 다리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이 나왔죠.]
‘아…….’
누가 입이 싼 건진 모르겠는데, 동기 중에서도 ‘야, 너 다리 수술해?’ 이런 식으로 묻는 애들이 있을 지경이었다.
그 정도면 온 병원에 퍼졌단 뜻이었다.
변수로 넣어도 충분할 만큼 위력이 있었다.
심지어 흉부외과에서도 그럼 다시 우리 과 올래 라는 드립을 칠 정도였으니까.
‘가능성 있는 얘기다.’
[네,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결국, 순환기내과뿐 아니라 소화기내과에서도 수혁을 눈독 들이는군요.]
‘원래 전혀 관심 없긴 했는데…….’
[오늘 보니 확실히 큰 과이긴 합니다. 애초에 소화기내과 교수가 내과 교수 중 제일 많기도 하고요.]
‘하긴 소화기내과 분과장 힘이 내과 과장보다 세다는 말도 있지.’
[과장된 말은 아닌 듯합니다.]
정을 생각하자면 당연히 이현종, 신현태, 조태진 중의 하나를 고르는 게 맞겠지만.
수혁은 주요한 조언자로 제일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바루다를 두고 있지 않은가.
언제든 배반의 장미가 될 수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태화에 남으면 배반도 아닙니다.]
‘맞아…….’
그리고 바루다는 수혁의 합리화를 더 공고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덕분에 수혁은 장강명 교수와 헤어지고 난 후로도 한동안 센터를 잊지 못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터넷에 검색까지 하는 등.
아주 적극적인 서치에 들어가 있었다.
[태화가 다 밀리는데 국제 검진센터는 여전히 부동의 1등이군요.]
‘응. 브랜드 이미지가 러시아, 몽고, 중국, 중앙아시아, 중동, 동남아에서 다 1등이네.’
[아마 태화 전자 핸드폰하고…… 자동차 때문이긴 할 텐데. 그걸 감안해도 대단하군요.]
‘뭐, 나 검진하라고?’
[아뇨,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분과 힘이 세면 연구비 따고, 밑에 사람 받기도 좋죠. 막말로 감염내과 보십쇼. 신현태 밑에 꼴랑 하나 있습니다. 장덕수.]
‘그건…… 그건 그래. 여전히 진료하느라 연구는 거의 못 하시지.’
이른바 맨파워가 딸린다 이 말이었다.
아마 수혁이 거기 밑으로 들어가면 향후 최소 10년간은 막내 노릇 해야 할 것이 뻔했다.
순환기내과나 혈액종양내과야 조금 낫긴 하겠지만.
그래도 소화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과장 조금 보태면 거의 매년 신규 임용이 있는 분과였으니까.
우우웅.
혼자 고민하고 있으려니 전화기가 울렸다.
안대훈이었다.
동기들이랑 거래라도 한 건지 늘 같은 분과인 느낌이었다.
“어, 대훈아. 왜?”
“네, 선생님. 응급실 통해서 흑색변 보는 환자가 와서요.”
“아……. 알았어. 내려갈게. 일단 CBC 해놔. 아마 상부 위장관 출혈일 거야.”
“네, ABO하고 수혈 준비랑 응급 내시경 의뢰도 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다 컸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