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이게 왜 (1)
“네, 이사님. 다름이 아니라…….”
수혁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바루다와 함께 짝짜꿍을 마친 상황이었다.
워낙 고도로 훈련된 덕에 나름대로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짰다고 보면 되었다.
이제 그걸 풀어내기만 하면 되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이현종이 끼어들었다.
“아, 잠만잠만. 이제 내가 할게.”
“네?”
아직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이럴 거면 왜 전화기를 넘겨 줬단 말인가.
수혁만 황당해하는 게 아니라, 옆에 있던 신현태나 장덕수, 홍창기 등도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인, 기인해 대니까 이제는 정말 리미트가 해제된 모양이었다.
“아, 김 이사님. 저 이현종입니다. 간만에 수혁이 목소리 듣고 싶을 거 같아서요.”
“네, 뭐. 원장님. 오랜만이네요. 근데…… 무슨 일이시죠?”
생명의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혁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반응이 부드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서두르는 기색을 완전히 숨긴 것도 아니었다.
이제 7시가 되어 가는 시각 아닌가.
가파르게 쫓아오는 칠성 전자의 추격을 완전히 제끼기 위해, 태화 임원진 회의는 늘 7시에 잡혀 있었다.
그 말은 곧 시간이 거의 없는 것을 넘어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현종은 회의라면 거의 펑크 내고 보았지만,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어젯밤 11시경 태화 의료원에 집단 감염 사태를 선포했습니다.”
“집단 감염……?”
김다현 이사가 제아무리 어마어마한 재원이라고는 해도 전혀 업무 관련성이 없는 병원 용어까지 숙지하고 있지는 못했다.
다만 이현종의 말투와 집단 감염이라는 단어가 전해 주는 무거움은 김다현 이사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네, 3일 전부터 급격히 신규 패혈증 환자가 급증했는데……. 11시경 다행히 원인을 찾아냈고, 현재 감염 대상자에 대한 치료 들어갔습니다. 감염원으로 의심되는 시설은 폐쇄했고요.”
“음……. 그럼 상황 종료된 거 아닙니까?”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 칠성 일보에서 새벽에 왔습니다. 이미 보도했다고 하던데…….”
“네?”
김다현 이사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다현은 옆에 서 있던 비서를 시켜 인터넷 뉴스창을 띄웠다.
그러자 제일 앞부분에 떠 있는 기사가 보였다.
칠성 일보였다.
<태화 의료원 집단 원내 감염 발생! 현재까지 밝혀진 패혈증 환자만 스무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
기사가 딱 이거 하나만 떠 있었다면 조금 마음이 나았을 텐데.
그 밑으로도 관련 기사가 줄줄이 달려 있었다.
<원내 감염, 특히 위험한 이유?>
<슈퍼 박테리아란?>
<걸리면 죽는다, 패혈증의 원인과 치료.>
옛날 같았으면 편집장이 보자마자 원고를 북북 찢어 버렸을 법한 제목들이었지만.
보도 매체가 거의 수백, 수천 개로 늘어난 지금에 와서는 거의 루틴이 되어 버린 자극적인 제목들이었다.
다현조차도 눌러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 태화와 연관이 없거나 안티 태화들은 죄다 들어가 보았을 터였다.
“아니, 어떻게 이게 새어 나가죠? 어제 11시라면서요!”
“모르겠습니다. 프락치가 있었나 봅니다.”
“하.”
한숨 쉬는 김다현에게 비서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이사님, 회의…….”
“난 늦는다고 해.”
“아, 네.”
“맞아, 남지연 이사……. 전화 연결해.”
“네.”
“아니다, 그냥 오라고 해.”
“네.”
갑자기 왜 이러는지 궁금할 법도 했지만.
비서는 단 한 번도 왜냐고 묻지 않았다.
이제는 아득히 높은 곳으로 영전한 남지연 이사 뒤를 이어 부장으로 발령한 이전 비서에게 전해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완전히 신뢰하기 전에는 무조건 예만 해. 필요하면 어련히 알아서 의견을 물어 올 거야. 알지? 보상 확실한 거?’
눈앞에서 부장이 되고 또 이사가 돼서 날개 훌훌 펴고 날아가는데 그걸 왜 안 지키겠는가.
김다현 이사는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물러나는 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통화에 집중했다.
“원장님. 이제 겨우 바루다 프로젝트 비롯해서 태화 바이오, 태화 생명 주축으로 한 병원 산업 회복하려고 하는데……. 이런 일이 터지면 곤란해요. 당장 두바이 병원 개원부터 흔들린다고요.”
“이사님, 이거 언론 플레이입니다. 포커로 치면 뻥카죠. 아까 기자 얘기하는 거 들어 봤는데, 프락치가 아주 깊숙이 관여한 놈은 아닌 거 같아요. 아는 게 절반뿐입니다.”
이현종의 얼굴은 아주 진중했다.
마치 학회에서 발표라도 하고 있는 듯했다.
대가의 목소리에는 대개 카리스마가 있는 법인 데다가, 신현태는 이현종이 이런 표정을 할 때마다 뭔가 커다란 일을 해 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데요? 벌써 대응 방법을 강구해 둔 모양입니다.]
‘그게 가능한가? 우리랑 같이 기자 본 건데, 준비할 시간이 있어?’
[이현종은 천재이지 않습니까? 원장도 벌써 몇 년째고. 나름 학회장도 했고. 노하우가 있겠죠.]
‘으음.’
천재라.
하긴, 이현종만큼 천재란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혁은 덕분에 아까보다는 안도한 얼굴로 통화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좀 더 말해 보세요.”
김 이사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짜증이 잔뜩 섞여 있던 목소리에서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제가 3일 만에 집단 감염을 잡아냈다고 했죠?”
“네.”
“중구난방으로 발생하는……. 특히 수술방 내에서 이루어지는 감염은 그게 한 과에 배정되어 있는 방이 아닌 한에는 잡아내기가 아주 어려워요. 보통 진단까지 1주일 이상 걸립니다.”
“아……. 빠르네요?”
“네, 이게 단순히 저희 병원 시스템이 우수해서거나 특출난 누군가가 있어서 때문은 아닙니다. 아, 물론 우리 수혁이가 이번에도 한몫하긴 했습니다. 하하.”
“아, 네.”
김 이사는 이미 여러 루트를 통해 이현종이 수혁의 자랑을 기회만 있으면 한다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심지어 실제 아들도 아닌데 그런다는 걸 들었을 때는 어이도 없었지만.
그런 것도 다 옛날 일이었다.
덕분에 별 충격 없이 넘길 수 있었다.
“바로 이번에 태화 전자 발주를 통해 개발 중인……. 패혈증 예측 A.I. 덕분에 잡아낸 겁니다. 신규 패혈증 환자가 이상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걸 이 프로그램 덕에 알았어요.”
“어……. 그래요? 같은 사례에서 유의하게 빨리 찾아낸 겁니까?”
“그럼요. 절반도 더 줄인 셈입니다. 덕분에 지금 환자 하나도 잃지 않았어요. 밤이 고비였는데 잘 넘겼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음……. 그럼 집단 감염 원인은 뭡니까? 병원에 귀책사유가 있어요?”
김다현은 비록 병원 시스템에 대해 잘 알진 못했지만.
앞으로 그룹 미래가 바이오 및 의료 서비스에 달렸다고 보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고, 이현종과의 대화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준의 배경 지식은 쌓고 있었다.
“아니요. 병원 잘못은 아닙니다. 외부 제조 과정에서 감염된 거예요.”
“자, 그럼…….”
김다현 이사는 이제 숫제 웃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현종이 지금까지 했던 말은 물론이고, 앞으로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까지 대강 알 거 같아서였다.
“정리하면 병원 잘못이 아닌 집단 감염이 퍼졌는데, 태화 전자와 공동 개발 중인 A.I. 덕에 빨리 발견했고……. 대처가 완벽해서 실제 잘못된 환자는 없다 이거죠?”
“네.”
“그럼 제가 이제부터 뭘 해 드리면 됩니까?”
김 이사의 말에 이현종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여기서 또 했던 말 또 해 가면서 설명해야 했을 텐데.
보아하니 이미 싹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에 더해 뭐든 들어줄 기세까지 엿보였다.
‘역시 이 사람은 영양가가 있다니까.’
괜히 40대에 부사장을 다네 마네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게 아니란 뜻이었다.
물론 수혁이 의사가 아니라 전자로 갔다면 이미 사장을 했을 거란 반발심에 가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이현종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우선 병원비 지원 좀 약속해 주세요. 태화 생명 남 이사님이 김 이사님 라인이지 않습니까?”
“규모는 알아봐야겠지만, 우선 구두로 약속드리죠. 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대한 일보 쪽 이용해서 언론 플레이 반박 좀 해 주십쇼.”
재벌이 언론을 소유하는 것만큼은 법으로 막혀 있는 사안 아니겠는가.
그래 봐야 다들 계열로 나누어져 있는 데다가, 언론마다 주된 쩐주가 되는 기업들이 있어 유명무실하긴 했지만.
아무튼, 애초에 언론사에서 시작해 분사해 커진 칠성과는 달리 태화는 직접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언론사는 없었다.
다만 대한 일보는,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커다란 언론사는 태화가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입김이 세게 닿았다.
“이거 뭐 우리끼리 알면 뭐 하겠습니까. 전 국민이 알아야죠. 뭣도 모르는 놈들이 공격하고 있으니……. 아예 모든 대처를 타임 테이블로 만들어서 대응하면 효과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도 됩니까?”
김다현 이사의 말은 너네 정말 켕기는 거 없냐는 뜻이었다.
이현종의 속마음처럼 대한 일보가 여기저기 얽혀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 안의 혀처럼 노느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칠성 일보처럼 주종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라고 봐야 했다.
때문에 이쪽에서 잘못한 것이 큰 게 있다면 도리어 악수가 될 수 있었다.
“네, 해도 됩니다. 자신 있어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대처였습니다.”
우려에 대해 이현종은 가슴까지 쭉 내밀면서 대꾸했다.
그 말을 들은 김다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팀 꾸려서 가 보라고 전할게요. 최대한 빨리 대응 보도 나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한 말고 다른 곳들도 죄 동원하겠습니다.”
“그게 됩니까?”
“1년에 태화 전자가 뿌리는 광고비가 얼마라고 생각하세요? 제품 광고하라는 것도 아니고, 진실을 밝히라는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 하긴.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는 타임 테이블 준비하겠습니다.”
“네, 이쪽에서도 생명이랑 연계해서 대응할게요. 혹시라도 잘못된 대응이 후에 생각나면 바로 알려 주세요. 법무팀에도 조언 구해야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이사님. 그럴 일은 없습니다.”
“네.”
둘은 서로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맡은 일을 하기 위해 뛰었다.
“야, 현태야!”
“네, 형.”
“수혁이랑 둘이 같이 환자 발생 시점부터 협진 난 시점 그리고 우리가 진료 본 시점 등등 이번 집단 감염 대해서 싹 다 타임 테이블로 정리해.”
“어…….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평소와는 달리 왜 나만 시키냐 등등의 불평불만은 전혀 없었다.
상황이 워낙에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통화 하는 사이 켠 TV에서는 불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칠성 일보를 뿌리로 두고 만들어진 방송국인 TV고려에서 연신 태화 의료원을 때리고 있었다.
<연이은 대학 병원의 원내 감염. 원인은 의료진의 손 씻기 지침 미이행에 있다?>
아주 잠깐만 들어도 아, 얘들이 태화 제끼려고 저러는구나 싶을 지경이었다.
어차피 JCI 인증 등을 받은 큰 병원이라면 기본적인 지침을 넘어 보건복지부에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지점까지 다 오버해서 지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그랬다.
불발이라도 일단 치고 보자, 뭐 이런 생각에서일 터였다.
“장덕수 교수! 자네는 감염관리실 어떻게든 닦달해서 원인균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업체 쪽에 알려서 해당 라인 폐쇄하라고 해. 직접 가서 그쪽 검체도 싹 긁어 오고. 폐기되기 전에, 얼른!”
“네, 원장님!”
덕분에 장덕수는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갔다.
“홍 교수, 자네는 환자 콜 대기야. 이상한 환자 있으면 바로 튀어 가라고.”
“저 외래…….”
“어이구, 대애단한 명의 납셨어, 명의. 어? 뭐 외국에서 오냐, 환자들이? 다른 환자 죽어 가는 데 뭔 놈의 외래야. 일단 미뤄! 외래로 오는 환자들이 목숨 왔다 갔다 하지 않잖아! 다른 팀한테 인계하기 전에는 안 돼!”
“네, 네!”
그리고 홍창기는 괜히 한번 크게 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