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배도 아프고 (4)
“흐음……. 이거 진짜 림프종 가능성 두고 봐야겠는데.”
수혁이 막 정영훈 교수와 전혀 다른 진단명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쯤, 대훈은 장강명 교수와 함께 소화기내과 스테이션에 앉아 있었다.
장강명 교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방금 찍은 복부-골반 CT와 이제 막 병실로 돌아가고 있는 환자를 돌아보았다.
영상을 보면 장들이 전반적으로 다 두꺼워져 있었다.
일시적이라고 보기엔 이전에 찍은 CT에서도 그랬다.
이 말은 곧 느리게 자라는 림프종의 가능성을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는 뜻이 되었다.
“네, 범발성으로 장벽이 두꺼워져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장 유착 증세를 보여 림프종의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폐 쪽은 사진을 보면 다발성 폐렴이나 이전에 수술에서 제거했던 염증성 가성 종양이 악화되었을 가능성도 있고요. 지금으로서는 염증성 가성 종양의 악화가 더 의심됩니다.”
“음.”
제법 똘똘한 노티였다.
아니, 1년 차 수준을 한참 벗어난 노티였다.
장강명 교수는 꽤 감탄한 얼굴로 안대훈을 돌아보았다.
‘이수혁도 이러더니, 요새 우리 애들 수준이 좀 올랐나?’
혹 자신을 비롯한 교수들의 교수법이 확 좋아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마냥 그렇다고 하기엔 다른 애들의 수준이 마음에 걸렸다.
태화 의료원 내과에 들어온 만큼 크게 떨어지는 녀석들이야 당연히 거의 없었지만.
몇 년 전보다 눈에 띄게 좋아진 느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번에 들어올 1년 차들 그러니까 우하윤 그레이드는 처지는 느낌마저 있었다.
태화 의과 대학 출신들이야 당연히 모교 병원이 태화 의료원으로 몰렸지만.
타 대학에서 오던 인재들이 대거 칠성과 아선으로 몰려간 탓이었다.
‘그냥 얘가 똑똑하다고 봐야겠지.’
반면 대훈은 감탄한 듯한 장강명의 얼굴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고, 같은 연차 중에서는 제일 잘한다고 자부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방금 말한 건 죄다 아까 수혁이 읊어 주었던 내용이었다.
거기에 덧붙인 건 이미 들은 진단명에 CT 소견을 끼워다 맞춘 것뿐이었다.
결국, 대훈의 사고 회로는 기승전 수혁으로 마무리되었다.
‘역시 수혁 선배가 짱이야. 그냥 주워들은 것만으로도 교수님이 이런 반응이라니.’
환자의 경과를 생각해 보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장강명 교수가 직접 경피적 담낭 배액관을 꽂았음에도 불구하고 악화일로만 걷고 있는 중 아닌가.
그나마 없던 열에 호흡곤란, 기침, 가래까지 발생한 마당이었다.
아무도 굳이 입에 올리고 있진 않았지만.
장강명이나 안대훈이나 환자가 죽을 수도 있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 병동에 계셨네요.”
토의는 이쯤에서 대강 마무리하고 환자에게 가려던 장강명 교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수혁이었다.
“오, 수혁아. 아니, 이수혁 선생.”
반가운 마음에 그만 반말까지 던져 버리고야 말았다.
아마 이걸 이현종이 듣는다면 난리법석을 피울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소주병으로 머리 깰 기세 아니었던가.
겨우겨우 술 올리면서 어르고 달랜 마당에 초를 칠 뻔했다, 이 말이었다.
해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으려니 수혁이 천천히 다가왔다.
딸각.
지팡이를 짚어 가면서였다.
익숙해진 덕에 빨라졌다고는 하지만, 그건 본인만 느낄 수 있는 종류의 향상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어이구, 넘어지겠어. 왜 이렇게 서둘러?”
“교수님, 띄워 놓으신 거 혹시…….”
“어? 어어. 맞아. 환자 사진이야. 방금 찍고 왔어.”
“저도 잠시 봐도 괜찮을까요?”
“응? 그렇지. 근데…… 너 호흡기 아니니?”
“이 환자는 좀 마음에 걸려서요.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어서. 드물잖아요, 이런 일은.”
“어……. 어, 그렇지, 그래.”
환자가 안 좋아지는 게 드물다라.
이 녀석이 이제 막 1년 차 된 애송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주치의 2년 꽉 채워 가는 놈이지 않은가.
‘확실히 뛰어난 애는 다르구나……. 나도 너 같은 의사면 좋겠다, 야.’
비단 장강명 교수뿐 아니라 다른 의사들 모두 가슴에 한둘쯤은 품고 사는 법이었다.
죽도록 노력했는데, 정말이지 밤잠 설쳐 가며 애를 썼는데도 속절없이 죽어 가 버린 환자들.
쓰디쓴 경험들이 밑거름이 되어 소위 바이털과 그러니까 사람 생명을 다루는 과의 의사로서의 소명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배우고 또 체감하기 때문이었다.
장 교수는 이날이 오기까지 그게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믿어 왔더랬다.
그런데 수혁이 그걸 바닥부터 흔들고 있었다.
정말 괴물 같은 놈은 환자의 죽음을 거의 겪지 않는 모양이었다.
드르륵.
수혁은 장강명의 경악을 뒤로한 채 스크롤을 굴렸다.
[이 역시 IgG4-related fibrosclerosis에 합당한 소견이군요.]
복부-골반 CT에서 환자의 담낭관은 좁아져 있었고, 장벽은 부어 있었으며 여기저기 좁아진 부위들도 눈에 띄었다.
모르고 보면 림프종이 제일 먼저 떠오르겠지만.
한번 IgG4-related fibrosclerosis을 염두에 두고 보면 어떻게 봐도 그렇게만 보였다.
게다가 수혁은 방금 정영훈 교수와 함께 병리과 소견까지 보고 온 마당 아닌가.
확신에 확신을 더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혁이 입을 열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교수님, 환자…… 스테로이드 치료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확신을, 그리고 반전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탓이었다.
오랜 경험을 통해 수혁은 같은 케이스라도 어떻게 얘기하느냐에 따라 임팩트가 달라진다는 것을 배워 온 바 있지 않은가.
장강명도 그렇지만, 이 자리에 있는 안대훈에게도 한껏 존경심을 끌어올리고 싶었다.
[이런 걸 관종이라고 하나요?]
‘관종이라니. 정치적이라고 해 줄래?’
[사회 통념상 정치적이라는 말도 그리 긍정적으로 쓰이진 않는 거 같습니다만.]
‘그렇긴 한데, 그래도 정치적인 사람이 빨리 성공하더라. 안 그런 거 같냐?’
[하긴……. 이현종 원장도 정치적이었으면 더 빨리 원장이 됐겠죠.]
뿐만 아니라 향후 행보도 훨씬 길이 트였을 터였다.
보건복지부 장관도 충분히 넘볼 수 있는 업적을 세웠으니까.
하지만 이현종은 자신의 정치적 재능을 오로지 수혁을 위해서만 쓰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쪽으로는 젬병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만 불러일으키고 있었디.
아마 원장 후에는 그저 석좌 교수로 남아 진료만 보지 않겠냐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스테로이드?”
수혁은 이현종을 너무 좋아하고 또 존경하지만.
그보다 더 쉽게 가고 싶다는 생각 또한 있었기에 약간의 연기 정도는 늘 첨가하고 있었다.
“네, 스테로이드가 필요합니다.”
“어…….”
그 희생양이자 타깃이 된 장강명으로서는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지금 림프종과 폐렴 또는 가성 종양을 의심하고 있는 데다가 떡하니 무결석 담낭염이 있는데 스테로이드를 쓰자고?
이건 숫제 환자를 죽이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직전에 환자 나빠진 것이 드물다고 한 놈치고는 너무 성급한 판단 같았다.
[이제 슬슬 터시죠?]
‘오케이.’
물론 장강명의 놀라움은 다 계산된 것이었다.
수혁은 네가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환자는 5년 전 가성 종양이 의심되어 흉강경하 폐 부분 절제술을 했습니다. 당시 장 유착증이 있어 복강경하 유착 제거술도 받았습니다.”
“그거야 알지.”
“근데 유착증에 대해서는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죠.”
“유착의 원인은 워낙 다양하지 않니. 수술 기록 보면 밴드 형성이라고 되어 있긴 했는데.”
“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환자가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복통을 호소했다는 점입니다. 수술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작으니, 재발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죠. 장 유착증을 재발하게 하는 요인은 극히 한정적입니다.”
“그래서 느리게 자라는 림프종을 생각했는데…… 네 생각은 다른 거야?”
이어지는 수혁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청산유수 같은 말을 듣다 보니 장강명 또한 어느새 불안감보다는 궁금증이 일었다.
수혁은 바루다의 도움을 받아 장강명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분위기를 조였다 푸는 것이 거의 예술이었다.
“느리게 자라는 림프종 또한 가능성이 있는 질환이긴 합니다만……. 무결석 담낭염 및 폐의 병변이 전혀 설명되지 않지 않습니까? 각각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중첩돼서 오는 경우는 너무 드뭅니다. 특히 폐의 병변은 이상하죠. 항생제를 쓰고 있는데 악화된 것이니까요.”
“그건…… 그것도 그래. 흠, 그래서 네 의견은?”
“이것 역시 드문 병이긴 합니다. 하지만 모든 증상이 설명되는 병이죠.”
“뭔데, 뭔데 그래.”
“IgG4-related fibrosclerosis입니다.”
“IgG4-related fibrosclerosis?”
교수인 장강명에게조차 생소한 질환이었다.
당연히 옆에 있던 안대훈은 멍한 얼굴이 되고야 말았다.
생소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음 듣는 질환이었다.
“네, 자가 면역 질환의 일종으로…… 이 환자의 증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항생제를 쓰는데도 악화된 것 또한 설명할 수 있죠.”
“하지만 그에 대한 검사가 안 되었잖아? IgG4 관련한 거라면 혈장에서 해당 수치가 올라가 있는지 정도는 봐야지.”
“네 처방은 나가야 합니다만, 그러기엔 환자 상태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폐 기능이 셧다운 되면 사망할 겁니다.”
“그렇다고 스테로이드를 쓰자고? 그건 너무…….”
스테로이드는 강한 약이었다.
일반인에게도 고용량으로 쓰기엔 부담이 될 정도였다.
지금 이 환자처럼 쇠약해진 상황에서 썼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근거를 찾기 위해 5년 전 절제한 폐 조직 병리 슬라이드를 리뷰 했습니다.”
“어?”
“감사하게도 정영훈 교수님께서 도와주셔서 염색까지 했고 해당 질환이 맞음을 최종 확인했습니다. 이 환자는 IgG4-related fibrosclerosis입니다.”
“허?”
병리과 슬라이드를 확인했어?
그것도 5년 전 거를?
“너…… 너는 정말…….”
지금 주치의를 맡고 있다고 해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성이고 추론이었다.
그런데 이미 다른 과를 간 녀석이 이렇게까지 해?
‘소화기내과에 뜻이 있나!’
이런 착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야……. 정말 인재다. 인재. 소화기에 너 같은 애 들어오면 당장 센터장 넘겨줄 수도 있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냐……. 어, 그렇다고 이거 아버지한테 말하진 말고. 야……. 소화기내과로 꼬실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엄청 예민해.”
“맨날 저 원하는 거 하라고 하시긴 하는데, 아무래도 순환기 하기를 원하시는 거 같아요.”
“나라도 그렇지. 너 같은 아들 있으면…….”
왜 우리 아들은 이러지 못할까?
장강명 교수는 잠시 죄 없는 자식을 원망하다가 이내 고개를 털었다.
콩 심은 데 콩 난단 말 있지 않은가.
자신을 닮아 그럴 터였다.
잠시 장강명 교수가 자아 성찰에 빠진 사이, 수혁은 몸을 일으켰다.
잘난 척은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제 다음 스케줄로 넘어가야 했다.
[과장실로 갑시다. 드디어 로우 데이터 넘겼던 게 돌아왔다고 합니다. 빨리 중환자실에 파일럿 프로그램 깔아 봅시다.]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