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연구도 외래도 (4)
“아……. 그러니까 레지던트 2년 차가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진단을 내리고 처치까지 딱딱 했다 이거지?”
“처치까지는 아니고, 무슨 처치를 해야 할지 판단을 해 줬다 이거지.”
진태림과 신현태는 태화 의대 같은 학번 출신, 그러니까 동기였다.
지금이야 둘 다 어엿한 과장으로 잘 나가고 있지만 ,서로의 병신 같았던 모습 또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실습 돌 때는 같은 조였어서, 서로가 원래는 얼마나 멍청했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둘이 통화할 때는 과장끼리의 통화라기보다는 어째 학생들끼리 떠드는 거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 일쑤였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
“누가 외과 아니랄까 봐 멍청한 소리 하기는.”
“야, 누가 멍청해? 너 우리 과 협진 내면 이제 안 봐줘?”
“와…….”
“나는 산부인과 협진 낼 일이 없거든. 안 그러냐?”
“와……. 너…… 너 아는 사람은 애 안 낳는다니? 지인 진료하지 마?”
“와…….”
어차피 얘기를 해 봐야 둘 다 서로를 깎아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늘 그랬다.
다행한 것은 진태림이 오늘만은 이 전화를 건 목적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우리 과에도 천재가 하나 있다 이 말씀이야.”
“응?”
그게 너무 명확하다 보니 신현태 또한 이 전화의 목적을 자연히 알게 되었다.
“너 설마 수혁이 때문에 질투하냐?”
“질투는 무슨? 머리 좀 잘 돌아가는 거 가지고 하도 떠들길래……. 진짜 외과 의사는 어? 그렇게 급박할 때도 다 환자를 볼 수 있다 이 말이야.”
“음…….”
“야, 대단한 줄 알았으면 좀 대단하다고 해라.”
“잠만. 나 어디 들어가는 중이라.”
“어딜 들어가길래…….”
신현태는 잠시 전화기를 얼굴에서 떼어내고는 목에 걸려 있던 명찰을 개폐기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띠딕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주 특징적인 소리였기에 진태림 또한 신현태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중환자실이야? 통화 곤란한가?”
암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와중이라고 해도, 의사는 의사 아니던가.
환자 보러 간다는 데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그게 중환자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한순간의 실수가 환자의 생사를 가를 수도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래 봐야 수술실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중환자실까지 무시하지는 못했다.
“응? 아, 아니. 마침 수혁이가 환자 노티 해서.”
“아이고……. 고놈의 수혁이. 그놈 없으면 너 어쩌려고 그러냐. 뭔 환잔데.”
기실 의사 생활하면서 환자에 대해 토의하는 것만큼 늘 새로운 것도 없는 법이었다.
특히 맨날 보는 환자가 아니라 타과 환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신현태 입장에서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전문 과가 아니라 개소리나 늘어놓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그래서 더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환자에 대해 한 번 더 얘기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정리되는 이점도 있었다.
심지어 지금 보러 온 환자는 산모였다.
“어……. 일단 산모야. 산모.”
“응? 그래? 산모? 몇 주인데?”
“35주래. 이전에 출산 경험이 있고, 풀텀(Full term: 만삭)이야. 브릿지 포지션으로 제왕 절개했고.”
“지금은 어떤데?”
진태림은 뭔가 세한 느낌을 받았다.
어째 방금 자신이 수술한 환자랑 비슷하지 않은가.
이걸 왜 신현태의 입에서 듣고 있는 걸까?
“일주일 전에 시작된 만성 피로 및 구역감으로 수혁이 외래로 왔는데, 검진상 황달이 있어서 그 뭐더라……. 아, 그래 급성 임신성 지방간이랑 그냥 급성 간염을 의심했대. 이게 뭐 응급 분만이 치료라며? 환자가 35주고 이전에 시행한 초음파에서 문제 없어 보여서 산부인과에 그렇게 해 달라고 의뢰했다는데, 너는 모르냐?”
“어…….”
“뭐 과장이 과에 일어나는 일을 다 알 수는 없지.”
신현태는 진태림이 당황에서 어 하고 있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 치부하고 넘어갔다.
그리곤 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아까 수혁에게 전해 들은 말이었는데, 하다 보니 좀 이상했다.
“아무튼, 그렇게 낳고 나서 호전되면 임신성 지방간이고 아니면 급성 간염 의심해야지. 어……. 그러고 보니까 방금 너네 레지던트가 사고 쳤다는 게 이거랑 비슷한데?”
“어…….”
“너 이거 설마 수혁이가 노티 한 건데 헷갈린 건 아니겠지?”
“어…….”
진태림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다와 선생을 찾기 위함이었는데 별 쓸데없는 짓이었다.
이제 막 수술 끝내고 중환자실로 나갔을 거 아닌가.
여기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 산부인과 선생이랑 같이 있네. 수혁이가. 응, 그래. 아, 정 선생이라고. 음 그래요.”
그리고 더 찾을 필요도 없었다.
신현태가 찾은 모양이니까.
이로써 한 가지 사실이 확실해진 셈이었다.
정다와 선생이 노티 했던 환자와 수혁이 본 환자가 같은 환자라는 점.
‘그렇다고 해도……. 저 노티를 처음 떠올린 게 이수혁이라는 보장은 없잖아?’
기실 진태림도 알고 있었다.
지난 1년간 이렇다 할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정다와 선생이 이제 와서 갑자기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건 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그에 반해 수혁은 여태 주워들은 것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심지어 태화 의료원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병원에 나가 있는 친구들에게조차 이수혁 얘기를 들을 때가 종종 있을 지경이었다.
“그래, 환자는 좀 어때?”
“다행히 이수혁 선생님이 빨리 결정을 내려 주셔서……. 일단 분만은 잘 되었습니다. 아기는 건강합니다.”
“오, 정말 다행이네.”
신현태나 수혁, 정다와 그리고 산모 및 그 가족을 포함한 모두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딱 한 명 진태림만 조금 우울해졌다.
‘역시 아니었구나……. 괜히 입 털었네?’
이놈의 급한 성질 때문에 손해 본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 오늘은 또 왜 그랬을까.
왜 맨날 일 저지르고 후회해 놓고선 한 번 더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제 이걸로 신현태가 놀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버틸까.
‘아……. 당장 이번 주 주말에 원장님이랑 라운딩 있네.’
골프라는 게 운동이라기엔 일종의 친목 도모 아니던가.
게다가 신현태나 이현종이나 골프만 나가면 어찌나 말이 많은지, 없는 말도 찾아서 하는 스타일이었다.
근데 방금 자신이 한 실수를 얘기 안 할까?
“야, 방금 내가 사고 쳤다는 거 있잖아.”
“어? 어어. 그 사람이 정다와 선생이지? 나 바로 알겠는데?”
“그…… 그거 좀 조용히 해 줄 수 있나?”
“어……. 나 녹음했어.”
“뭐?”
“이게 설정을 잘못했나……. 모든 통화를 녹음하네? 토욜에 라운딩 할 때 배경 삼아 틀자고.”
“안 돼…….”
“아무튼, 이 환자 너 환자잖아. 일단 와 봐. 추이를 봐야지.”
“하.”
녹음을 했다 이거지.
진태림은 한숨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벌써 토요일날 그냥 아프다고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은 이미 중환자실을 향하고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두 번째 임신까지도 자신을 찾아준 환자 아닌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의사란 말도 아까울 지경이었다.
“환자는 좀 어때?”
해서 도착하자마자 일단 환자에 대해 물었다.
내심 제일 먼저 입을 여는 것이 정다와이기를 바라면서였는데, 이미 서 있는 자세만 봐도 기대는 글러먹은 지 오래였다.
“임신성 급성 지방간이었다면 지금쯤 의식이 돌아와야 정상입니다. 마취과에서 수술방 나올 때 거의 위닝을 하고 나왔거든요. 근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아무래도 급성 간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음……. 무슨 간염이지?”
“현재로써는 A형 간염이 가장 의심이 됩니다. D형을 의심하기엔 기존에 만성 간염이 없습니다.”
“음.”
말로만 듣다가 직접 보니까 진짜 청산유수였다.
이게 레지던트랑 얘기하는 건지 아니면 교수랑 토의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보니, 신현태가 입꼬리를 한쪽만 올린 채 웃고 있었다.
‘제기랄.’
진태림은 애써 그쪽을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그럼 검사는 나갔나?”
“네. 검사는 싹 나갔습니다. 가능성이 작을 뿐, 다른 간염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에 우선 다 나갔습니다.”
“근데…… 그럼 치료는 어떻게 하지?”
“더 자세한 것은 랩이 나와야 되긴 하겠지만……. 우선 알부민(Albumin)과 혈관 수축제로 털리프레신(Terlipressin)을 투여하는 게 좋겠습니다. 응급실 처치실에서부터 폴리를 꽂았는데 지금 아웃이 떨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간신부전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할 겁니다.”
“간신부전…….”
듣기만 해도 무서운 단어 아닌가.
간과 신장이 같이 나간다니.
하지만 생각보다 간부전이 있는 상황에서는 잘 이환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물론 잘 이환된다고 해서 치료도 쉽다는 얘긴 절대 아니었다.
“랩이 나오자마자 상황에 맞춰 투석도 고려해야 합니다. 제가 일단 신장 내과 측에는 연락해 두었습니다.”
“아, 그렇군…….”
“또 이대로 간부전이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간 이식 가능한지에 대해 검사를 시행해야 합니다.”
“간 이식? 간이 어디서 난다고?”
“일단 보호자분에게 부모, 형제분들께 연락 돌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생체 간 이식이라면 가능합니다.”
“아하.”
진태림은 이제 수혁에 대한 질투심 따위는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아니,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일개 레지던트라는 사실마저 잊고 있었다.
그저 한 수 배운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다만 산부인과에서 출혈을 좀 신경 써 주셔야 될 거 같습니다.”
“출혈?”
그러다 피 얘기를 듣자마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산부인과야말로 피가 나려면 정말 미친 듯이 나는 과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출혈 상황에 익숙하다는 뜻인데, 그래서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산과 교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감당할 수 없는 출혈 때문에 환자를 잃거나 합병증을 앓게 된 경우를 경험하기 마련이었다.
진태림도 다르지 않아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수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 기능 부전은 필연적으로 출혈 경향으로 이어집니다. 임신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죠. 보니까 수술장에서 수혈이 한 팩 들어갔던데……. 이게 평소보다 많은 거 아닌가요?”
“원래는 제왕 절개 시에 피 안 나지, 그렇게.”
“아직 랩이 나오진 않았지만……. 출혈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 드레인 봐도 색이…….”
“아…….”
“그나마 정 선생에게 들으니 수술 후 출혈은 거의 없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만약 다시 터지게 된다면 혈관 색전이나 자궁 절제술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음.”
둘 다 급격한 산과 원인의 출혈에서 고려해 봄 직한 옵션이었다.
해서 진태림은 진심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고, 수혁은 몸을 돌려 나온 랩이 없나를 살폈다.
다행히 응급실에서 나간 랩이 나온 상황이었는데, 살피면 살필수록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온통, 그야말로 온통 붉었다.
“나왔어요. 혈소판도 떨어져 있고……. 음. 일단 혈장 수혈하고……. 혈소판도 넣고……. 아, 이거…….”
[사망 가능성 50%가 넘습니다, 수혁. 보호자에게 워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