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62화 (262/1,303)

262화 소아도 잘해? (3)

“일어설 수 있겠어?”

수혁은 뻣뻣하게 서 있다가, 바루다의 조언을 듣고 나서야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끔 허리를 숙였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다 보니 즉각적으로 자세가 무너졌는데, 그게 아이에게는 또 재밌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피식 웃는 모습에서 싹트는 라뽀 아니겠는가.

[거봐요, 제가 하라는 대로 하니까 잘되죠?]

‘더 들었으면 진짜 낙상할 뻔했는데?’

[모로 가든 서울로만 가면 되죠.]

‘자꾸 이상한 데 속담 인용하지마. 속담 자체가 싫어지니까.’

수혁은 바루다와 대화를 나누는 동시에 옆에 있는 빈 침대에 앉아 버렸다.

아무래도 비틀거리며 서 있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거 같았다.

“일어설 수 있겠어?”

그리곤 아까 했던 질문을 반복했다.

아이는 조금 고민하나 싶더니 이내 엄마를 돌아보았다.

딱히 짜증을 내거나 보채거나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볼 때, 컨디션 자체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고열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까 아이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느낌으로는 그렇게까지 고열이 있는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정확히 몇 도인데?’

[수혁의 둔감한 손바닥으로는 정확한 계측이 어렵습니다. 체온계로 재면 되는데 그걸 왜 저한테 요구하시는 겁니까?]

‘음.’

바루다를 들고 다니는, 일종의 주인 입장에서 듣기에는 달갑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또 딱히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진 않았다.

“선생님 말씀 듣자, 할 수 있겠어? 너무 힘든 거 아냐?”

수혁이 곤욕을 치르는 동안 엄마는 아이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이의 상태가 그나마 좀 좋아져서인지, 아니면 큰 병원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해서 그런지 보호자의 태도에는 꽤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안도해도 되는 건 아니었다.

아이의 상태가 여기서 조금만 더 나빠진다면, 저 여유는 독이 되고야 말 테니까.

“응……. 엄마가 잡아 줘.”

“알았어. 힘들면 말해야 해?”

둘의 대화가 조금 더 이어지자, 바루다는 입을 다물고 대화에 집중했다.

수혁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은 그냥 넘길 만한 대화일 수도 있겠지만.

이 둘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되게 망설이네. 침대에서 움직이는 거 보면 그렇게 몸놀림에 어려움이 있는 거 같지 않은데.’

[적어도 대근육 사용에 지장이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그래서 마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듯하군요.]

‘근데 엄마도 힘들면 말하라고 하잖아. 그 말은…….’

[실제로 걷거나 서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뜻이죠.]

‘잘 봐야겠는데.’

그저 넘어지지 않게 주의시켜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넘어지는 양상을 잘 지켜보겠다, 이런 뜻이었다.

“자, 천천히……. 천천히 이쪽으로 내려와.”

아이는 엄마의 말에 따라 발을 땅바닥에 디뎠다.

손으로 침대 팔걸이를 잡으면서였는데, 그것조차 조금은 어설퍼 보였다.

‘6살이면 소근육 발달이 어느 정도 된 다음 아닌가?’

[젓가락 사용이 어설플 수는 있겠지만, 팔걸이 잡는 거 정도는 잘해야 정상이죠.]

‘저건 정상이 아닌데. 원래 그랬을 가능성은?’

[그랬다면 아이의 얼굴에 표정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 판단합니다. 지금 아이는 당황하고 있습니다.]

당황의 원인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겠지만.

지금 아이를 당황하게 만드는 건 아마도 익숙하던 것의 부재일 터였다.

당연히 돼야 하는 일들이 안 되기 시작할 때, 사람은 가장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울지 않았다.

아마도 엄마가 옆에서 굳건한 얼굴로 서 있어 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수혁은 생각했다.

수혁으로서는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든든함이었지만 그렇다고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는 건 아니었다.

‘발가락이 땅에 닿는 것도 좀 이상한데…….’

[환자의 주된 호소 증상은 어지럼증이었습니다만, 저런 건 어지럼증 때문에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뇌수막염이 있을 때 소근육만 건드리는 경우가 있나?’

[뇌야 워낙 증상이 다양하게 나타나니 가능은 합니다만……. 흔하지는 않죠.]

그렇다면 아이는 뇌수막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 되었다.

감히 이기자라고 하는 소아과의 거물의 의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감히라는 단어를 써도 좋을 정도로 수혁과 이기자 사이의 커리어 차이는 극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 선생님. 이제 일어서게 할까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진단명을 정리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아이는 침대에 엉덩이를 기댄 채 수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양어깨를 잡고 있는 보호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치 저 손을 놓으면 넘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일어서라고 하시죠. 적어도 하지에 들어간 근육 긴장도를 보면 일어서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바루다의 판단은 조금 달랐다.

이런 경우엔 바루다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압도적으로 옳다고 보면 되었다.

적어도 의학적인 부분에 있어서 바루다의 말은 천금과도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네, 일어서라고 해 보시죠.”

“손을 놓고요?”

“일단 잡고 일으켜 세워 보세요. 제가 상태를 보겠습니다.”

“음, 네.”

보호자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수혁의 말을 따랐다.

아무래도 TV에서 본 천재 의사라는 이미지가 유효한 모양이었다.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망설이지 않기는커녕 뭐라고 했을 수도 있었다.

보아하니 소아과도 아닌 거 같은데 여기 와서 뭐 하냐고.

하지만 지금의 수혁은 유명 의사 아닌가.

“자……. 조심……. 조심…….”

보호자는 한치의 불만도 없이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손 놓으라고 하시죠. 괜찮을 겁니다.]

‘오케이.’

수혁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손 놔 보시겠어요? 천천히. 넘어질 거 같으면 잡을 수 있는 위치에 대시고요.”

“어…….”

“괜찮아요. 한번 해 보세요. 잘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바루다의 말대로 거기까지는 참 수월해 보였다.

아이는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잘 서 있었다.

적어도 근육의 긴장도, 즉 힘은 정상이라 이 말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검사를 해 봐야만 했다.

‘롬버그(Romberg)?’

[그렇죠. 그건 넘어질 수도 있으니, 주의시키죠.]

‘오케이.’

해서 수혁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아이에게는 그런 모습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엄마가 손을 놓자마자 일그러졌던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이 어른보다는 잘 움직인다, 뭐 이런 종류의 위안일까?

수혁은 긍정적인 사람이기에 다리 다친 게 이럴 때 좋군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자, 손을 반대편 어깨에 대 볼래?”

“이렇게요?”

“옳지, 그렇게. 반대편도 해 봐.”

“네. 음.”

손을 어깨에 대는 것만으로, 그러니까 사실상 손을 묶어 둔 것만으로 아이의 상체가 아까보다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넘어질 정도로 비틀거리는 건 아니었기에 검사는 계속 진행될 수 있었다.

혹시 몰라 불러둔 담당 간호사도 있으니 사고의 염려는 던 셈이었다.

“자……. 이번엔 오른쪽 발뒤꿈치를 왼쪽 발 앞에 딱 대 볼래?”

“어…….”

“응, 힘들 거야. 비틀거릴 수 있어. 넘어질 거 같으면 잡아 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마.”

“아…….”

아이는 제대로 된 답 대신 보호자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수혁에 대한 무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보호자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그런 보호자의 끄덕임은 아이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무려 넘어질 거 같은 두려움을 쉬이 극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옳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이의 몸은 아까보다 훨씬 더 비틀거리고 있었다.

‘어지러웠던 게 아니라……. 운동 실조 증상인 거 같은데.’

[눈을 감고 더 심해지는지 어떤지를 봐야겠군요.]

우리가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감각은 크게 시각, 전정감각, 고유수용감각 이렇게 세 개의 감각이었다.

이러한 감각을 통해 우리는 우리 몸의 위치 정보를 알아내는데, 그게 실제와 달라질 경우 어지럼증이나 운동 실조 증상이 생길 수 있었다.

시각이야 당연히 눈에 보이는 정보를 이용하는 것이었고, 전정감각은 귀 뒤에 있는 세반고리관에 의한 정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고유수용감각이란 관절, 또는 근육의 감각을 말했다.

“조금 힘들 수도 있는데……. 눈을 감아 볼래?”

“여기서 눈을요?”

아이보다 엄마가 더 놀란 얼굴로 물어 왔다.

지금 보아하니 아이는 이제 곧 넘어질 것 같이 위태롭지 않은가.

근데 눈까지 감으라니.

상식적으로 더 어지러워질 것이 분명했고, 그런 것까지는 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마 별 변화 없을 겁니다. 절 믿어 보세요, 어머니.”

하지만 수혁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하자 어쩐지 믿음이 생겼다.

그 믿음의 태반은 방송 출연에서 기인한, 그러니까 다분히 연출된 모습에 의한 것이었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도움은 되고 있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알겠습니다.”

“좋아. 세희라고 했지? 눈 한번 감아 볼까?”

아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번에도 엄마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엄마는 본능적으로 아이에게 손을 더 가까이 가져갔는데, 결론적으로는 조금 민망한 손짓이 되고 말았다.

아이의 비틀거리는 정도는 아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즉 아이는 시각이 차단되든, 그렇지 않든 지금 운동 실조가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시각에 의해 보정될 수 있는 전정감각이나 고유 감각이 아닌 무언가 다른 원인에 의한 운동 실조를 의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소뇌인가.’

[아직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다음 검사를 해 보죠.]

‘그건 진짜 넘어질 거 같은데.’

[간호사 있잖아요. 엄마도 있고.]

바루다가 무슨 검사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수혁은 바로 알아먹었다.

이제 그 정도 수준까지는 올라왔다 이 말이었다.

“자……. 이제 눈 떠볼까? 아주 잘했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해 보자. 괜찮아?”

“음……. 네.”

시키는 대로 했는데 넘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수혁의 말대로 한 발씩 걷다가 우측으로 훅 하고 쓰러졌다.

이미 수혁의 말에 따라 좌우에서 간호사와 엄마가 대기하고 있었기에 다친 곳은 전혀 없었다.

‘아마도 우측 소뇌 병변이 있을 거 같은데. 소뇌 병변의 이유는 뭘까?’

[아이의 나이를 고려하면 출혈이나 경색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뇌척수액 검사 결과까지 고려한다면 급성 소뇌염이겠죠.]

‘급성 소뇌염이라.’

하필 더럽게 드문 질환이었다.

갑자기 이게 의심되니 MRI를 찍어 보자고 하면 납득해 줄까?

뇌수막염으로 확신하고 항바이러스제와 항생제를 때리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 과장님 통해서 얘기해 볼까?’

[이현종이 더 끗발 날리지 않나요?]

‘아까 보니까 둘 사이 묘한 거 같아서. 어쩐지……. 아빠가 좀 꿀리는 느낌이 들던데.’

[착각은 아닐 겁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랬습니다.]

‘그럼 과장님?’

[아뇨. 과장님 말은 안 들을걸요. 그냥 레지던트 통해서 의견 전달해 보시죠. 제 판단이 틀리지 않다면, 이기자 교수는 수혁에게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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