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나왔다, 기기 (1)
“저 들어가도 될까요?”
수혁은 곧장 과장실로 달리다시피 한 후 문을 두드렸다.
덜컥.
두드리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는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좀 이상했다.
“잉.”
또 이현종이었다.
원장실이 훨씬 좋은데 왜 맨날 과장실에서 죽치고 있는 걸까.
바루다는 아마도 외로워서 그럴 거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의학이랑 결혼했다고 하지만, 의학이라는 게 늘 그렇게 살가운 대상은 아니지 않은가.
기울인 노력만큼 보상을 해 주는 녀석도 아니고.
그렇다 보니 타박해 가면서도 어찌 됐건 어울려 주는 신현태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이 바루다의 의견이었다.
“어, 아들. 들어와, 들어와.”
“네, 아버지. 아니, 원장님?”
“편할 대로 하라고, 편할 대로. 근데 난 이제부터 그냥 아들이라고 하려고.”
“아, 네……. 그럼 아버지…….”
“근데 여긴 병원이니까 넌 원장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네, 원장님.”
물론 수혁은 생각이 좀 달랐다.
이현종 같은 기인이 외로움을 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양반은 늘 그렇지만 대체 어쩌라는 걸까요?]
‘시키는 대로 하면 돼. 그럼 욕 안 먹어.’
[이렇게 제멋대로인데 원장까지 한 거 보면 정말 업적이 대단하긴 합니다.]
‘그렇지…….’
만약 이현종이 수혁이나 기타 아랫사람들에게만 이렇게 했다면 생각이 달라졌겠지만.
이현종은 정말이지 차별이라곤 모르는 사람이었다.
태화 생명 사람들에게도 종종 이렇게 대해서 예전엔 부원장이 진땀을 흘렸고, 그 사람이 날아간 후에는 신현태가 진땀을 흘렸다.
“호칭 정리는 이따 하시고 일단 앉읍시다. 그렇지 않아도 저쪽에서 데이터 수집 늦어져서 좀 지체됐다고 성화예요.”
“이미 몇 개월 단위로 밀렸는데 몇 분 수다 떠는 게 문제냐?”
“그런…… 그런 문제가 아니라 우리 태도를 좀 바로 하자, 이거지. 솔직히 우리 다 소홀히 했던 건 사실이잖아요.”
“나야 원장이잖아. 어휴……. 어찌나 바쁜지, 이거야 원. 경영이라는 게 이게 보통 일이 아냐.”
“지금도 회의 빠졌잖아!”
“얼마나 머리가 아프면 이러니, 내가. 아무튼, 서두르자며…… 하자고, 이거.”
이현종은 더 회의 얘기 꺼내면 죽을 거 같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어 댔다.
신현태는 이 양반이 있어 든든한 건 사실이었지만, 역시나 수혁이 교수만 되면 몰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홍 교수, 조 교수도 집중하라고.”
“네.”
“네, 과장님.”
꽤나 진중한 얼굴이었기에 홍창기는 물론이고, 조태진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혁이야 완전히 자기 일이니만큼, 원래부터 그랬다.
이현종도 수혁의 일이라면 태도를 달리하기에 방 안 분위기는 삽시간에 차분해졌다.
신현태는 비로소 만족했다는 얼굴로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조작했다.
그러자 과장실 천장에 설치되어 있던 빔프로젝터가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애초에 벽 하나 전체가 희게 만들어져 있어서 바로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었다.
“보면…… 우리가 좀 늦기는 했어도 데이터양 자체는 많았더라고요. 그리고 로우 데이터 정리한 것도 질이 좋았고. 이거 수혁이가 다 한 건 아니지? 안…… 안 누구더라?”
“안대훈 선생이랑 우하윤 선생이 도와줬습니다.”
“아, 안대훈. 1년 차지. 근데…… 우하윤 선생은 아직 내과 아니잖아. 요새 이런 거 하다가 걸리면 난리 나는데?”
“저도 그렇게 말했는데……. 제가 하는 연구라니까 껴 달라고 요청해서요. 2저자 하나씩 쪼개서 주기로 했습니다.”
“뭐, 네가 알아서 잘했겠지.”
신현태는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애정을 담뿍 담은 눈빛을 발사했다.
“야, 경고야. 경고. 내 아들한테 그러지 마.”
“형이나 그러지 마요. 갑자기 호칭까지 바꿔?”
“니들이 불안하게 하니까 그렇지? 수혁이는 수혁이가 원하는 걸 해야 되는데……. 어? 니들이 이러면 원하지도 않는데 감염내과 갈 수도 있다고.”
“원할 수도 있지, 뭘.”
“내 이런 말까지 하려고 안 했는데, 감염내과 훅 간 지가 언젠데…….”
“와, 이 형……. 내가 늘 그러죠? 수혁아, 빙하가 녹고 있다. 고대 바이러스 알지? 게다가 초연결 사회야. 팬더믹 온다……. 우리나라 날씨도 변하고. 감염내과의 시대가 와.”
둘은 한동안 투닥대다가, 홍창기와 조태진이 격렬하게 헛기침을 해 댄 후에야 다시 발표로 돌아왔다.
제일 높은 양반 둘이 이러고 있으니 어째 좀 불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디까지 했지. 아, 맞아. 데이터가 양이 방대하고……. 수술 후 데이터까지 있어서 단순히 패혈증 예측 기기로서만 쓰이지 않을 거 같더라고. 물론 유의미한 데이터 산출이야 패혈증에만 쓰이긴 할 텐데, 잘 봐 봐, 이거. 신기하더라.”
신현태는 연구 책임 교수로서 얼마 전 태화 전자 본사를 다녀온 참이었다.
거기서 이것저것 직접 설명을 들었는지, 제법 익숙하게 프로그램을 다뤘다.
“이게 데모로 넣은 환자 데이터 중의 하나인데. 흉부외과 수술 후 환자를 넣어 보자. 자, 보면 지금 혈압이 98에 65고……. 심장박동 수는 억지로 낮춰 놨네. 62회. 체온이 37.9. 잉, 왜 열이 나?”
“뭐 하냐, 너.”
그 익숙하다는 게 이 중에서 그렇다는 게 좀 문제긴 했지만.
신현태는 결국, 압도적인 내과적 지식으로 테크닉 부족을 극복했다.
“내가 데이터를 좀 잘못 고르긴 했는데, 뭐 수술하고 탈수된 상황이겠지? 호흡수야 벤틸 걸었으니까 의미 없고. 이 환자에게 패혈증 예측 프로그램 돌리는 것도 의미가 없을 거야. 감염으로 입원한 환자가 아니니까, 그렇지?”
“네, 교수님.”
“네, 과장님.”
“왜 반말해?”
중간에 좀 부적절한 반응도 있긴 했지만.
신현태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 그럼 수술 후 설정으로 넣고……. 지금 쓰고 있는 약까지 입력하면, 짠. 타깃 혈압 범위가 뜨지? 이 이상으로 가면 알람이 울려. 이 환자 맞춤 설정으로 된 거야.”
“오……. 이게 돼?”
“완전하지는 않더라고요. 파일럿 만들기에는 데이터가 많았는데,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도움을 받기엔 또 좀 모자라데. 그건 우리가 파일럿 돌리면서 러닝 시켜야 되는 부분이야. 얘가 뻘짓 하면 직접 우리가 수정해서 넣어야 하고.”
“오호……. 그래도 이거 되면…… 좋겠는데?”
제일 비상한 관심을 보인 건 의외로 제일 삐딱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이현종이었다.
아무래도 순환기내과다 보니 심장을 다뤄야 하지 않는가.
변화무쌍한 변화에 골머리가 썩고 있었는데, 이렇게 조금이라도 쓸데없는 콜을 걸러 줄 수 있다면 커다란 도움이 될 터였다.
만연해 있는 의료진 부담을 덜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이 기능은 보조예요. 아시겠지만 패혈증 발생 가능성하고 패혈증 사망 위험 예측을 MEDS score를 적용한 인공지능으로 해내는 게 이 프로젝트의 목표니까요.”
“그거에 집중하자, 이거지?”
“네. 아무래도 이현종 원장님보다는 저랑 호흡기 홍창기 교수……. 그리고 조태진 교수 정도가 메인이 되겠죠.”
“야,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나를 왜 빼.”
“원장님은 감염 잘 안 보잖아요.”
“나도 심내막염 보거든?”
신현태는 볼멘소리를 내는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계속 두었다간 깽판이라도 칠 거 같은 얼굴이었다.
설마 저 나이대 교수가 그럴까 싶겠지만.
이현종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기도 할 수 있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어차피 공동 연구니까 다 같이 하는 거예요. 로우 데이터처럼 수혁이한테 싹 밀지 말고……. 각자 환자는 각자 하자고. 수혁이가 취합해서 돌리긴 할 텐데, 그거 수월하게는 해 줘야지.”
“당연하죠.”
“네, 과장님.”
“나도 엑셀 만지라고?”
“방금 하겠다며.”
“알았어, 알았어. 눈을 부라려…….”
신현태는 그냥 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수혁의 부담도 줄어 주는 방향으로 연구를 틀었다.
원래 과장이 이렇게 나오는 경우도 없지만.
하자고 한다고 교수들이 따르는 것도 이상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잡음 하나 없었다.
수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수혁이지 않은가.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교수들은 죄 수혁의 팬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자, 그럼 프로그램 싹 깔고……. 사용법이 그렇게 어렵진 않아. 체크만 하면 되는데 얘가 알아서 하는 항목도 있고……. 패혈증 발생 가능성 자체는 잘 잡아, 인자가 간단해서. 근데 이제 사망 위험도 예측은 복잡하잖아? 그건 수기로 해 줘야 되는 부분도 있어.”
“오……. 알아서도 해요?”
“수치화되어 있는 거야 잘 잡지. 의무 기록도 읽게 되어있어. 적어도 우리 병원 EMR이랑은 연동이 되어 있거든. 근데 의무 기록 읽는 건 아무래도 에러가 있더라고. 우리가 그걸 티칭 하는 거야. 이거 만약 되면 우리 병원 케이스 싹 다 돌리면 되고 그럼…….”
“2003년에 나왔던 논문이 완성되겠네요. 수치 조정이 필요하면 조정도 하고.”
“그래, 단순히 기기만 만드는 게 아냐. 이걸로 새로운 예측 프로그램을 만들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NEJM도 꿈은 아냐.”
NEJM을 입에 담는 신현태의 얼굴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밖에서 보면 모든 것을 이뤘고 또 가진 것이 신현태였다.
장가도 잘 갔는데 심지어 화목한 가정도 이루지 않았는가.
직업적 성취 또한 태화 의료원 내과 과장이니 대단한 편이었고.
한 가지 한이 있다면 그게 NEJM이었다.
원래는 별생각 없었을 수도 있었는데, 하필 제일 가까이 지내는 인간이 이현종인 게 문제였다.
뭐만 하면 그래서 넌 NEJM에 냈냐, 이러는데 사람 환장할 노릇이었다.
“오……. NEJM…….”
“그거 정말…….”
홍창기나 조태진도 크게 반응이 다르진 않았다.
이현종이 어쩌다 회의에만 들어가면 노골적으로 NEJM 또는 그 급 이상에 논문 낸 사람들에게 일단 박수 치고 시작한 적이 여러 번이었기 때문이었다.
못 낸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는 말이 괜히 나도는 게 아니었다.
근데 이 논문이 그걸 해소시켜 줄 수도 있단 얘기 아니던가.
다들 한자리에 모여서 파이팅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놀고 있네. 1저자로 내든지 교신저자로 내야 의미가 있지. 홍, 조 너네는 꼽사리잖어.”
“어…….”
“아, 심장……. 심장 아파요.”
이현종은 그걸 가만히 두고 보고 있다가 묵직한 한 방을 남기고 과장실을 떠났다.
더 노닥거리기엔 환자들이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끼이익.
그렇게 무심히 닫혀 가는 과장실 문을 바라보던 조태진과 홍창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부터 쉬었다.
생각해 보니까 진짜 꼽사리가 맞기는 했기 때문이었다.
냉정히 따져 보면 이번 논문이 설령 NEJM에 실린다고 해도 진짜 내가 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수혁과 신현태뿐이었다.
‘솔직히 수혁이가 먼저 찾아온 게 나였으면…….’
둘은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며 신현태를 바라보았다.
“왜 날 그렇게 봐?”
원망에 찬 얼굴이었기에 신현태는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게 그렇게 오래가진 않았다.
둘의 시선이 수혁을 향해 돌아갔으니까.
“다음엔……. 다음엔 나랑 하자.”
“아냐, 나랑 하자…….”
이 방에서 제일 두꺼운 동아줄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