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국건영 (3)
“야, 미쳤냐? 평생 대학 병원에만 있었는데 내가 무슨 10억이 있어?”
“응……. 없지?”
“없지, 당연히. 미친놈이 갑자기 전화해서 시비 거네. 넌 있냐? 아, 있겠구나. 장가 잘 가서. 어? 금수저고. 자랑하려고 전화했어?”
일단 신현태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현종이었다.
해서 물어나 볼 생각으로 전화를 했는데, 그야말로 지랄발광이었다.
형한테 이런 단어를 써도 되나 했지만.
듣다 보니 이거보다 더 센 단어도 괜찮을 거 같았다.
“야, 왜 물어봤냐고!”
이현종이 암만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소리 지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그러다 보니 곧 합리적인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현종이라면 그럴 만했다.
“그…… 형, 설마 지금 이 전화 핑계로 회의 나온 건 아니지?”
“전화해야 되는데 어떻게 회의를 하냐, 그럼. 일단 나왔지.”
“아니……. 회의면 말을 하고 전화를 끊으면 되지. 내가 뭔 급한 소리 한다고.”
“혹시 10억이 필요한 환자가 있나 했지. 아무튼, 왜? 왜 전화했어?”
이현종은 아예 다시 회의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딘가 깊숙이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
예전에는 그래도 이현종이 이렇게 땡땡이 치면 할 말이 있었다.
형이 그러니까 병원이 어렵다고.
하지만 집단 감염 사태 한 방으로 모든 위기를 타개하는가 싶더니, 지금은 역대 원장 중 최고가 아닌가 하는 평까지 받고 있었다.
해서 신현태는 굳이 듣지도 않을 말을 하는 대신 쓸모 있는 대화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 나 오늘 국건영 회의 왔잖아요. 알죠? 그건.”
“아……. 어, 알지. 알지.”
“모르는 거 같은데? 내가 형 자료도 보러 왔는데.”
“아, 알지. 뭔 소리야, 인마. 다 알지. 근데 뭐. 거기서 돈 달래? 나라에서 우리 돈을 왜 찾어. 너 그거 국건영 아니고 뭐 이상한 사기꾼 만나는 거 아냐? 알지? 도 교수님. 은퇴하시려고 병원 앞 아파트 팔고 근처 신도시 가면서 남은 돈 다 박았는데 0원 됐어. 은퇴 못 하시고 어디 병원 취직하셨더라.”
이른바 도 교수님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스토리.
신현태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얘기였고, 심지어 얼마 전에 가서 술도 사 드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딱히 심금을 울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영 딴소리였으니까.
“아니……. 내가 바본가. 그런 게 아니라, 수혁이 데리고 왔잖아.”
“아……. 아, 맞아. 수혁이. 수혁이는 그거 보면 감 좀 잡을 거 같은데. 뭐래?”
하여간 대화 나누기 영 힘든 양반인데.
그래도 수혁이 얘기하니까 바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진짜 숨겨 둔 자식인가?’
하고 이러다 보니까 이젠 신현태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얼마 전 맥주 한잔한 수혁도 요새는 진짜 아빠가 이현종이었나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릴 때 버렸다가 다시 찾은 느낌도 든다고 하고.
“야, 뭐래?”
“어? 어어.”
물론 쓸데없는 생각이 오래가진 않았다.
하기야 이현종 아들이 수혁이라고 하기엔 얼굴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다들 엄마 닮았나 보다 하고 퉁 치고 넘어가고 있지만.
누가 봐도 부자지간은 아니었다.
“그……. 미세 먼지랑 상기도 감염을 이어 보겠다던데.”
“응? 거 뭐……. 미세 먼지 그거 가능하냐? 어려운 거잖아.”
아무튼, 연구 얘기가 나오자 이현종은 대번에 냉정해졌다.
별명 중 하나가 논문 기계 아니던가.
이 나이에도 현역으로 논문 쓰는 사람이 흔하지가 않은데, 이현종은 어지간한 40대 교수보다도 더 많이 쓰고 또 더 많이 읽는 인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최근 트렌드에 대해 익숙하다 못해 능통할 지경이었다.
대번에 안 좋은 소리가 나오는 게 자연스럽다 이 소리였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해요. 근데……. 수혁이잖아. 얘가 이거 괜히 이러겠어요?”
“음……. 하긴 수혁이지. 흐음…….”
그러나 수혁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또 다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벌써 수혁이 쓴 논문이 꽤 되지 않던가.
그중에는 심지어 NEJM에 실린 것도 있을 지경이었다.
케이스 리포트까지 하면 20개가 넘어서 그건 세지도 않고 있었다.
‘얘가……. 논문 쓰는 스킬도 스킬인데……. 일단 아이디어도 좋단 말이지.’
사실 논문 쓸 때 제일 중요한 건 연구 계획서라고 보면 되었다.
그리고 그 연구 계획서의 태반은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수혁은 그게 좋았다.
‘그래, 같은 걸 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각자가 달라. 흠.’
이현종은 잠시 지금 자기 밑에서 돌고 있는 유지상을 떠올렸다.
바보라는 말을 제자에게 쓰는 건 좀 실례겠지만.
그거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걔가 듣는 것도 아닌데, 뭐.’
때리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과 함께 유지상이 낸 연구 계획서를 생각했다.
3년 차가 되도록 논문 하나 못 썼다고 해서, 그럼 네가 2년 레지던트 하면서 떠올린 아이디어가 있으면 구체화해서 가져오라고 했더니 가져온 물건이었다.
그걸 물건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디지털 쓰레기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런 놈에 비하면.
‘아니지, 비하긴 뭘 비해. 우리 수혁이를 왜 그따위 놈에게 비해.’
수혁은 천재였다.
그것도 이현종 본인보다도 똑똑한 거 같은 천재.
그렇다면 한번 믿어 봐도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믿고 맡겨 봐.”
“10억은?”
“그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숫잔데.”
“실험 논문으로 이론 정립하려면 필요하다고 하던데. 물론 정확한 액수는 아냐. 되게 대강 말하더라고.”
“근데 그걸 원장인 나한테 고대로 전달하냐? 네가 과장이냐?”
“아니……. 말할 사람이 형밖에 없으니까.”
“어휴.”
이현종은 진심을 다해 한숨을 쉬었다.
회의가 끝났는지 다른 인원들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런 이현종을 보고는 ‘아, 이번에는 원장님이 진짜 심각한 일 때문에 나갔구나’ 하고는 멀어져 갔다.
그걸 의식한 이현종은 일부러 더 한숨을 쉬다가 말을 이었다.
“야, 일단 지금 당장 그걸로 국책 과제는 절대 못따. 미세 먼지……. 그거 중요한 문제긴 한데, 그걸로 국채 과제 딴 사례 자체가 거의 없어요.”
“왜요?”
“그게……. 의학적인 이슈긴 한데. 정치 외교적으로 너무 얽혀 있잖아. 정부도 A.I.랑 비대면 뭐 이쪽으로 밀어주고 있고.”
“그럼 하지 말라고 해요? 우리 수혁이 기죽이기 싫은데.”
“너는…….”
수혁이 무슨 열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아냐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막상 하려니 말문이 턱 막혔다.
‘나도 기죽이기는 싫은데.’
다 같은 부모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해서 말을 좀 바꿔서 하기로 결정했다.
“아니, 하지 말라고는 하지 마. 이유가 있겄지.”
“그럼 어떡해요. 국책은 안 된다며.”
“그……. 어차피 데이터는 공개잖아, 그냥. 그걸로 파일럿이라도 하나 써 보라고 해. 그거 어디 낸 다음에 인용 지수 근거로 돈 달라고 하면 되지. 너는 머리가 안 도니? 아, 맞아. 주도적으로 연구해 본 경험이 없지, 참.”
“와……. 나도 지금 연구 많이 하거든요?”
“태화에서 그 정도는 해야지.”
“와…….”
신현태는 진심으로 상처받은 얼굴로 탄식을 내뱉었다.
임상 실력에 비해 연구가 살짝 달리는데, 그게 콤플렉스다 보니 늘 이랬다.
이현종도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굳이 자기 말을 정정하진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하라고 해. 나도 그런 식으로 딴 거 많어. 언제 들어오지? 말하다 보니까 수혁이 보고 싶은데.”
대신 수혁이를 찾았고, 신현태는 그걸 거부함으로써 복수를 꾀했다.
“여기서 먹고 들어갈 거야. 끊어요.”
“응? 야, 야!”
잠시 동안의 통쾌함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잠시뿐이었다.
부우웅.
곧 수혁의 전화기가 울였다.
이현종이었다.
“어, 네. 아빠.”
“신현태 그 자식이 전화번호 모르는 줄 아나.”
“네?”
“아니, 아냐. 지금 밖이지? 어디야?”
“어……. 서울역이요.”
“서울역? 거기 맛집은 모르는데.”
“네?”
“아냐, 일단 거기 있어. 나 지금 나가니까. 거기 있으라고.”
“어…….”
기습적으로 전화를 건 이현종은 늘 그렇듯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혁으로서는 당황스럽기만 한 시점이었는데, 입에서 뭐야 소리가 나올 때쯤 심현태가 돌아왔다.
“어, 수혁아. 밥 벅고 들어가자.”
이현종과 전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서였다.
어느새 평소의 그 보살 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걸 일그러지게 한 것은 의외로 수혁이었다.
“어……. 방금 원장님한테 전화 왔는데요. 기다리래요. 오신다고.”
“어? 아……. 아, 일 안 하나.”
“네?”
신현태는 연신 투덜거리다 수혁의 순진무구한, 다분히 연출된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우리 수혁이는 좋은 것만 보고 커야지.’
이런 생각을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큰 녀석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음이 움직이는데.
조태진 교수 말마따나 내 심장이 고장 난 느낌이었다.
“응? 아, 아냐. 온다는데 뭐 어쩌겠냐. 바람 맞히면 한 달은 삐져 있을 텐데. 기다리자, 기다려.”
“네.”
“그리고 아까 말한 거 있지? 그거……. 네가 한번 데이터만 가지고 파일럿 연구처럼 해 봐. 어디라도 내서 실리면 그거 근거로 따 보자.”
“아……. 네. 알겠습니다. 파일럿이면 금방 만들어 보겠습니다.”
“무리하지는 말고.”
“네.”
무리할 생각일랑 하등 없었다.
[파일럿이라……. 지금 보여 준 도표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응. 이거면 됐지 뭐. 오늘 들어가서 인트로덕션 쓰고……. 이거 그대로 방법이랑 결과 넣고……. 디스커션 쓰면 되겠네.’
[그림은 좀 그려 줘야죠. 그래프도 좀 그리고.]
‘아……. 나 컴퓨터 잘 못 하는데. 너가 좀 도와줘.’
[저도 못 하는데요?]
‘너 그거 되게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알지?’
이른바 컴퓨터 기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바루다 아니던가.
모르긴 해도 태화 전자에서 이 녀석 만드는 데 사람 여럿 갈아 넣었을 것이 뻔했다.
그것도 보통 사람도 아니고, 최고의 프로그래머들이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근데 엑셀이나 워드도 못 만진다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엑셀이 하고 싶으면 엑셀을 공부하면 되잖아요.]
‘그건 너가 안 도와준다며.’
[용량이 부족합니다.]
‘내 머리 탓이야?’
[그렇죠. 처음엔 뭐든 데이터화하려고 했는데……. 요새 보니까 용량이 좀 부족해요. 이대로 가다간 한 2, 3년 뒤부터는 쓸모없는 기억부터 지워야 할 걸요.]
‘쓸모없는 기억이 뭐가 있는데.’
[연애……. 아니, 뭐 연애는 기억이 없네. 친구도 없고. 뭘 지워야 되나.]
연애나 친구만 해도 중요한 거 같은데.
그 이후로 나오는 항목에는 뭐가 있을까.
더 듣다 보면 무서울 거 같았다.
해서 수혁은 아예 다른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럼 2저자 대훈이랑 하윤이 주고……. 그런 거 좀 하라고 할까? 레퍼런스도 달고.’
[오……. 3년 차다운 생각인데요?]
‘그렇지? 나쁜 생각 아니지?’
[드라마 보면 3년 차쯤 되면 다 그러던데요, 뭐. 할 일 아래로 던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