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20화 (220/1,303)

220화 나왔다, 기기 (2)

“어허, 이 사람들이 교수 체통을 지켜야지.”

“체통이 논문 써 준답니까.”

“그러니까요. 과장님이야 이제 해결된 거잖아요. 아니지? 이미 테뉴어 받았잖아요? 이거 순 개인적인 욕심…….”

조태진은 욕심까지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자기 잘못을 스스로 깨달아서는 아니었다.

그저 신현태가 사람 죽일 거 같은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말로 조지기까지 했다.

“선 넘네? 미쳤어?”

“아니, 아닙니다.”

“나가, 일단. 이거 완성하라고.”

“네. 네.”

하마터면 조태진 같은 실수를 할 뻔했던 홍창기도 도매로 묶여서 문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홍 교수는 일단 있고.”

“네?”

“일단 있으라고. 할 얘기 있으니까.”

“아……. 네.”

하지만 같이 나가진 못했다.

신현태가 굳은 얼굴로 그를 불러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불안해진 것은 도리어 조태진이었다.

“어……. 저 빼놓고 뭐 하시려고요?”

“뭔 소리야. 빼놓고 하기는 뭘 해.”

“이 방 안에 수혁이 없이 과장님이랑 창기만 있으면 뭐 커피나 마시겠거니 하겠는데……. 그게 아니잖아요. 또 무슨 훌륭한 논문, 억.”

해서 입을 털다가 쿠션에 얼굴을 얻어맞고 말았다.

워낙에 체격이 당당한 사람이었기에 아픈 내색조차 없었다.

오히려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신현태였다.

‘선배님들……. 태화 의료원 내과 명맥이 제 대에서…….’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선배가 뭐라고 하면 그 사람이 교수건 뭐건 딱 기강이 잡혀서 돌아갔는데.

‘그렇다고 팰 수도 없고…….’

팬다고 맞을 거 같지도 않았다.

2년 전의 조태진이라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그랬다.

아마 저 우람한 팔뚝으로 손목을 낚아챌 터였다.

어쩌면 안다리 후리기 같은 고급 기술을 걸 수도 있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일단 나가.”

“논문 얘기 아니죠? 그럼 저 섭섭해요.”

“아니라니까? 제발 나가라, 좀.”

“네, 믿습니다.”

“하.”

해서 그냥 내보내기로 했다.

말을 안 들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조태진은 수혁에게 눈길 한 번만 주고는 순순히 밖으로 향했다.

그사이 홍창기는 어색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양반이 대체 여기 왜 오라고 했나 싶었다.

“어디 보자…….”

신현태는 즉시 말해 주는 대신 책상 위를 뒤적거렸다.

“옳지.”

그러더니 웬 종이 한 장을 꺼냈는데, 계약서였다.

“여기 사인해.”

“네?”

“사인하라고.”

“읽어는…… 읽어는 봐야죠.”

“별 내용 아냐.”

“양도…… 뭘 양도한다는데 무슨 별 내용이 아닙니까.”

홍창기는 저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 계약서를 부리나케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태화 전자에서 펀딩 받은 돈으로 만드는 A.I. 로열티에 대한 내용이었다.

“어……. 그러니까 제 권한을 다 수혁이한테 일임한다, 이거죠?”

“그래. 그거 솔직히 몇 푼 안 될 거 아냐. 네가 먹어서 뭐 해. 세금만 나가지. 그냥 다 수혁이 줘. 수혁이 돈 없어.”

“원장님 아들인데 돈이 왜…….”

“이 사람이 이거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논문에서 빼? 다시는 수혁이 얼굴 못 보게 해 줘?”

“어……. 그건, 그건 안 되죠.”

논문에서 빠지는 거야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다지만.

수혁이 얼굴 못 보는 건 좀 너무한 조건이었다.

수혁과 함께 있다 보면 언제라도 이거보다 더한 논문도 쓸 수 있을 테니까.

‘나중에 모르겠는 환자 생기면 물어볼 수도 있고.’

한낱 레지던트한테 물어보길 뭘 물어보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이 녀석이 해결한 난제들을 생각해 보면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1년 차 때까지만 해도 대견한 수준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경악스러운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미친놈이었다.

좋은 쪽으로.

“그럼 사인해.”

신현태는 뭐라도 맡겨 놓은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계약서를 두드렸다.

홍창기로서는 황당하기만 했는데, 더 환장할 것은 거부할 도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수혁이 이 자리에 없으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잖은가.

“조태진은 했어요?”

“걔? 걔가 제일 먼저 했어. 여우 같은 놈. 수혁이 뺏어가려고.”

“네?”

“아니, 아냐. 사인이나 해.”

“와……. 이거…… 이건 내가 주는 거예요?”

조태진이 했다는데 자신이 빠질 수야 없지 않은가.

이미 호흡기내과로 꼬실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좋은 관계는 맺고 싶었다.

수혁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이었다.

해서 좀 티를 내기로 했다.

“수혁아, 이거 내가 주는 거다? 알았지?”

“아, 네. 교수님.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그래……. 너가 알아주니 됐다.”

“했으면 나가.”

“와….”

“나가.”

“와…….”

신현태는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홍창기까지 밖으로 내몰았다.

아무래도 홍창기가 조태진보다는 좀 고분고분한 편이었기에 이건 수월했다.

“수혁아.”

마침내 둘이 남게 된 신현태가 수혁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늘 그러하듯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덕분에 산 하나 넘었다. 일단 이걸로 이미 내가 화이자 쪽에는 넣어 놨어.”

“아…….”

“초록까지 다 내가 썼으니까, 넌 일단 그냥 있어. 아직 이게 포스터인지 발표인지는 안 나왔는데……. 거기서 답변 오는 대로 너한테 말해 줄게.”

“잉. 포스터나 발표는 이쪽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일반적인 학회는 그런데. 이게 네트워킹 형성하고, 펀딩 받는 거라 그런지 애초에 그것도 심사를 통과해야 하더라. 전화 통화했는데, 지금처럼 처음 집어넣는 사람이 캐파를 배정받고 시작하는 경우도 거의 없대. 네 덕분에 특혜받은 거야, 이거.”

“와……. 엄청 콧대 높네요.”

신현태는 잔뜩 놀란 얼굴의 수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얘는 지가 따와 놓고는 그게 얼마나 큰 건인지 모르네…….’

물론 아직 화이자에서 A.I. 쪽 펀딩에는 인색한 것도 사실이었다.

다국적 제약 회사에서 보자면 이쪽 시장은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을 뿐, 돈으로 치환되려면 멀었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화이자는 화이자였다.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신약 개발 쪽은 아예 회사를 통째로 사들이는 경우도 흔하디흔했다.

괜히 화이자와 같은 다국적 제약 회사들에서 매년 굵직한 신약이 튀어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돈과 인적 자원 투입을 아끼지 않았다.

기업 하나가 대한민국 정부 전체와 겨룰 만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업에서 허투루 하겠어? 이번에 태화도 이거 5억 주면서 난리 난리 치잖아. 나랏돈 태우는 거랑은 다르지.”

“아, 하긴……. 그렇겠네요.”

“그거 일정 당연히 해외 학회로 잡긴 해 볼 건데……. 너 두바이도 가잖아? 그거 한 달이라, 어쩌면 휴가를 써야 할 수도 있어. 일단 휴가는 좀 남겨 놔.”

“네, 그렇게 할게요.”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이거 흉부외과에도 전달해 줄래? 거기도 아마 좋아할 거야. 애초에 새로운 기능은 외과계 중환자실 용이라.”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수혁은 감사 인사를 끝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바루다는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기능 좋은데요? 이 깡통이 얼마나 배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넌 그냥 바로 가능하지?’

[저요? 저야 당연하죠. 눈으로 보고 바로 연산 돌리면 되는데.]

바루다의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수혁과 결합하는 바람에 세계 유일의 오감을 가진 인공지능이 되지 않았는가.

그냥 카메라 달린 거랑은 차원이 달랐다.

수혁의 뇌 기능을 일부 끌어다 쓰기에 온전히 사람이 인지하는 정도로 시각 정보를 처리할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인공지능들에 감정이 있고, 또 바루다를 인지할 수 있다면 다들 괴물 아니면 신이라 부를 터였다.

‘그러면 그거 이용해서 더 바르게 러닝 시킬 방법은 없어? 말이 딥 러닝이지, 데이터 진짜 많이 필요하다던데.’

수혁이라고 해서 로우 데이터만 넘기고 탱자탱자 놀고먹은 건 아니었다.

이미 써 놓은 논문이 하도 많아서 전문의 시험 자격 요건에 차고 넘칠 지경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게 논문화되는 순간 지금껏 수혁이 쓴 논문 중 가장 높은 점수의, 그리고 가장 의미 있는 논문이 되지 않겠는가.

최선을 다하는 의미로 환자 보는 중간중간 A.I. 특히 의료 A.I.에 대해 공부한 바 있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이 분야의 대부 최윤섭 박사와 친해지기까지 했더랬다.

[있겠습니까? 깡통인데. 저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 놈들이에요, 이놈들.]

그 덕에 바루다의 말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말이 좋아 딥 러닝이지, 뭐 하나 인공지능에 가르치려고 들면 품이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었다.

특히 그게 문서화 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게 아니라 영상이나 소리와 같은 데이터라면 막막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최근 영상의학과 쪽이 제일 연구가 활발하다고 하지만 엑스레이 외에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픽셀 하나하나를 설정해서 여기까지는 나쁜 놈, 여기서부터는 정상이라는 걸 가르쳐야 하지 않던가.

호기롭게 뛰어들었던 교수들 태반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병동이랑 중환자실에 싹 깔자. 응급실에도.’

[네, 처음에는 도움이 아니라 헷갈리게만 할 수도 있긴 한데……. 기능 자체가 간단하니까요. 언젠가는 되겠죠.]

‘어째 좀 불안해하는 거 같은데?’

[불안요? 이까짓 깡통 때문에? 농담도 잘하셔.]

‘하다 보면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거 아냐?’

[만약 제가 추월당하게 되면, 그 정도로 뛰어난 인공지능이 대중화되면 의사들 일자리 잃을걸요. 수혁 굶어 죽는다고요.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면서.]

‘아.’

이런 걸 두고 뼈 맞는다고 하는 걸까.

수혁은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막 아파 오는 몸을 주무르고 나서야 발걸음을 다시 옮길 수 있었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흉부외과 중환자실이었다.

이미 교수랑 안면 트고 지낸 지 오래인 데다가, 수간호사를 비롯한 시니어들에게는 주기적인 커피 조공을 통해 호감마저 얻은 수혁이었다.

“아……. 좋겠는데요?”

“그렇다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건 안 되고요. 아마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조정하긴 할 텐데…….”

“바쁘죠, 우리 과는. 저희가 할 수 있으면 해 볼게요.”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협조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도 부족한데, 일은 많아서 거의 병원에서 시달린다는 말도 부족할 거 같은 흉부외과에서 이걸 할 수 있을까 싶은 참이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응급실이야 뭐 하라고 하면 하겠죠.]

‘이런 말 내가 직접 하면 좀 그렇긴 한데……. 응급실은 그래야지. 내가 살려 준 환자가 대체 몇이냐?’

[게다가 원장님 아들이라는 걸 제일 의식하고 있기도 하고.]

‘그게 더 크긴 하겠다.’

처음엔 털보 이 자식이 왜 이러나 했는데.

미친 게 아니라 그냥 원장 아들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란 걸 알게 된 바 있었다.

그 후로는 더 당당하게 요구 사항이 있으면 말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이거 해 줘요. 다 깔아서 정리하면 됩니다.”

“어……. 그래, 그래. 도움이 되는 거지?”

“처음엔 에러가 좀 있을 거예요. 특히 알람 같은 건. 근데 패혈증으로 가는지 여부는 정확할 겁니다. 그건 계산이 간단해서요.”

“어, 감사…… 아니,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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