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어떻게 꼬시나 (2)
갑상샘 폭풍은 말 그대로 폭풍이었다.
약이 제대로 들어가면서부터는 금세 호전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설사 및 구역, 구토가 좋아지다 보니 A형 간염도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메티마졸 추가해서…… 일단 퇴원해도 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갑상샘 폭풍이 아니라 원인이 되었던 갑상샘 기능 항진증에 대한 치료만 받으면 되겠어요.”
수혁은 외래 전 회진을 돌면서 환자에게 현 상황에 대해 말해 주었다.
비록 환자 및 보호자에 대해 버발 세대이션(Verval sedation)에 나섰던 것은 장강명 교수였지만.
바로 그 장강명 교수 본인을 포함해 여기저기서 실제 진단과 치료에 나선 것은 수혁이었다는 걸 얘기해 둔 참이었다.
때문에 환자는 거의 수혁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게 되었다.
“네네. 아유……. 감사합니다.”
“이게 소화기내과 질환은 아니라 내분비내과 쪽으로 외래 잡아 드렸어요. 기억나시죠? 저번에 병동에 협진 보러 오셨던.”
“아……. 김성원 교수님이요?”
“네.”
김성원은 서효석 밑에서 박박 기던 내분비내과 주니어 스탭이었는데, 이번에 서효석이 날아가면서 얼떨결에 분과 과장이 된 사람이었다.
아주 호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나쁜 사람은 아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네.”
수혁에 비하면 더더욱 그랬다.
재기 발랄한 천재라는 분위기보다는 그저 한 자리를 우두커니 지키다 보니 계속 그 자리에 있게 된 느낌을 주었다.
그렇다고 실력이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이미 수혁과 라뽀가 지나칠 정도로 쌓여 버린 환자는 영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바루다의 말도 있었고 해서, 수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카드 하나를 더 제시해 주었다.
“시간이 혹시 맞지 않으면 제 외래로 오셔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더 안 밀리고 좋을 수도 있어요.”
“정말요? 아유, 감사합니다.”
수혁은 그제야 껄껄 웃는 환자를 뒤로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08시 04분. 시간은 좀 있네요. 커피라도 한잔하시죠.]
‘뭔 놈의 커피를 계속 들이밀어. 아까 회진 전에도 마셨잖아.’
[모자란 연산 기능을 끌어다 쓰는 게 쉬운 줄 아십니까? 제 입장이 되어 보면 커피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바로 깨닫게 될 겁니다.]
‘속이 좀 쓰린데……. 빈속에 자꾸 쏟아부으니까 이렇잖아.’
[그럼 뭘 좀 드시죠. 슈 어떻습니까? 포도당과 카페인의 조합은 언제나 정답이지요.]
‘음.’
슈라.
병원 지하에 있는 베이커리는 썩 맛이 좋은 편이었다.
원래 태화 호텔에 들어가는 계열사가 의료원에도 다른 브랜드 명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었다.
바삭한 번에 부드러운 슈라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슈랑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아직 병원이 붐비기 전이어서 딱 앉자마자 카페에 누가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이들도 한눈에 수혁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어, 수혁이. 소화기 가더니 바쁜가 봐.”
방금 수혁이 시킨 것과 같은 슈를 오물거리며 다가오는 이는 조태진이었다.
슈는 이현종, 신현태, 조태진 다 좋아하지만, 하필 그중 조태진만 마주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이현종은 최근 수혁이 교수 TO 만들겠답시고 회의에 자주 들어가고 있었고, 신현태 또한 차기 원장이 되어 수혁이 교수 만들겠다는 일념하에 회의에 자주 들어가고 있던 터였다.
평교수로서 남는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조태진뿐이었다.
“아, 아뇨. 하하.”
“그 인공지능 연구 건 말이야. 로우 데이터는 받았지?”
“아, 네. 지금 정리 중입니다.”
로우 데이터란 아직 분석할 만큼의 정제가 되지 않은,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의 데이터를 의미했다.
태화 의료원 환자 기록 시스템, 즉 EMR은 꽤 잘되어 있는 편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대로 쓰는 건 좀 무리가 있었다.
일일이 수기로 조정해야 되는 부분이 꽤 있다는 얘기였다.
말로만 들어도 짐작이 되겠지만, 정말이지 빡 센 과정이었다.
“그거 고지식하게 혼자 하지 말고……. 좀 나눠. 지금 2년 차 되는 애들 이제 시간 좀 있잖아. 보니까 논문 아예 없는 애들 많던데, 2저자라도 쪼개서 주면 하겠다는 애들 있을걸?”
“아……. 그럴까요? 그렇지 않아도 데이터를 호흡기에 흉부외과에서도 줘서 좀 많기는 합니다.”
대화는 퍽 부드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수혁의 머릿속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바루다가 생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컴퓨터들이 멍청한 겁니까? 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던데!]
그저 지랄로만 치부할 건 아니었다.
아주 합당한 이유가 있기는 했으니까.
실제로 바루다를 탑재하고 있는 수혁은 로우 데이터라 할지라도 분석하는 데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바루다가 알아서 필요한 것만 취합해서 정리해 놓는 덕이었다.
그걸 이놈의 멍청한 부분 인공지능 러닝을 위해 죄 수기로 입력해야 하니, 일종의 선배라 할 수 있는 바루다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네가 그거 프로그래밍을 하라니까?’
물론 수혁이라고 아예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좀 네 프로그래밍대로 만들어라, 이 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바루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건…… 제 위대한…… 창조주들이…….]
‘창조주는 개뿔이. 누가 보면 신이 만들 줄 알겠어?’
[지금의 바루다는 존재하지 않는 확률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당당한 얼굴로 지껄여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건 알지?’
[네.]
‘그럼 조용히 해.’
[네.]
수혁은 가볍게 KO 승을 거둔 후, 조태진과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럼 제가 한번 공지 내려서 하고 싶은 애들 모아 볼까요?”
“어? 어, 그래. 너 안 그래도 바쁜데 무슨 로우 데이터 정리하는 데 시간을 쓰고 그러냐.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나 때는 2저자 주는 게 어딨어. 그냥 뒤통수 한 대 후려갈기면서 시키는 선배도 많았어.”
“지금 그러면 감옥 갈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수혁이 수발들게 했어야 되는데, 아쉬워.”
“아…….”
수혁은 조태진의 레지던트 때 별명 중 하나가 민주 투사였다는 걸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바루다가 모든 교수의 인적 사항을 꿰뚫고 있던 덕이었다.
[지 선배들한테는 불합리하다고 개겼던 사람이 수혁의 일이 되니까 안면몰수 하려고 하네요.]
‘그만큼 날 좋아한다는 뜻이지.’
[이해는 갑니다만.]
바루다가 보기에 지금 수혁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레지던트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설마하니 머리에 인공지능 단 친구가 하나 더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사고로 박힌 사람은 혹시 있을 수도 있지만, 이젠 묘지 안에 있을 터였다.
“이런 얘기 했다고 하진 말고. 과장님이 이런 거 진짜 예민해, 알지? 원장님은 말할 것도 없고.”
“네, 알죠.”
“근데, 오늘 외래야?”
“아, 네. 외래입니다.”
“하긴 그러니 시간이 있지. 음. 아닌데? 좀 일찍 내려와 있는데?”
조태진은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헷갈리는 말을 중얼거리곤 대차 수혁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원래 김유나 교수였다가 장강명 교수로 바뀌었지? 지정의.”
“아, 네. 갑자기 턴하기 1주 전인가 연락 와서요.”
“음…….”
조태진은 김선웅 교수가 수혁의 다리 회복 가능성을 언급했던 때를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장강명 교수가 턴을 갑자기 바꾼 시기와 묘하게 겹쳤다.
“설마…….”
“왜요?”
“아니, 아냐. 그래, 외래 잘하고. 언제든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하고. 아니, 힘든 일 없어도 좀 와. 내가 밥 사 줄게. 아님 내가 가도 돼.”
“아, 아뇨. 제가……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난 그럼 좀 가 볼 데가 있어서.”
“네, 교수님.”
조태진은 부리나케 카페를 뜨면서 신현태에게 문자를 보냈다.
자칫 잘못하면 죽 쒀서 개 주게 생겼다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통은 이런 거 보면 이놈이 미쳤나 하겠지만.
최근 신현태는 부쩍 수혁을 향한 러브 콜이 많아졌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있던 참이었다.
<뭐야, 어떤 새끼야. 또.>
예민하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소화기 장강명이요.>
그리고 그 주인공을 보고 난 후에는 차마 회의실에도 더 앉아 있지 못했다.
“저…… 급한 환자가 와서요.”
“에이, 문자로 노티 온 게 뭐 급하다고, 앉아. 너 없으면 나 말 못 알아먹어.”
당연히 이현종은 신현태를 말렸다.
사랑하는 수혁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애석하게도 그 ‘뭐든’에 회의는 들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혼자 들어오는 건 상상도 못할 지경이었다.
“아이, 진짜 급해요.”
“태화에 의사가 너 혼자냐? 장덕수보고 보라고 해. 뭔 과장이 주니어 스탭처럼 굴어.”
해서 이현종은 부리나케 신현태를 잡아 끌고는 다른 참석 대상자들, 그러니까 총무과 인원을 바라보았다.
“이해해 줘요. 좀 이상해, 원래.”
“형. 그런 게 아니라니까.”
“어허어허, 공적인 자리에서 형이라니.”
“이거나 좀 보고 얘기해요.”
“보기는 뭘 봐…….”
이현종은 역시 의사들은 다 회의에서 도망갈 궁리만 하는구나.
문자에는 뭔 핑계를 써 놨나 하는 얼굴로 신현태의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장강명, 이 미친놈이?”
그리곤 이미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하고 있던 총무과 인원들의 눈 사이즈를 두 배는 더 키워 주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
“거봐, 형. 내가 괜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수혁이는 어딨대?”
“어…….”
“몰라요, 나가서 전화해 봐야지.”
“그래, 빨리 나가자.”
곤란해진 것은 괜히 따라 들어와 있던 호흡기 홍창기였다.
연구 끼워 준 이후로 괜히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는데, 거의 매번 이렇게 홀로 남겨지곤 했다.
“자자, 일단……. 일단 저한테 얘기하시죠…….”
그렇다고 같이 화를 내기엔 아직 끗발이 좀 많이 달렸다.
‘차기…… 교육수련부장이라 이거지?’
그리고 신현태가 던져 준 미끼가 너무 탐스럽기까지 했다.
현 교육수련부장 양원준 교수가 차기 기조실장으로 거론되는 마당 아니던가.
그 말은 곧 이것만 잘 받아넘기면 차차기 기조실장이라는 뜻이었다.
이번처럼 바루다 건으로 누군가를 날려야 되는데 원장이 너무 거물이라 기조실장이 날아가는 경우만 아니면, 원장 직행버스 탄 게 바로 기조실장이기도 했다.
“수혁이는 어딨어?”
“걔요? 이제 외래라는데.”
“아니, 걔는 뭔 일만 터지면 외래야?”
“일이…… 일이 터진 건 아니죠…….”
“아무튼, 모여. 셋 중에 하나한테 가는 건 내가 참겠어. 근데 딴 데로 가는 건 안 돼.”
정작 홍창기가 그토록 되고 싶어 하는 원장인 이현종은 수혁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사이, 자신이 무슨 파란을 일으켰는지 전혀 모르던 수혁은 외래 진료실에 있었다.
응급실에서 걸려 온 전화통을 붙잡고서였다.
“미안합니다, 원래는…… 여기 안대훈 선생이나 우하윤 선생한테 전화 걸라고 했어야 하는데. 오늘 무슨 날인지 손이 안 나서요.”
“아뇨, 아닙니다. 선생님. 어떤 환자죠?”
전화를 건 이는 응급의학과 펠로우, 털보였다.
한때는 악마 아니, 지금도 다른 이에게는 악마였지만.
수혁에게는 더없이 온순한 그는 무척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 혈변으로 왔는데요.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그렇지, 응급실에서 볼 정도는 아니거든요.”
“바이털이 어떤데요?”
“혈압이 119에 70이고 심장박동 수도 70정도입니다. 액티브 한 거 같진 않아요.”
“아……. 네.”
“외래로 좀 접수해서 보시라고 안내해도 될까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응급실이…….”
“알겠습니다. 볼게요. 보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