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야, 그럼 소화기도 (3)
단순 설사는 사실 대학 병원에서 보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증상이었다.
게다가 피가 났던 환자는 핏속의 철분으로 인해 다양한 소화기 증상을 경험할 수 있기도 했다.
이것만 가지고는 딱히 긴장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찜찜함을 느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커다란 이유는 바로 바루다였다.
[출혈 전후로 활력징후 변화가 크게 없습니다.]
바루다는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을 데이터화하고 그 데이터를 종합해서 판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공지능 아니던가.
그 능력은 수혁과 함께한 세월이 쌓여 갈수록 점점 더 심화 되어 오고 있었다.
덕분에 이상한 지검을 고르는 능력 또한 커졌는데.
그것은 비단 각각의 지표의 이상만 잡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아냐, 아냐. 변화가 없는 정도가 아냐.’
[그렇습니다, 수혁. 혈압은 130에 70으로 거의 동일합니다. 하지만 심장박동 수는 오히려 분당 100회에서 120회로 증가했습니다.]
‘출혈만 멈춘 게 아니라……. 수혈도 해서 헤모글로빈은 좋아졌는데도 이러는 거잖아?’
[네, 숨어 있는 기저 질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A형 간염 때문일 가능성은 없나?’
간염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심화될 경우 패혈증을 진행할 수 있지 않은가.
패혈증은 발열뿐만 아니라 심장박동 수 증가를 동반할 수 있었다.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적절한 대증 치료 중에 있으며, 환자 면역 또한 정상입니다. 또한 혈압은 기저 혈압부터 높게 유지 중이었습니다. 패혈증에 합당한 소견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혈압이 처음부터 높았군요. 헤모글로빈이 5점대였으니, 출혈이 적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요.]
‘그럼 기저 질환은 뭔가 심장박동 수와 혈압을 상승시키는 종류일까?’
[가능성이 있습니다.]
심장박동 수와 혈압을 비정상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질환.
적을 거 같지만 생각보다 그 수가 꽤 됐다.
적어도 환자를 눈앞에 두고 고민해도 될 만큼 적은 시간이 걸리진 않을 터였다.
“환자분, 일단…… 설사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외에 불편한 증상은 없나요?”
“약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거?”
“으음. 알겠습니다. 저희가 좀 더 검사가 필요한 게 있는지 보고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속 피가 나는 건 아니…… 겠죠?”
“네. 그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다만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긴장 늦추진 않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우선 심전도부터 찍어 볼게요.”
수혁은 우선 환자를 안심시키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훈도 장갑을 벗어 의료 폐기물 통에 버린 후 수혁의 뒤를 따랐다.
밖에는 하윤이 심전도 기기를 끌고 오고 있었다.
심전도 얘기를 듣자마자 뛰어간 모양이었다.
“어, 잘됐네. 가기 전에 그거 한번 찍어 보자. 혹시…… 부정맥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네, 선배.”
심전도는 인턴들이 제일 부담 없어 하는 검사 중 하나였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이건 아프지 않았다.
손을 타지도 않았고.
나이가 많거나 만성 질환 때문에 지나치게 마른 것이 아니라면 정말이지 수월한 검사였다.
환자는 퍽 젊은 편인 데다가 체격도 마른 체격은 아니라, 하윤은 별 부담 없이 기기를 부착했다.
틱.
그런데 몇몇 리드가 툭툭 떨어졌다.
바로 옆에 서 있지는 않았던 대훈이나 수혁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하윤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뭔 땀이 이렇게 나……?’
보통 가슴 앞판은 그렇게까지 땀이 많은 부위는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이곳은 병원이었다.
조금 따뜻하게 유지가 되고는 있어도, 환자가 땀에 젖을 만한 온도로 유지되진 않았다.
실제로 하윤을 비롯한 이곳에 있는 모두는 가운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덥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이상하네?’
아마 수혁이었다면 그저 이상하게 여기지만은 않았을 터였다.
보호자가 아니라 의사이지 않은가.
환자에게 뭔가 평범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면, 어떻게든 현재 증상과 연결 지어야만 했다.
하지만 하윤은 아직 수혁과 비교하기엔 실례일 정도로 경험이 부족했다.
아직 내과 레지던트도 아닌, 인턴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깄습니다, 선생님.”
해서 하윤은 심전도 종이를 서둘러 뽑아 수혁에게 건네주는 데에 그쳤다.
심전도에서는 부정맥 대신 단순 빈맥만이 관찰되었다.
실망한 일은 아니었다.
최소한 부정맥 때문이 아니란 것을 감별할 수 있었으니.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는 질환 중 부정맥을 제외한 것들을 출력합니다.]
‘오케이.’
바루다는 곧 출력을 위한 분석에 들어갔다.
그사이 수혁은 대훈과 하윤을 각자 위치로 돌려보냈다.
수혁이야 이제 3년 차에 올라가는 시점인 데다가, 이런저런 특혜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 시간이 좀 있지만.
다른 이들은, 특히 하윤은 인턴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 않던가.
‘아직도야?’
[좀만 기다리십쇼. 아니면 앉든지. 넘어질까 봐 두뇌 사용에 제한이 있습니다.]
‘알았어.’
해서 수혁은 다 보내고 난 후, 병동 스테이션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컴퓨터를 켜고 멍하니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바루다는 착실히 머리를 굴렸고, 곧 결괏값을 도출했다.
[우선 약을 씁시다. 베타 차단제, 프로프라놀롤을 추천합니다.]
‘아, 그래. 그게 좋겠어.’
심실빈백은 보통 저절로 사라지지만.
원래 협심증이나 심근증, 판막 질환이 있는 경우라면 급사의 위험도 있었다.
원인을 모르더라도 우선 증상을 경감시켜 주는 것이 옳았다.
해서 수혁은 빠르게 처방을 넣고, 담당 간호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환자가 불안해하는 게 걸렸던 간호사는 부리나케 가서 약을 주었다.
바루다는 수혁과 함께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을 이었다.
[가능한 질환으로는 갈색세포종이 있습니다.]
‘갈색세포종…… 음. 또?’
[갑상선 기능 항진증 또한 해당 증상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전해질 농도 이상도 해당 증상을 일으킬 수 있으나, 입원 전후로 시행한 검사에서 정상 소견을 보였습니다. 배제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래, 내 생각에도…… 두 질환 중 하나가 기저에 있을 거 같아. 근데 두 질환이 다 이렇게 급속한 증상을 일으킬 수 있나?’
바루다의 의견은 합당해 보였다.
하지만 증상이 너무 급한 것은 좀 이상했다.
해서 짚어 줘 봤으나, 바루다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진 않았다.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기저 질환일 가능성이 큽니다. 빈맥은 출혈 및 설사로 인한 탈수로 악화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래, 그렇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검사는 나가 보자고. 기저 질환이 뭐가 있는지는 알아야지.’
[네, 우선 두 질환에 대해 감별 검사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과 나올 때까지는 증상에 대한 치료로 따라붙는 것을 추천합니다. 특히 탈수를 조심해야겠습니다.]
‘오케이.’
모든 병이 그 병에 맞는 특효약이 있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그렇지 않은 병들이 훨씬 많았다.
이럴 때 의사는 대증 치료라는 것을 시행했다.
말 그대로 증상을 조절하기 위한 치료였다.
말만 들으면 쉬울 거 같지만 상당히 어려운 과정이었다.
이 환자의 경우 우선 상부 위장관 출혈이 있었기 때문에 위산을 억제하는 것이 필수였다.
‘일단 양성자 펌프 억제제(PPI, Proton pump inhibitor) 쓰고.’
[A형 간염에 대해서는 현재 치료 유지하면서 매일 간 수치(AST/ALT), 빌리루빈 따라가면 되겠습니다.]
‘설사는 어쩌지? 지금 이 상황에서 설사가 계속되는 건 막아야 할 텐데.’
[근거를 대 보십시오.]
바루다는 잘 협조하다 말고 삐딱한 어조로 태도를 틀었다.
좀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진 않았다.
이놈이 이럴 땐 다 이유가 있었으니까.
‘설마 내가 모를까 봐?’
[그럴 리가요. 다만 확인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일단 출혈이 있었지. 우리가 수혈하고 수액 따라갔어도 설사로 아웃이 늘면 심장박동 수 회복에 전혀 도움이 될 게 없어.’
[그것뿐입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설사는 단순 설사였다.
하지만 갑상선 질환이나 부신 질환을 의심하게 된 지금엔 얘기가 조금 달라졌다.
‘설사를 하게 되면 전해질 불균형이 일어나지. 호르몬 불균형…… 특히 갑상선 기능 항진증에서는 안 그래도 포타슘이 줄고. 이 환자 입원 전 검사에서 포타슘이 정상 범위에서 제일 아래였잖아. 위험해, 더 줄면.’
[아주 좋군요. 공부시킨 보람이 차고 넘칩니다.]
‘그럼 설사를 좀 공격적으로 막아 보자. 감염은 아니겠지?’
[감염성 설사와는 양상이 다릅니다. 물리적인 자극이나 또는 호르몬의 영향일 가능성이 큽니다.]
‘오케이……. 그럼 로페라마이드를 쓰자. 수액 쭉 주면서.’
[네, 전해질 매일 따라가면서 쓰죠.]
수혁의 답변은 완벽하다 못해 사려 깊었다.
아마 이 같은 설명을 이현종, 신현태, 조태진 삼인방이 들었다면 또다시 헹가래를 쳤을 게 뻔할 지경이었다.
바루다도 만족했으니 당연했다.
현시점 완벽한 처방이었다는 뜻인데, 그렇다고 결과 또한 늘 완벽하게 흘러가진 않았다.
[지지부진하네요.]
‘응, 지지부진하네.’
[검사는 아직 안 나왔죠?]
‘호르몬 검사는 며칠 걸리지. 그리고 뭐…… 원래 지지부진할 거라 생각했잖아?’
[네, 장기전이 될 거 같습니다. 애초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하루가 지났을 무렵에도 환자는 설사 중이었다.
로페라마이드가 그래도 꽤 강한 약임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액을 통한 보충을 통해 전해질은 잘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 프로프라놀롤이 꽤 잘 듣는지, 심장박동 수 자체는 100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음……. 일단 출혈 소견은 없어. 치료 유지하면서 검사 결과 기다려 보자고.”
해서 담당 교수인 장강명도 우선 지켜보는 데 동의했다.
바루다나 수혁도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그러자고 했다.
“음.”
하루가 더 지났을 무렵에는 조금 안 좋은 소견이 더해져 있었다.
환자의 눈이 더 노래져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간 수치는 이제 완전히 정상이었으니까.
A형 간염에서 간 수치는 정상이 됐는데 빌리루빈만 치솟는 건 정말이지 드물 경우였다.
“설사는 좀 어떻지?”
하지만 장강명 교수의 얼굴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았다.
“여전합니다.”
“빈맥은?”
“동일합니다.”
“그럼 빈맥은 설사 때문에 유지된다고 봐야겠지? 아무리 이수혁 선생이 말한 것처럼 갑상선 항진증이나 갈색 세포종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증상이 나타나진 않잖아?”
“네. 그게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리루빈 상승 또한 이전 출혈로 인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음.”
장강명은 역시 이수혁이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혁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지금 치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진 않지만, 그럼에도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이현종에게 배웠기 때문이었다.
“다만 환자 전신 상태가 좋지 않으니 처치실에서 보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처치실?”
“네. 제가 보겠습니다.”
“뭐…… 그래, 그래 주면 나도 안심이지.”
환자를 처치실로 빼겠다는 얘기는 더 자주 보겠다는 뜻이었다.
담당 교수로서는 주치의가 열심히 하겠다는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 주인공이 이수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수혁은 정말로 안심했다는 얼굴을 한 채 떠나간 장강명의 뒷모습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근데 이거 진짜 탈수 때문일까?’
[아닌 거 같아서 처치실로 뺀 거 아닙니까?]
‘아닌 거 같아. 문제는…….’
[탈수 말고 떠오르는 게 없죠?]
‘어, 하, 큰일 났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