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63화 (263/1,303)

263화 소아도 잘해? (4)

이기자가 호감이 있다라.

듣기에 따라서는 조금 무서운 얘기일 수도 있는데, 다행히 바루다는 사람이 오해하게 두는 깡통은 아니었다.

[아까 내내 평가하는 듯한 태도였죠? 착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실제로 눈이 계속 수혁의 눈이 아니라 입에 가 있었어요.]

‘음.’

예전 같았으면 그게 뭔 대수냐고 물었겠지만.

바루다와 오래 함께 있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귀를 기울였다 이거야?]

‘네, 수혁에게 별다른 걸 물은 것도 아닌데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고요. 특히 이현종 원장이 말할 때는 아예 시선을 그쪽으로 두지도 않았습니다.

반면 이현종은 이기자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야 말았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러한 현상에 대한 분석은 이미 해 두긴 했지만, 바루다가 스스로 판단하기에 에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바루다를 탑재한 이수혁보다도 더 뛰어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는데 순애보라고?

깡통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범주에 있었다.

‘그거 하나로 이런 얘기를 꺼내도 되나? 판단을 뒤집어야 된다는 얘긴데.’

[뭐 어떻습니까? 막말로 이기자 교수와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수혁의 미래에 큰 지장은 없을 겁니다. 현재 태화 의료원의 권력은 완전히 내과 중심으로 개편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 그야 그렇지.’

이럴 때마다 수혁은 확실히 바루다가 사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제자 된 도리로 나이 지긋한 교수에게 도전하는 것을 순전히 자신에게 이식이 되냐 아니냐로 판단할 수 있다니.

뭐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수혁은 아직 그런 수준은 못 되었다.

[정 그러면 일단 레지던트에게 얘기하시죠. 현시점에서 수혁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 레지던트는 없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음, 오케이. 그러자.’

해서 수혁과 바루다는 극적 타협에 이르렀고, 수혁은 곧 소아과 레지던트 2년 차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저 내과 이수혁입니다.”

“아……. 네, 네.”

예상대로 상대는 아주 친절했다.

수혁은 이제 내과 안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과에서 유명인사가 된 참이었기에 그러했다.

안 좋은 이슈로 그런 게 아니었기에 상대의 반응이 좋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입원한 차세희 있잖아요? 6살짜리.”

“음……. 네. 외래에서 입원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아, 외래에서 보신 건 아니에요?”

“외래는 저희 치프 선생님이 보셨어요. 아직 회진을 돌진 못했습니다.”

“아하.”

아직 환자를 보지 못했구나.

그렇다면 더더욱 얘기가 쉬워질 터였다.

[지인이라고 하십쇼. 그냥 와서 봤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할 테니.]

‘오케이.’

게다가 바루다의 조언까지 있지 않은가.

어지간하면 넘어올 터였다.

“그 아이가 제 지인이에요.”

“아이가요?”

[어휴 병신.]

좀 이상하게 말이 나가긴 했지만.

그래서 바루다에게 쌍욕을 듣긴 했지만.

다행히 레지던트는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이 부모 말씀이시죠?”

상식이 있는 사람인 덕이었다.

수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네. 아는 분이라.”

“제가 열심히 보겠습니다, 선생님.”

“아……. 네, 제가 일단 와서 상태를 좀 봤어요. 주제넘은 일이란 건 알지만…….”

“네? 아뇨, 아뇨. 선생님. 그러실 수 있죠.”

아무래도 환자 지인 중에 같은 병원 사람이 있다는 건 좀 불편한 일이었다.

그 병원 사람이 의사라면 더더욱 그랬는데, 수혁처럼 끗발 날리는 레지던트면 말할 것도 없었다.

수혁은 어쩐지 주눅 들어가는 듯한 말투를 느끼며 말을 이었다.

“한번 봤는데 애가 어지럽다는 말을 쓰지만……. 실제로 현기증이 있거나, 빙글빙글 도는 건 아닌 거 같더라고요.”

“아, 그렇군요.”

“그래서 한번 검사를 해 봤습니다.”

“검사요?”

대화를 이어 나갈수록 상대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좀 미안한데?’

[이보다 더 미안해야 할 짓도 많이 하면서 뭘. 계속하십쇼. 애 치료 안 할 겁니까?]

‘어, 그렇지.’

아무래도 곤란해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바루다는 수혁의 인간적인 면모를 쳐 내는 데 아주 비상한 재능이 있는 놈이었다.

덕분에 수혁은 하고자 했던 말을 여과 없이 쏟아 낼 수 있었다.

“롬버그 음성에 텐덤 게이트는 양성입니다.”

“아.”

레지던트는 별 배려 없는 수혁의 말에 아주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그 순간 수혁도 바루다도 한 가지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다.

[공부 안 하네, 얘.]

‘2년 차잖아. 신경과도 아니고. 그럴 수 있지.’

[그럴 수가 있나요? 내과였으면 뒤졌는데, 아쉽네요. 안대훈이 이런다고 생각해 보십쇼.]

‘그건 좀 열 받지. 내가 걔 가르친 게 얼만데. 아무튼, 좀 가만히 있어. 나 통화 중이야.’

[공부 좀 하라고 하십쇼.]

‘닥치라고, 좀.’

암만 기대에 못 미친다 해도 다른 과 아닌가.

바루다의 말처럼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혁은 잠시 할 말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롬버그 음성이면 소뇌 기능 이상이나 정상인데, 여기서 텐덤 게이트 이상이 동반되면 소뇌 기능 이상을 아주 강력하게 의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네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거 같은데, 내가 그걸 눈치챈 건 아니라는 뉘앙스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게 효과가 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레지던트가 납득을 잘하는 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돌아오는 답은 우호적이었다.

“어……. 네.”

“뇌척수액 검사를 보면 어떻게든 염증이 있기는 하니, 아마도 급성 소뇌염이 의심됩니다.”

“아, 네.”

[얘 급성 소뇌염도 모르네.]

바루다야 계속 까칠하긴 했지만.

솔직히 급성 소뇌염은 좀 넘어가 줄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워낙에 드문 질환 아닌가.

사실 수혁도 지나가다 읽은 게 다일 뿐, 단 한 번도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었다.

그마저도 바루다가 하도 지랄해서였지, 자발적인 공부는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우측 소뇌염이 의심되는데, 확인하려면 MRI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찍어 보는 게 어떨까요?”

“아……. 환자분하고 얘기를…….”

“얘기는 제가 했습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음. 교수님이랑 얘기하고 처방 넣도록 하겠습니다.”

“네. 혹 곤란하시면 제가 직접 해도 됩니다.”

“아.”

레지던트 2년 차의 ‘아’에서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병원 생활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 이걸 이해하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수혁이나 바루다는 알 수 있었다.

‘이기자 교수님 무섭나 보다, 야.’

[인상만 봐도 만만치 않아 보이긴 했습니다. 개소리하면 밟을 듯?]

‘하긴 원래 본인이 너무 잘하면 아랫사람이 못하는 걸 이해 못 하지.’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과에도 그런 사람들 수두룩 빽빽이었다.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이현종이었고.

자신은 학생 때부터 이미 교과서는 기본으로 떼고 진짜 공부는 논문으로 했다고 주장하지 않던가.

그게 주장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건 원장실에 가 본 사람은 알 수 있을 터였다.

그 두꺼운 내과 교과서가 닳아 빠져 있고, 옆에는 더 두꺼운 첨삭 필기 노트가 놓여 있는 장면은 존경심을 넘어 두려움이 들게 했다.

아마 이기자 교수도 한 분야의 레전드이니만큼 비슷하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드디어 레지던트가 말을 이었다.

“저, 그러면……. 어차피 병동 근처니까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우선 전화는 제가 걸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그러시죠. 스테이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레지던트는 큰 짐이라도 내려놓은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곧 엘리베이터 쪽이 소란스러워졌는데 아무래도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진짜 무섭나 보네요?]

‘그러게. 대신 전화해 줄 사람이 그렇게 반갑나.’

[아까 인상은 그렇지 않았는데요. 그저 좀 깐깐해 보일 뿐이었는데.]

‘흠, 그러게.’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레지던트와 접선했다.

“잠시만요. 제가 환자 얼굴은 그래도 보고 전화를 드려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아……. 네. 근데 지금은 자요. 아까 검사가 좀 힘들었는지.”

“그렇군요. 네.”

자는 아이를 굳이 깨울 필요는 없을 터였다.

MRI를 찍게 되면 어차피 또 재울 텐데, 그냥 자고 있는 상황에서 약을 주고 모니터링하는 게 안전하기도 하지 않겠는가.

해서 레지던트는 정말 환자 얼굴만 보고 돌아왔다.

수혁도 함께 다녀왔는데, 아이는 자면서 열이 좀 오르는지 땀에 젖어 있었다.

“네, 교수님. 저 2년 차 김경찬입니다. 차세희 환아 노티 드리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통화 괜찮으신지요.”

스테이션으로 돌아온 레지던트는 즉각 이기자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연 2년 차 짬밤이 어디 가는 건 아니어서 긴장했지만, 동시에 공손하고도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응, 말해 봐.”

반면 이기자 교수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네가 노티 할 게 있으면 뭐 얼마나 있겠니, 대충 이런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지금까지 김경찬이라는 친구가 보여 준 모습이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네, 그…….”

“뭐, 전화 걸었잖아.”

아무래도 반응이 이렇다 보니 레지던트도 당황하고 말았다.

처음 전화 걸 때의 능숙한 노티는 다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뭐야, 너?”

다행한 것은 옆에 수혁이 있다는 점이었다.

레지던트는 자기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수혁을 돌아보자마자 일단 전화기를 넘겼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확실히 인간은 재밌군요. 아직도 분석을 넘어서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뭐, 일단 인사부터 하시죠.]

‘알았어.’

수혁은 흠 하는 소리를 내고는 곧장 인사부터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내과 3년 차 이수혁입니다. 차세희 환자 관련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 바꿨습니다.”

“응? 이수혁?”

“네, 아까 뵙고 인사드렸던 이수혁입니다.”

“자네가 왜 차세희 환자를 보지?”

“지인입니다. 그, 부모님하고.”

이미 말은 맞춘 마당이었다.

아까 실수도 한 참이었고.

해서 훨씬 자연스럽게 말이 튀어 나갔고, 이기자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지인이라면 뭐 얼굴 보러 갔다가 이런저런 의견을 남길 수 있지 않겠는가.

아직 입원해서 별다른 것도 안 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럴 수 있었다.

“그래? 인연이네. 그래요, 말해 봐요.”

“네, 교수님. 환아 어지럼증을 호소했으나, 문진 결과 어지럼증보다는 운동 실조 증상이 더 두드러지는 거 같아 롬버그와 템댐 게이트 검사 시행했습니다.”

“운동 실조? 음, 계속해 봐요.”

“검사 결과 롬버그 음성 텐덤 양성 소견 보였습니다. 100% 우측으로 쏠리는 것으로 볼 때 우측 소뇌 병변이 있다고 의심됩니다. 뇌척수액 검사 결과 단백과 백혈구가 다량 검출되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우측 급성 소뇌염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생각합니다.”

“급성 소뇌염이라. 얼마나 드문지는 알고 있지?”

“네, 하지만 확인은 필요합니다. 만약 이게 맞다면 치료가 달라지게 되지 않습니까? 검사도 MRI라 침습적인 검사는 아니니, 해 봄 직한 검사라고 생각합니다.”

“흠.”

이기자는 잠시 수화기에서 뺨을 떼어 낸 후 생각에 잠겼다.

‘네 아빠도 이렇게 똑 부러지게 고백했으면, 내가 네 엄마 했을 수도 있었겠다.’

딱히 의학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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