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편해져야 되는데? (1)
병원 내에 이 프로그램을 깔러 다닌 것이 수혁뿐만은 아니지 않던가.
원장인 이현종을 필두로 해서 여러 교수들, 그리고 그 교수들의 명을 받든 펠로우들, 거기에 더해 자발적으로 수혁에게 잘 보이고 싶은 교수들까지 달라붙은 바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원내 보안 프로그램에서 예외 사항을 걸든지 하는 아주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했을 터였고, 그랬다면 이렇게 빨리, 수월하게 깔 수도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태화 전자에서 만든 프로그램이니만큼 그런 건 자동으로 제낄 수 있었다.
‘확실히 태화 전자 쪽이 일 잘하네.’
수혁은 각 병동 및 응급실, 중환자실 등에서 보내오는 데이터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현종이 마련해 준 당직방 컴퓨터는 병원 내 다른 컴퓨터에 비해 성능이 훨씬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것 또한 태화 전자가 만든 컴퓨터였는데, 왜인지는 몰라도 바루다의 콧대가 높아져 있었다.
[그럼요. 누굴 만드신 분들인데. 기회만 되면 꼭 한번 뵙고 싶군요.]
‘그래, 뭐…….’
수혁은 굳이 바루다 프로젝트가 왓슨을 많이 참고했던 프로젝트란 것은 말하지 않았다.
뭐가 어찌 되었건 현시점에서는 바루다가 왓슨보다 훨씬, 아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뛰어나지 않은가.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왓슨은 폐기된 지 오래였다.
지금 당장은 바루다가 유일한 제대로 된 의료 목적 A.I.라고 보면 될 터였다.
띠디디디.
잠시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컴퓨터에서는 알람이 쉴 새 없이 울려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온 병동 환자들 데이터가 여기로 다 취합되고 있었으니까.
태화 의료원이 커다란 병원인 만큼 안 좋은 환자도 많지 않겠는가.
[근데 이거 계속 켜고 있을 겁니까? 한숨도 못 잘 텐데요?]
‘이상한 환자 뜨면 어떡해.’
[이 병원에 의사가 수혁 하나입니까? 어련히 알아서들 보겠죠. 자기 환자만 보기에도 빡센 밤입니다.]
‘그야 그렇긴 한데……. 신기하잖아.’
[저랑 24시간 붙어 있는 양반이 이런 게 뭐가 신기합니까? 의사 소통이라고 해 봐야 알람음 울리는 게 전부인데. 깡통입니다, 진짜 깡통.]
‘음.’
듣고 보니까 그렇긴 했다.
수혁은 지금 현대 과학의 총아 아니, 현대 과학을 넘어선 무언가와 매일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까짓 프로그램에 놀라는 건 채신머리없는 짓이란 생각도 들었다.
해서 우선 알람이나 끄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마우스를 집어 들었다.
[응? 잠깐만요.]
‘뭐야. 너도 신기해?’
[그럴 리가요. 여기 보세요. 지금 패혈증 위험 신호가 동시다발적으로 뜨고 있지 않습니까?]
‘어……. 그렇네.’
[어, 그렇네? 패혈증으로 진행하고 있는 환자가 6명이나 되는데 어, 그렇네?]
‘우리 병상이 2천 병상인데 6명이면 적은 거 아니냐?’
[아……. 그런가. 그래요, 끕시다.]
‘오케이.’
잠깐 바루다의 간섭이 있긴 했지만, 수혁은 미련 없이 프로그램 알람을 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크게 의미도 없는 알람이 태반일 터였다.
아직 패혈증 예측 말고는 딱히 완성된 프로그램도 아니니까.
그저 화이자 세미나 가기 전에나 완성이 된다면 다행일 터였다.
아까도 말했듯 딥러닝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바둑과 같이 가상의 대국을 무한정 시킬 수 있다면 꽤 빨라질 수도 있겠지만.
실제 환자 데이터를 넣어야 하는 의료용 A.I.에서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
“선생님, 협진 12개 와 있는데……. 우선 제가 보고 말씀 드릴까요?”
다음 날 호흡기 내과 병동에 가니, 1년 차 중 하나가 인사와 함께 협진 내역을 보여 주었다.
슥 훑어보니 퍽 심각해 보이는 환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긴 호흡기내과니까.
호흡기내과가 괜히 중환자 의학과에서 환영받겠는가.
그만큼 중한 환자들을 많이 본다는 뜻이었고, 여기로 협진 요청 오는 환자들 또한 중한 환자일 가능성이 컸다.
“아, 아니. 음. 1번하고 7번, 9번은 너가 보고 얘기해 줘. 나머지는 내가 볼게.”
“아……. 네, 선생님.”
태화 의료원 내과 정원이 30명이지 않은가.
전체 연차가 다 모이면 90명이나 되는 커다란 조직이었다.
비록 들어온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 마당이긴 했지만.
여전히 수혁과 처음 도는 1년 차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1분은 봤나? 그사이에 케이스 분류가 되는 거야?’
1년 차는, 그러니까 안대훈의 절친한 친구이자 수혁교 포교 대상이었던 정시윤은 혀를 내둘렀다.
병동 나온 지 30분 동안 차트를 뒤적거린 끝에 그래, 이건 좀 만만하겠다 싶었던 케이스를 수혁이 바로 분류해 낸 덕이었다.
안대훈이 맨날 괴물이네, 신이네, 어쩌네 하더니.
과장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홍 교수님 환자 중에서는……. 중환자실 내려간 분 말고는 특이 사항 없던데, 맞니?”
놀라는 와중에도 수혁의 말은 계속되었다.
감히 2년 차 앞에서 1년 차가 멍 때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상대가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아, 네! 아니, 지금 7호에 계시는 환자분 간밤에 열이 났습니다!”
“어세스는?”
“어…….”
분명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차트에 써 놓기까지 했는데, 수혁이 바라보고 있으니 왜인지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얘 왜 이러냐?’
[수혁, 어떤 이들은 수혁을 교수님보다 더 어려워합니다.]
‘왜?’
[왜긴요…….]
바루다는 시간이 갈수록 기계인 자신보다 인간 세상에 대해 무지해지는 듯한 수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수혁은 멀뚱히 있었고.
바루다는 하릴 없이 말을 이어야만 했다.
[교수들이야 애초에 교수 아닙니까. 원래도 잘하겠거니 한단 말이니다. 근데 수혁은 레지던트잖아요. 초반에야 나도 1년 하면 저렇게 되나 하는 자신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보세요. 어느 누가 2년 차 3월의 수혁에 근접해 있습니까?]
‘안대훈이 그나마 제일 잘하긴 하는데…….’
[그러니까요. 한심하죠.]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지. 난 너가 있는데.’
[알고 있으니 다행입니다만.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 보자면, 다들 교수 없이 주치의 맡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교수님들이 있는 거지.’
생각해 보라.
대학 병원에 입원했는데, 내가 내과 환자라 중한데, 곧 죽을 거 같은데.
지정의부터 주치의까지 죄 2년 차라면 어떨지를.
병실 앞에 이 문을 지나는 자 희망을 버릴지어다라는 문구를 써 놓는다고 해도 오버는 아닐 터였다.
그래서 교수들이 있는 거 아니겠는가.
[아무튼간에 수혁을 어려워한다고요. 언제 이렇게 얘기가 샌 거야?]
‘알았어, 알았어. 이해할게.’
수혁은 바루다의 말이 지겹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게 정시윤에게는 한심하다는 뜻으로 전달되었다.
‘첫인상인데!’
똑똑한 사람에게 바보로 인식되는 것보다 싫은 일이 또 있을까.
태화 의과 대학 출신이라 고등학교 아니, 중학교 시절부터 전교에서 놀았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터였다.
해서 정시윤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지, 지금 환자분 엑스레이 변화 양상을 보면 분명히 폐렴은 좋아지고 있습니다.”
“응, 그럼?”
“문진 결과 및 간호 기록상 환자 먹는 양이 줄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설사도 차츰 늘고 있고요.”
“그럼 열은 탈수다? 그거 하나일까?”
“어…….”
탈수로 적어 놓긴 했는데.
수혁의 반응을 보니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해서 다른 게 뭐가 있나 하고 머리를 굴렸지만, 아쉽게도 이번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수혁은 다년간의 시험 경험 및 바루다의 분석을 통해 시윤이 지금 떠올리는 게 없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럴 땐 시간 끌어 봐야 별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시간 좀 있지?’
[네, 오늘은 외래도 없고. 협진만 보면 됩니다.]
‘오케이. 힌트 좀 주자.’
[한 달 같이 돌 친구니까 이번 기회에 실력을 좀 보죠. 이미 제 기준 탈락이지만.]
수혁은 바루다의 냉혹한 말을 뒤로하고 입을 열었다.
“설사는 왜 하는 거 같은데?”
“네? 항생제 때문에…….”
“항생제 먹으면 다 설사하니? 이 환자 무슨 항생제를 얼마나 썼지?”
제대로 된 주치의라면 자기 환자에게 무슨 약을 얼마나 썼는지 정도는 재깍 답할 수 있어야 할 터였다.
비록 턴 한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래야 한다고 수혁은 믿었다.
다행히 정시윤은 크게 망설이지 않았다.
“세프트리악손을 열흘……. 아. 그럼 약물 기인성 장염일까요?”
“그래, 드물지만 약물 기인성 장염도 열을 일으킬 수 있지. 그럼 그중에 뭘까? 슈도? 아니면 클로스트리듐 디피실리균?”
“혈변 얘기는 없었어요. 슈도……?”
“세파 계통이 슈도랑 출혈성 장염 다 일으킬 수 있지. 이 환자는 슈도 같아. 아마 그거 때문에 열이 났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 메트로니다졸을 추가해야 할까요?”
“일단 폐렴부터 보자.”
힌트를 줘도 못 받아먹는 애들도 많은데.
이쪽은 좀 달랐다.
[재밌네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알려 주는 사람도 흥이 나기 마련이었다.
수혁은 나지막한 콧노래까지 흘려 가며 모니터에 환자 엑스레이를 띄웠다.
입원했을 때 찍었던 것을 좌측, 오늘 열날 때 찍었던 것을 우측에 띄웠다.
“어떤 거 같아?”
“어……. 폐 우측 하엽에 있던 액상화 소견은 다 사라졌습니다. 아직 좀 지저분해 보이긴 하는데…….”
“청진 소견은 어때?”
“네? 음.”
정시윤은 어깨에 어색하게 놓여 있는 청진기를 돌아보았다.
한때는 아니, 지금도 의사의 상징으로 쓰이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엑스레이와 같은 영상 진단 기기의 등장과 함께 정작 병원에서는 유명무실해진 물건이기도 했다.
더 이상 열심히 청진할 이유가 없어지지 않았는가.
찍으면 훨씬 정확한데, 뭐 하러?
하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바루다의 도움으로 데이터를 축적하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어제…… 어제 제가 들어 보긴 했는데.”
반면 정신윤은 자신이 없어 보였다.
들어 봤다는 게 거짓은 아닌 거 같았음에도 그랬다.
청진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땠는데?”
“정상…… 정상 같았아요.”
게다가 분명 폐렴 환자고, 엑스레이도 아직 지저분한데 정상으로 들었으니 더더욱 그럴 터였다.
그런데 수혁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웃었다.
“정시윤, 맞지?”
“아, 네.”
“네가 들은 게 맞을 거야. 이 환자 세프트리악손 쓴 지는 열흘인데, 그전에도 안티를 썼잖아. 이건 배양 검사 보고 타깃팅 해서 쓴 거라고. 실제로 지금 기침, 가래, 발열 하나도 없다가 어제 갑자기 열나기 시작한 거고, 그렇지?”
“네. 그래도 사진은…….”
“원래 사진은 좀 느리게 변해. 나도 한번 들어 볼게.”
“어, 네. 감사합니다.”
수혁은 감탄한 얼굴의 시윤을 대동한 채 환자에게로 향했다.
그리곤 청진기를 가슴에 가져다 댔다.
“숨 크게 들이쉬어 볼까요?”
능숙한 말투는 덤이었다.
물론 겉에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듣는 게 익숙하진 않았다.
‘어때?’
[굳이 여기까지 와야 했을까요? 이렇게 물어볼 거면?]
‘왜, 나 좀 멋있어 보이면 안 되냐?’
[멋있어 보여서 어떻게 해 보려고요?]
‘연애 한번만 해 보자. 하윤이는 이미 물 건너갔다며…….’
[쟤도 안 돼요.]
‘왜.’
[커플링 차고 있잖아요.]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