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24화 (224/1,303)

224화 편해져야 되는데? (4)

[어이, 어디 가냐고!]

바루다가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수혁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병실 컴퓨터를 향해 걸어갈 따름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달리고 싶었지만.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속도가 느렸다.

그렇다고 수혁이 커다란 심적 좌절을 겪거나 하진 않았다.

도리어 바루다만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말이나 좀 하고 움직이시죠?]

‘일단 보고나 있어. 너 어차피 내가 보는 거 다 볼 수 있잖아.’

[그거야 그런데……. 말 안 해 주면 뭔 생각인지는 모르잖아요. 갑자기 이게 뭔 짓이여.]

‘잘 봐 봐. 보면 알 거야, 너도. 모르면 진짜 깡통이고.’

[와…….]

바루다는 마음에 상처 입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금세 진중한 얼굴로 돌아왔다.

모르긴 해도 중요한 짓을 할 셈인 거 같지 않은가.

일종의 시험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더욱이 수혁은 뭔가 실마리를 잡았는데, 자신은 아예 모르고 있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는 거 자체가 기계에게 있어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런 중요한 일조차 연산 과정에 넣지도 못할 만큼 컴퓨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케이……. 일단 제일 이상했던 환자부터 보자고.’

수혁은 그사이 패혈증으로 협진 나 있는 환자 차트를 깠다.

입원 기록보다는 경과 또는 다른 기록에 눈길이 머물렀다.

수술 기록이었다.

[내과 환자인데 수술을 받았네요?]

‘협진 수술이겠지. 수술 자체는 뭐…….’

[신장 이식 앞두고 부비동 내시경 수술을 받았군요.]

이식 수술을 앞뒀는데 웬 부비동 내시경 수술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식 수술 후 써야 하는 약을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터였다.

수혁도 신장 내과 돌 때 몇 번인가 의뢰를 한 적이 있을 정도로 흔한 일이기도 했다.

이식 수술 후엔 필연적으로 면역 억제제를 써야 하지 않은가.

원래 부비동염, 즉 축농증이라는 건 사진상에 보여도 증상이 없다면 치료하지 않는 게 주된 방침인데.

면역 억제제를 써야 하는 경우라면 예외였다.

아무 문제 없이 진행하지 않던 염증이 갑자기 얼굴 전체로 번지면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었다.

해서 이비인후과에 의뢰해서 미리 제거해야만 했다.

[수술 시간은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역시 패혈증은 수술 당시보다는 환자의 기저질환이 원인이겠군요.]

바루다 또한 이러한 사실 정도는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하지만 수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금방 기록에서 벗어날 거란 바루다의 예상과는 달리 상당히 오래 머물렀다.

‘가만있자…….’

[뭘 가만히 있어요. 이런 걸 왜 이렇게 오래 봐? 얼씨구, 메모까지? 그냥 나한테 말하면 될걸.]

‘잘 봐. 이 환자 암센터 수술방 3번 방에서 했어.’

[네, 그게 뭐…….]

‘다음 환자도 보자고. 내 예상이 맞다면…….’

수혁은 바로 다음 환자, 그러니까 같은 날 협진 의뢰가 왔던 신장 내과 환자를 클릭했다.

이 환자는 그사이 상태가 더 안 좋아졌는지 중환자실로 내려가 있었다.

“아이고.”

수혁은 탄식을 내뱉은 후 빠르게 수술 기록지를 찾아 들어갔다.

[흐음.]

반면 바루다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일단 수술 기록이 또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내과 환자들이 껴 있어서 수술과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는데.

게다가 과가 꽤 다양하지 않던가.

보통은 수술방 몇 번부터 몇 번까지는 어느 과. 이렇게 정해져 있기 마련이라 처음부터 배제해 두고 있던 참이었다.

‘오케이, 이 환자도 이식 앞두고 부비동 내시경 수술 같은 날에 받았어. 그리고 수술방도…….’

[암센터 3번방. 같군요?]

‘다른 환자들도 볼 거야. 감 잡았지?’

[네, 감 잡았습니다.]

‘그럼 이제 나 메모 안 한다? 네가 다 데이터화해.’

[네, 수혁. 맡겨 주십시오.]

바루다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수혁은 병동 데스크 위에 노트와 볼펜을 내려놓고는 기록을 빠르게 뒤져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첫날 협진 났던 환자들 부터였다.

그 결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안과 환자 모두 암센터 3번 수술방에서 수술받은 이력이 확인되었다.

죄다 짧은 수술만 받은 거로 미루어 볼 때, 3번 방은 소위 스페어 방인 모양이었다.

이비인후과 소속이기는 하지만, 수술이 꽉 차지 않으면 굳이 안 쓰고 다른 과에 넘겨주기도 하는 그런 방.

‘다음 날 협진 난 환자들도 다 이 방에서 수술받았어. 여기가 감염원이야. 아마…… 마취 쪽 약물이 문제겠지?’

[그럴 겁니다. 회복실 쪽 문제였다면 다른 방에서 수술받은 환자들도 죄 감염이 되었을 테니까요.]

‘환자들 전원이 다 페렴으로 시작했어. 그렇다면 페 쪽으로 균이 들어갔다는 거지.’

[마취 가스가 감염원이라는 건가요? 그건 좀 드문…….]

‘드물긴 한데, 사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

[하긴 그렇군요.]

바루다는 그 즉시 수혁이 읽었던 케이스나 논문을 출력했다.

비단 우리가 이러이러한 사례를 경험했다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런 사례들을 정리한 리뷰 논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마취 가스를 제조하는 곳의 시설에 대한 관리야 당연히 철저하겠지만.

이런 종류의 일이란 게 대개 그렇지 않은가.

잘한 건 당연했고, 하나 잘못하면 난리 나기 마련이었다.

어떻게든 구멍이 발생하면 지금처럼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우선 3번 방 폐쇄 조치가 필요하겠습니다. 이건…….]

‘내 권한으로는 안 돼. 바로 전화드려야지.’

아직 3번 방에 가 본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3번 방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인한 게 아니란 얘기.

그런 상황에서 방 하나를 폐쇄하는 건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한 일이었다.

사람 살리는 병원에서 이런 말 하기는 좀 뭣하지만.

커다란 매몰 비용이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원래 오늘 수술받기로 했던 환자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 또한 큰 문제였고.

“어, 수혁아. 뭐 좀 떠오르는 거 있어?”

“교수님은 혹시 어떠세요?”

해서 수혁은 신현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현태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병원 내에 있는 모양이었다.

신호가 울리자마자 받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꽤 가정적인 사람이라, 집에만 들어가면 함흥차사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구분이 아주 쉬웠다.

“일단 약물이나 수액 원인일 거라고 보고는 있어. 이런 식으로 많은 환자에게서 급작스럽게 진행하려면 외부에서 균을 강제적으로 주입해 줬다고 봐야 하거든.”

과연 감염내과 의사다운 인사이트였다.

의사가 대량으로 발생하는 패혈증, 그것도 정상 면역을 가진 건강한 성인에서조차 빠르게 진행하는 패혈증이 그저 지역 사회 감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좀 문제 있는 의사 아니겠는가.

하지만 여전히 정확한 원인은 오리무중인 모양이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단순히 잠을 못 자서는 아닐 터였다.

거의 매주 필드에 나갈 정도로 체력이 좋은 신현태였으니까.

“그런데 환자 전부를 연결 지을 만한 고리가 안 보여. 현종이 형도 비슷해.”

“원장님도 거기 계세요?”

“어? 어. 이 양반은 나 병원 있으면 거의 여기 있다고 보면 돼. 올래?”

“아…….”

수혁은 시계를 돌아보았다.

이제 막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수술실 폐쇄가 시급하긴 할 테지만 지금 당장 시급하진 않다는 뜻이었다.

제아무리 환자가 몰리는, 바쁜 태화 의료원이라 해도 12시 넘어까지 정규 수술이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옳을 터였다.

“네, 제가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여기서 신현태 방이 그리 먼 것도 아니었다.

수혁의 걸음이 느리긴 해도 고작해야 5분, 10분이면 닿을 수 있었다.

“어, 그래. 여기 뭐 먹을 것도 있으니까 먹으면서 얘기해.”

“네, 과장님.”

게다가 신현태나 이현종은 수혁이 부모 대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둘만 수혁을 자식처럼 여기는 게 아니란 얘기였다.

아무 일 없어도 얼굴 보고 플 때가 있었다.

오늘은 핑계도 있으니 잘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오, 왔어?”

“네, 아빠.”

이제 수혁은 과장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게 원장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그러긴커녕 아빠라는 단어로 응수하기까지 했다.

“옳지, 잘한다, 내 새끼.”

이현종 또한 놀라는 대신 허허 웃었다.

말년에 손주라도 본 듯한 얼굴이라, 그 모습을 보던 신현태는 그야말로 복잡한 심경이 되고야 말았다.

‘형…….’

그게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래……. 형 말년에 외로울 텐데 오순도순 살면 좋지.’

저 양반이 얼마나 극성이던가.

나중에 같이 골프 치면서 살자고 분당 이매동 근처에 타운 하우스까지 두 채를 사 둔 사람이었다.

하나는 자기가 살고, 하나는 신현태 보고 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땐 소름도 돋았었다.

스토커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다행히 아내도 그렇고 애들도 그렇고 이현종을 좋아하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사직서 내고 도망쳐야 했을 수도 있었다.

‘수혁아, 네가 여러모로 나를 도와주는구나.’

외로워할 때 와서 말동무라도 되어 준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이현종이라는 거물이자 짐덩이를 던진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한번 사는 인생 은퇴하고 나서부터는 좀 따로 사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냐는 게 신현태 생각이었다.

물론 이러한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도리어 부추겼다.

“보기 좋네. 부자지간이 이렇게 있으니까. 이제 형도 원장실로 얘를 불러요. 얼마나 좋아.”

“그럴까? 하긴 수혁이 온다고 하면 내가 책상도 하나 놔 줄 수 있지.”

“아, 좋죠. 저도. 아빠랑 같은 방 쓰면요, 하하.”

생각 같아서는 이렇게 마냥 화기애애한 분위기 연출하면서 이현종을 좀 더 수혁에게 떠넘기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당면한 과제가 너무 시급했다.

“아, 맞아. 수혁아. 그…… 패혈증 그거 어떻게 뭐 생각나는 거 있어?”

“그렇네. 우리 아들. 빨리 얘기해 줄 거 얘기해 주고 자야지. 어? 수척해진 거 봐 이거. 빨리 자야지.”

“네네. 맞네. 그거……. 일단 보세요, 이거.”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 정리한 자료를 보여 주었다.

오는 길에 미리 톡으로 보내 놔서 바로 받아 볼 수 있었다.

바루다의 도움을 받아서 작성한 것이었기에 작은 실수 하나 없이 만들어진 엑셀 파일이었다.

“여기 보시면 전부 호흡기 증상이 심하고 폐렴 진행이 너무 빨라서 혹시 호흡기 쪽으로 균이 들어갔나 싶었거든요. 그게 가능하려면 역시 수술방이 진원지겠구나 싶었죠.”

“내과도 있잖아?”

“열어 봤더니 신장 이식 전 검사 위해서 입원한 환자분들이더라고요. 거기서 부비동염이 나와서 수술받은 이력이 있습니다.”

“아……. 아, 그렇구나. 신장내과였어. 그걸 생각을 못 했네.”

“그리고 모든 환자들이 여기, 암센터 3번 수술방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건 백 퍼센트 여기가 문제야. 마취 가스 감염이구나. 형 나 전화기 좀 줘 봐요. 전화 걸어서…….”

신현태의 말에 잠자코 있던 이현종이 자신이 들고 있는 전화기를 가리켰다.

“이미 걸고 있어. 너보다야 내 힘이 세지 않겠냐? 바로 폐쇄시킬게.”

그리곤 수혁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들, 잘 봐. 아빠 힘이 진짜 세단다.”

“아이고……. 형…….”

“어, 받았네. 그 이현종 원장입니다. 네네. 그…… 3번 방 폐쇄해야겠는데. 감염 위험……. 어? 안 된다고? 아, 지금 들어갔어? 이런 망할. 빨리 전해요! 안 된다고! 아니, 일단 우리도 갈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