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배도 아프고 (3)
“네? 5년 전 슬라이드를요?”
병리과에 도착한 수혁이 마주한 것은 황당한 얼굴을 한 기사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몇 달 전도 아니고, 5년 전 슬라이드라니.
심지어 만으로 5년이 지났기 때문에 사실 의료법상으로는 폐기해도 됐을 슬라이드이기도 했다.
태화 의료원씩이나 되니까 보관하고 있지, 작은 병원이었다면 아마 벌써 폐기물 통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터였다.
물론 태화를 비롯한 대학 병원에서는 연구 또는 후향적 진료 등 다양한 목적으로 슬라이드를 보관하고 있었다.
“네, 환자 진단에 꼭 필요해서요.”
“기록 보니까……. 이수혁 선생님 환자도 아닌데요?”
“인계 기록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제까지는 제가 보던 환자입니다.”
“그러니까 어제까지는 그런데…….”
기사는 산더미처럼 슬라이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창고방을 힐끔 돌아보았다.
수술한 지 얼마 안 된 환자라면 요청자에게 번호만 알려 주고 찾아오라고 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저 창고방은 본인이 직접 가야 했다.
귀찮았다.
‘칠성 병원은 디지털 사진으로 만들어서 보관한다던데…….’
그냥 슬라이드째로 보관한다는 게 이렇게 찾아야 할 때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었다.
그 슬라이드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도 큰 문제였다.
특히 태화 의료원처럼 각종 수술을 하루에도 수백 건씩 진행하는 병원은 그만큼의 검체도 쏟아져 나온다고 보면 되었다.
그게 5년을 넘어 10년도 넘게 쌓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언제 쓰일지도 모르는 유리 조각에 방을 하나씩 넘겨주어야만 했다.
[귀찮아하네요?]
‘아, 이런 거 싫은데.’
반면 바루다는 빠른 스캔을 통해 기사의 표정을 읽어 냈다.
예전엔 곧잘 틀리기도 했는데, 이젠 아니었다.
바루다의 표정 분석은 상당히 신뢰할 만한 수준에 이른 지 오래였다.
해서 수혁은 고개를 틀어 우둑하고 뼈 소리를 한번 내고는 아까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요…….”
아니, 열려고 했다.
정영훈 교수가 다가오지만 않았다면.
“어, 이수혁 선생.”
“엇.”
그의 인사에 제일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병리과 기사였다.
수년을 같이 지낸 기사들은 물론이고, 가르침을 줘야 하는 레지던트들에게도 인사 건네는 걸 어색해하는 것이 정영훈 교수 아니던가.
정신건강의학과에 계신 저명한 교수 중 하나인 오진승 교수의 진단에 따르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했다.
지능은 정상 또는 우수한 축에 속하지만, 사회성은 떨어지는.
무례한 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과 소속이라면 그 누구라도 동의하는 바였다.
“아, 안녕하세요. 정 교수님.”
“무슨 일로 왔지?”
정영훈 교수의 말투는 영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굳이 비교 대상을 찾자면 맨 처음 바루다가 머리에 박혔을 때 들려오던 바루다의 기계음 정도일 지경이었다.
[진짜 사람이 저보다도 기계 같군요.]
수혁은 바루다의 판단을 애써 무시한 채 정 교수를 향해 몸을 틀었다.
“아……. 지금 내과 환자 중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발열 및 폐 질환 그리고 급성 무결석 담낭염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있는데, 그 환자가 5년 전 본원 흉부외과에서 흉강경하 폐 부분 절제술을 받았습니다.”
“음, 계속해 봐.”
정영훈 교수는 이미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듯 눈까지 감았다.
언뜻 보면 바루다와 대화 중인 수혁과 닮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수술 전에 의심했던 질환이 염증성 가성 종양이었고, 조직 검사 결과도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현재 나타나는 증상이 모두 하나의 원인에 의한 거라고 한다면, 그 조직 검사 결과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번 다시 보려고 합니다.”
“아.”
다시 말하면 너네가 남긴 의견을 못 믿겠으니까 어디 내가 한번 다시 봐 보겠다, 뭐 이런 뜻이었다.
아마 다른 병리과 교수가 이 말을 들었다면 화를 내든지 했을 터였다.
하지만 정영훈은 달랐다.
그는 사람보다 바루다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임상적 정보가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잘못 나갈 수 있지. 그게 언제 한 수술이지?”
“5년 되었습니다. 판독 소견서 보면……. 슬라이드 넘버는 20150128#29입니다.”
“오래되긴 했네. 그래도 지금 환자가 있으면 봐야지. 기사님, 찾아 주실 수 있나요? 같이 보려고 하는데.”
정영훈 교수는 이전 수혁의 활약에 깊이 감복한 바 있지 않은가.
때문에 수혁이 뭔가 재미난 의견을 가져오자 급격히 관심이 기울었다.
소속과 교수, 그것도 주니어도 아니고 정교수의 지시였다.
기사로서는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네, 교수님. 찾아오겠습니다.”
“네, 그…… 2번 판독실로 가지고 와 주세요. 세팅하고 있을게요.”
“네.”
“감사합니다.”
정영훈 교수는 그런 기사에게 교수로서는 실로 드물게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기사에게는 그게 꼭 예의 바르게만 보이진 않았다.
어쩐지 어색함의 발로 같았다.
‘와, 나 여기 취직하고 정 교수님이랑 오늘이 제일 오래 얘기한 거 같네.’
심지어 신규 채용 기념 회식 날에도 한마디 정도 나눈 게 다였다.
서로 도와 봐요, 우리라고 했던가.
돕자고 했던 것치고는 다음 날 인사부터 어색하게 씹고 지나가서 당황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이수혁 선생. 그쪽에 앉으면 돼요. 현미경 다루는 게 익숙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조작은 교수님께서…….”
“그렇죠. 근데 뭘 의심하는지 알아야 보기가 더 편할 거 같아요.”
당연한 얘기였다.
병리과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조직 검사하면 당연히 100% 정확한 검사 결과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사람 조직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다르게 생기진 않은 법이었다.
상상 속의 암세포야 끔찍하기 그지없겠지만, 실제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이게 암세포라고?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란 뜻이었다.
때문에 임상적 정보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모르죠? 망신당하지 말고 물어보세요. 이젠 말해 줄 테니까. 어휴, 이거…… 수혁의 명성이 곧 바루다의 명성이니 어렵군요, 어려워.]
그와 동시에 바루다가 성화를 피워 대기 시작했다.
어떤 연유에서건 수혁이 자신이 떠올린 질환을 생각진 못할 거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애걸복걸하는 대신 그저 웃었다.
‘공부한 내용에 있더만.’
[있으니까 데이터화 됐죠. 근데 모르겠…… 응.]
그리곤 바루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입에 올렸다.
“이뮤노글로불린 G4 관련한 섬유경화증(IgG4-related fibrosclerosis)입니다.”
그와 동시에 바루다의 얼굴에 경악이 차올랐다.
이뮤노글로불린 G4 관련한 섬유경화증.
이름만 봐도 딱 드물게 생기지 않았는가.
평생 대학 병원 내과에 있어도 한 번도 못 보고 은퇴할 가능성조차 농후한 질환이었다.
근데 그게 수혁의 입에서 툭 하고 튀어나올 줄이야.
“아……. 어떤 것 때문에?”
[알아, 이걸?]
바루다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덤덤하게까지 느껴지는 정영훈 교수의 대꾸였다.
제아무리 기계 같은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진짜 기계는 아니지 않은가.
모르거나 낯선 질환명을 들었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당황은 했을 터였다.
“우선 가성 종양으로 오인될 수 있는 질환 중 하나입니다. 특히 임상에서 이 질환이 침범한 범위를 폐 하나만 찾았거나, 혹은 아직 폐에만 침범한 경우에는 오진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갑니다.”
“그렇지.”
정영훈 교수는 머릿속으로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또 그 무엇보다 자주 들여다보았던 슬라이드 소견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문장 따위를 기억해 낼 필요도 없었다.
지금처럼 불러낸 슬라이드 두 장을 머릿속에서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수혁의 말이 옳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또 하나는 환자가 지금 보이고 있는 임상 양상입니다.”
“어떤 게 있지?”
“우선 무결석성 담낭염이 있습니다. 결석도 없는데 담낭염이 생기는 경우는 사실 드물죠.”
담낭염이 생기는 가장 흔한 이유는 담석이었다.
흔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모자랄 지경이었는데, 약 90% 정도가 이에 해당할 정도였다.
애초에 담낭염이란 게 담낭 안에 만들어진 쓸개즙이 어떤 원인에서건 막혀서 못 빠져나가서 생기는 질환이기 때문이었다.
돌이 있으면 담낭관을 덜컥 막기도 쉽지 않겠는가.
해부학 및 생리학적 원리를 생각하면 굳이 외울 필요도 없었다.
정영훈 교수는 그러한 사실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IgG4-related fibrosclerosis는 담낭관을 좁게 만들 수 있죠. 좁아지면 담낭염도 생길 수 있고요. 게다가 이런 담낭염은 항생제에 잘 치료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환자가 보이는 임상 양상하고 비슷합니다.”
“으음……. 그렇군요. 또 다른 이유는?”
꽤 그럴싸한 답변이었지만, 정영훈 교수의 질문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무턱대고 받아들이기엔 질환 자체가 너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냥 각기 다른 원인으로 폐 병변과 담낭염이 생겼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일 수도 있을 지경이었다.
다른 레지던트였다면 이 정도의 답변도 못 했겠지만.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교수가 만족 못 하면 적잖이 당황했을 터였다.
물론 수혁은 달랐다.
“환자는 장 유착증에 대해 복강경으로 수술받은 병력이 있습니다. 당시 수술 기록을 보면 유착 밴드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는 애매한 의견만 있는데……. 이것도 IgG4-related fibrosclerosis를 대입해 보면 설명이 됩니다. 이 질환에서는 흔한 증상 중 하나가 장 유착이니까요.”
“좋네. 또?”
“폐의 CT 소견도 거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조직 검사했던 조직에 대해 리뷰만 해 보면 진단이 나올 거라고…….”
“슬라이드 왔네. 알았어요. 종합해서 보도록 하죠.”
“네.”
정영훈 교수는 건네받은 슬라이드를 현미경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이리저리 뒤적거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보이긴 하는데. 부족해요. 여전히 이 소견이면 가성 종양을 줄 거야, 나는.”
“아……. 그런가요?”
수혁은 바루다와 거의 비슷한 얼굴이 되어 정 교수를 바라보았다.
같이 슬라이드를 보았지만, 솔직히 병리 슬라이드를 병리과 교수보다 잘 본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않은가.
제아무리 그럴싸한 논리를 쌓았다고 해도 병리과 교수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었다.
임상적 고려가 적은 것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해서 풀 죽은 얼굴로 일어나려는데, 정영훈 교수가 말렸다.
“잠깐, 잠깐만요. 아직 확신하긴 어려워요. 염색을 한번 해 보죠.”
“네?”
“제가 과장님이 칠성 병원처럼 디지털화하자고 하는 거 괜히 반대하는 게 아니거든요. 자, 보세요.”
“어……. 네.”
염색이라니.
이렇게 갑자기 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교수가 하겠다는데.
해서 좀 기다리고 있으려니, 정 교수가 다시 돌아왔다.
어쩐지 서두르는 느낌이었는데 마치 택배라도 온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슬라이드를 내려놓고는 두 손을 싹싹 비벼 가며 입을 열었다.
“어디 볼까요?”
“네? 아, 네.”
수혁도 바루다도 열심히 슬라이드를 살폈다.
염색했다더니 아까랑 좀 달라진 거 같긴 했다.
하지만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속담만 떠오를 뿐, 다른 판단이 서진 않았다.
그건 정영훈 교수의 몫이었다.
“와. 염색 양성이네. 진짜 IgG4-related fibrosclerosis예요. 맞아요,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