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야, 그럼 소화기도 (2)
흑색변.
어, 내 똥도 좀 검은데 할 수도 있겠지만.
높은 확률로 의사들이 말하는 흑색변은 아닐 터였다.
보통 흑색변이 나올 때쯤이면, 일단 기운이 없기 마련이었다.
‘양상이 어떠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겠지?’
[설마 환자 말만 듣고 흑색변이라고 했겠습니까. DRE(Digital rectal examination: 직장 수지 검사) 정도는 했겠죠. 안대훈 이제 곧 2년 차입니다.]
하긴 2년 차면 이제 단독으로 당직을 설 수 있는 연차란 뜻이었다.
지금 연락이 온 건 일과 중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입원 필요하니까 노티한 거겠지.’
[그럼요. 수혁도 저 없었을 땐 아주 뛰어난 의사가 아니었음에도 다른 의사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야…… 야, 내가 언제.’
[뼈를 너무 세게 쳤나. 말을 더듬네요.]
‘아니…….’
[아무튼, 이번 환자는 빨리 정리하고 다시 검색 좀 해 봅시다. 소화기내과 위상에 대한 데이터가 더 필요해요.]
‘알았어.’
수혁도 마침 바루다처럼 소화기내과에 확 관심이 끌린 참이었다.
방금 전까지 검색하다가 끌려 나오는 바람에 똥 싸다 끊긴 기분도 들었고.
해서 빨리 처리하려는 생각으로 응급실로 내달렸다.
그래 봐야 지팡이 짚고 뛰는 거라 그리 빠르진 않았지만.
적어도 머릿속에서 난리법석인 바루다는 조용히 시킬 수 있었다.
“아, 선생님. 랩 결과 나왔습니다. 헤모글로빈 6.4입니다.”
응급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안대훈이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듣자마자 눈이 동그래져야 정상인 수치였다.
“남자…… 남자지?”
“네.”
“수혈하고 있어?”
“지금 혈액 올렸습니다.”
“콧줄(L-tube)은?”
“하윤이가 세척하고 있어요.”
“아.”
확실히 2년 차는 2년 차였다.
상부 위장관 출혈에 있어서 급히 해야 하는 처치는 다 하고 있었다.
[지난 1년간 안대훈도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 정도도 못 하면 죽어야죠.]
바루다는 칭찬은 못 할망정 당연하다 여기고 있긴 한데.
따지고 보면 섭섭해할 것은 아니었다.
바루다의 기준은 꽤 높지 않은가.
그 안에 들었다는 거 자체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일이었다.
“아, 선배.”
하윤은 대훈의 말처럼 콧줄을 통해 위세척을 하고 있었다.
다리 옆으로 위쪽이 잘린 생리 식염수 통이 주르륵 놓여 있었는데, 이게 벌써 세 통째였다.
거의 오자마자 한 모양이었다.
그중 하나는 거의 피떡 색깔이었고, 다른 하나는 좀 낫고, 그 옆의 것은 묽은 붉은색이었다.
만약 아까 피가 난 것이고, 지금은 멈춘 거라면 색이 더 옅어져야 할 텐데.
아쉽게도 하윤이 방금 세척한 액도 색이 붉었다.
“어, 아……. 지금도 피 나는 모양인데. 내시경실 연락했어? 세척 이만치 했으면 시야 나와서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
“네? 아, 네. 결과 나와서 바로 노티 드렸습니다.”
“어, 잘했다.”
“설명은 내가 할게. 환자분…….”
일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착착 아귀가 맞아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다.
환자 눈이 노랬다.
“아, 최근 A형 간염 동네 의원에서 진단받고 치료 중이시라고 합니다.”
“아……. 아, 그래. 그것도 노티 된 거지? 내시경 시에 좀 주의해야겠는데?”
“네.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음.”
A형 간염 걸린 거 하나만으로도 힘들 텐데.
거기다 위 출혈까지 있다니.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가며 환자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했다.
어떤 이유가 됐건 간에 위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게 확실하고, 내시경적 지혈이 필요해 보인다.
수혈도 해야 하기 때문에 입원은 필수다, 등등.
“자, 환자분! 내시경실로 가겠습니다!”
대강 설명을 마쳤을 때쯤, 이송 요원이 와서 환자를 데려갔다.
자칫 잘못하면 환자가 죽거나 혼절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안대훈과 우하윤 모두 뒤를 따랐다.
수혁이라고 마냥 여기 있을 순 없었다.
몸이 불편하다고 환자 치료를 손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해서 천천히 뒤를 쫓았다.
그사이 봐 둔 환자 검사 결과를 떠올리면서였다.
[안대훈이 체크해 둔 결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헤모글로빈 6.4로 크게 떨어져 있습니다. 간 수치는 약간 상승한 수준인데, 토털 빌리루빈 수치는 31입니다.]
‘황달이 괜히 있는 게 아니네.’
[네.]
바루다는 아까 데이터화해 둔 시각 정보, 즉 환자의 눈동자를 떠올려 주었다.
흰자위가 샛노랗다고 해도 좋을 만큼 선명한 노랑을 띄고 있었다.
누가 봐도 황달 그 자체였다.
[안대훈이 체크하지 않은 결과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빨간 거 다 체크한 거 아냐?’
[급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선별적으로 적어 두었더군요.]
‘음. 해 봐.’
[혈당이 130으로 상승해있습니다. 과거 병력상 당뇨가 체크되어 있지 않았으니, 조금 이상한 일입니다.]
‘그거야 뭐…….’
수혁은 언제 식사했는지 모르는 상황이지 않냐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오자마자 시행한 위세척 액에는 온통 피떡뿐이지 않았던가.
그걸 설령 못 봤다 해도 무식한 발언이란 말은 피하기 어려웠다.
상부 위장관 출혈이 있는 상황에서 뭘 집어 먹는 사람은 드물었으니.
여러 정황상 최근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거의 못 먹었다고 봐야 했다.
‘음, 높네?’
[딴소리했으면 실망할 뻔했군요.]
‘시끄럽고, 또 다른 건?’
[이건 수치상 붉게 표시되진 않았지만……. 전해질 농도에서 클로라이드가 110으로 정상 한계치에 해당합니다.]
‘그건 원래 그럴 수 있잖아.’
[동시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16mmol/L입니다.]
‘아.’
내과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수치가 분명히 정상으로 나오는데, 그게 정상이라 이상하다고 봐야 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대사성 산증이구나.’
[네, 지금 기저 질환하고는 딱히 관계가 없죠.]
‘차라리 호흡성 알칼리증이 있으면…… 그게 그럴싸하지.’
사람이 당황하면 어찌 되는가.
흑색변, 그러니까 짜장 같은 게 주륵주륵 설사처럼 나오고.
온몸에 땀은 비 오듯 흐르면서 죽을 거 같이 힘들 때.
어지간히 침착한 사람이 아니라면 숨이 가빠질 터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게 아니라 산증이 되어 있었다.
‘좀 이상한데?’
[지켜봐야 할 필요성은 있겠습니다.]
‘응.’
그 외에도 지나치게 아파 보인다는 의견이 있긴 했지만.
수혁은 너도 간염에 피똥 싸 보라는 말로 응수했고.
바루다는 수긍했다.
[하긴 피똥을 엄청 쌌죠, 지금.]
헤모글로빈이 6.4라니.
원래 빈혈이 없었다는 가정 시 어마어마한 출혈량을 예상할 수 있었다.
수혁은 바루다가 고개 끄덕이는 것을 보며 내시경실 안으로 들어섰다.
“잉.”
그리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 응급 내시경은 펠로우 선에서 하기 마련 아니던가.
근데 지금 내시경을 잡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장강명 교수였다.
심지어 옆에는 김유나 교수가 보조를 서고 있었다.
미쳤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어, 왔어? 그냥 지나가던 길에 펠로우 선생 노티 받는 거 들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볼래?”
장강명은 허허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수혁을 불렀다.
김유나는 아, 얘가 이수혁이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교수라 해도 아직 주니어라 기특하네 어쩌네 하는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아무튼, 원장 아들이고 또 장강명이 찍은 녀석 아니던가.
잘해 주는 게 도리였다.
“이 선생, 이쪽으로 와. 여기서 보면 더 잘 보여.”
“아…….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지금 이거 어디 같아?”
마냥 잘해 주진 않았다.
내시경실에 들어와 본 적이 거의 없는 레지던트에게는 퍽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시니어 교수가 찍었을 정도니 어디, 얼마나 뛰어난가 보자 이 생각이 들어서였다.
“방금 십이지장 통과했고, 아, 십이지장 궤양이 있습니다. 액티브 블리딩이 있는데…… 클리핑보다는 에피네프린 주사를 일단 시도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물론 수혁에게는 그저 기본에 불과한 질문이었다.
[내시경을 뻔히 보여 주면서 여기가 어디냐니. 무시해도 분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치료법도 좀 털어 봤어. 어때, 네 생각은.’
[합리적인 치료법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렇지?’
바루다도 오케이 사인을 보인 답 아닌가.
질문을 던진 김유나는 물론이오, 이제 막 출혈 부위에 접근하고 있던 장강명 또한 놀랐다.
‘생각을 읽나…….’
마침 에피네프린을 찾고 있던 참이라 더했다.
‘이거 보여 줘 봐야 별로 놀라지도 않는 거 아냐?’
괜히 힘만 빼고 고생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기왕 시작한 거 끝은 봐야 했다.
‘아냐, 아냐. 알고 있는 거랑…… 직접 보는 건 또 다르지.’
뭐더라.
천재 나오는 영화에서도 그렇지 않았던가.
넌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정치적 야심, 교황과의 관계, 성적 취향을 설명할 순 있지만 시스티나 성당의 냄새는 알 수 없을 걸, 이라는 대사.
스스로 천재라기보다는 노력파라고 생각하는 장강명에게 이 대사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래, 뭐든 직접 보면 달라. 특히 이런 건…….’
내과라고 해서 다 기다리고, 추측하는 건 아니지 않던가.
순환기 내과도 극적인 변화를 보여 주지만.
소화기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이런 출혈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폭.
장강명은 손이 좋았다.
딱 출혈을 일으키는 혈관의 기시부 근처를 단 한 번에 찌를 정도였다.
“자, 푸시.”
“네.”
김유나 교수 또한 눈이 좋아서 단박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고는 약을 주입했다.
그러자 붉은 혈관이 수축하면서 주변 점막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오…….”
“신기하지? 보니까 큰 혈관이 아니고. 이미 세척을 해 놔서 출혈도 어느 정도 조절된 후라…… 이 정도만 해도 멎을 거야. 아, 랩 어떻지? 출혈 경향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말마따나 이렇게 해 두면 대개 괜찮았다.
하지만 내과는, 특히 태화의료원 내과는 중증도가 있는 편 아니던가.
기저 질환이 있으면 여기서 더 뭘 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아……. 아뇨, 출혈 경향은 없습니다.”
질문이 나오자마자 부리나케 컴퓨터로 달려 나가는 안대훈의 발걸음이 무색하리만치 명확하게 수혁이 답했다.
목소리, 표정 뭐 하나 나무랄 거 없이 단호했다.
‘와, 분과장 앞에서 레지던트가 이렇게 똑 부러질 수도 있나.’
이러니 다들 우리 수혁이 수혁이 하면서 난리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그래. 그럼 이렇게 하고 끝내고……. 혹시 모르니까 랩 계속 팔로우업 하고. 나 집 가까우니까, 뭔 일 있으면 다이렉트 콜 해.”
“네? 교수님. 제가 나오겠습니다.”
“음, 그럴래? 그럼 김 교수 콜 해. 일단 펠로우 선생 먼저 부르고, 안 되면.”
“네. 교수님.”
장강명 교수는 마치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낸 외과 의사처럼 당당하게 내시경실을 떠났다.
그럴 만도 했다.
딱 이 시술을 기점으로 해서 출혈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환자 상태는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환자분, 좀 어때요?”
“설사…… 설사해요?”
“이거 설마 출혈인가? 대훈아, 손가락 넣어 봐.”
“아……. 네.”
대훈은 똥 씹은 얼굴로 환자의 항문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묻어 나온 것을 보니, 흑색변은 아니었다.
진짜 그냥 설사일 뿐이었다.
강혁은 대훈의 손가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왜 갑자기 설사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