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소아도 잘해? (6)
스테로이드와 면역글로불린 치료를 병행하면서 아이의 병세는 빠르게 호전을 보였다.
혼자서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던 것이 불과 입원하고 3일 만에 호전되었으니, 감히 빠르다는 말을 써도 좋을 터였다.
“아, 네. 이기자 교수님. 아……. 오늘 다시 검사해 보신다고요? 네, 가 보겠습니다.”
소아과에서는 그 모든 과정을 수혁과 공유하고 있었다.
애초에 지인이라고 밝혀서이기도 했지만, 진단에 기여한 바가 워낙 커서이기도 했다.
“야, 우리 수혁이. 소아도 잘하네.”
옆에서 통화를 들은 신현태가 껄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원래 소아과와 내과는 딱히 소통할 일이 없는 과이긴 하지만.
어디에서건 칭찬이 들려오는 건 좋은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번 임기에 이어 다음 임기에서도 내과에서 원장이 나온다고 하면 아마도 반발이 있을 텐데, 소아과의 지지가 있다면 훨씬 수월할 터였다.
내과 못지않게 커다란 과니까.
“거 뭐 하러 자꾸 불러 싸. 바쁜 애를.”
다만 이현종은 여전히 불만이었다.
신현태가 보기엔 그저 차인 것에 대한 불만으로만 보였고, 또 그게 높은 확률로 사실일 텐데.
이현종만은 그걸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계속 수혁 걱정이라고 포장만 하고 있었다.
“바쁘긴 뭘 바빠, 형. 지금 세 시에 내 방에서 쉬고 있는데.”
“얘가 보는 환자가 몇인데!”
“환자 몇이 됐건 빨리 보잖아. 어지간한 케이스로는 이제 얘 고민도 안 해. 얼마나 빠른데.”
“빠르다고 남의 과 환자까지 봐줘? 너 소아과 프락치냐?”
“형은 뻑 하면 프락치래. 내가 프락치면 퍽도 좋겠다.”
“아휴.”
이현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을 지켜보던 수혁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세상에 원장 어깨에 감히 손을 올리는 레지던트라니.
이런 후레자식이 다 있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둘 사이는 세상의 통념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아빠, 일단 갔다 올게요. 아니면 같이 갈래요? 슈 좋아하잖아요. 지하에서 하나 먹고 돌아오죠, 뭐.”
“음.”
슈라.
병원 지하 베이커리에서 파는 메뉴 이름인데, 그냥 슈크림 빵이라고 보면 되었다.
물론 이런 얘기를 하면 이현종은 벌컥 성부터 냈다.
그냥 슈크림이 아니라고 하면서.
‘슈도 좋은데 수혁이랑 먹는 슈는 더 좋지.’
아무튼, 수혁의 제안은 이현종의 불만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해서 소아과로 가는 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기자 교수를 보러 가는 게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지만.
뭐가 되었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셋이 같이 과장실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너 왜 따라와? 부자지간에 오붓하게 시간 보낸다는데.”
“형…….”
신현태는 실은 형 아들도 아니잖아라는 말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일단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들어서 좋을 얘기도 아니기도 했지만.
최근 이현종이 부쩍 혼자 있을 때 우울해 보이기도 해서였다.
‘설마 이기자 교수랑 마주치고 더 그러는 건가?’
고백했다가 차인 게 벌써 수십 년 전인데 아직도 저런다고?
이미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는 데다가, 여전히 금슬도 좋은 편인 신현태로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자신이야 아내가 갑자기 세상을 뜨거나 하면 엄청난 타격을 입겠지만.
그건 지금껏 같이 아내로, 또 동료로, 친구로 살아온 세월이 있어 더 그렇지 않겠는가.
그에 비하면 이현종은 이기자 교수와 쌓은 추억이고 뭐고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학생 때 좀 친했다고 듣기는 했는데 결국, 그게 다 아닌가.
‘뭐……. 사람 마음이야 맘대로 안 되는 일이긴 하지.’
따지고 보면 수혁을 향한 무한한 애정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않던가.
이러면 편애하는 건데, 과장이 이렇게 하면 다른 레지던트들이 상처받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정신을 차려 보면 수혁 옆에서 둥가둥가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이현종의 이기자 교수를 향한 애정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수혁을 통해 위로받으려는 마음 정도는 이해해야 할 거 같았다.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
“응? 아냐, 아냐.”
“수혁아, 근데 진짜 소아과 가야 되니? 그냥 슈만 먹으러 가면 안 될까?”
이현종은 그런 신현태를 불퉁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이내 수혁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 확실히 소아과에 뭐 책 잡힌 게 있는 모양입니다. 전에도 주눅 들어 있더니.]
‘딱히 소아과에서 미워하는 거 같지는 않던데. 왜 이러시지? 마음 약해지게.’
[굳이 같이 갈 필요 있을까요? 그냥 베이커리에 가 있으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 큰 어른이 싫다는 거 시킬 필요 없죠.]
‘하긴.’
레지던트라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되는 경우가 수두룩하겠지만.
이 사람은 일단 원장 아닌가.
그것도 원장 하기 전부터 이미 엄청난 명성을 쌓은.
그런 사람이 꺼려 하는 일을, 심지어 딱히 필요하지도 않은 일을 강요하는 건 웃기는 일이었다.
“아빠, 그럼 베이커리에 계실래요? 제가 갔다가 바로 내려갈게요.”
“나만 가 있으라고?”
“네.”
“아냐, 그건 싫어. 그냥 같이 가자.”
하지만 본인이 가겠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알겠어요.”
“그래, 나도 요새 바빠서 이럴 시간도 없잖아.”
“하긴, 그렇긴 해요. 진짜 오랜만이죠?”
말 그대로 오랜만이었다.
같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바빴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면 또 모르겠는데.
최근 들어 확 바빠진 느낌이라 더더욱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마침 신현태도 같은 걸 느끼고 있던 마당이었다.
“아, 그러게. 형 요새 어딜 그렇게 나다녀? 외부 회의가 그렇게 많아?”
“원장 되면 다 알게 돼. 얼마나 바쁜지.”
“회의 다 쌩 까던 양반이 이러니까 그렇지.”
“쌩 까긴? 너 어디서 그런 상스러운 말을 배웠냐?”
“형한테 배웠지. 골프만 치러 가면 입 험해지는 양반이 무슨.”
“음.”
이건 뭐 사실인지라 이현종은 잠시 말을 잃었다.
실제로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 할 수 없는 말들만 있었다.
‘그룹 차원에서 회사 개편된다는 게 극비인데 어떻게 입을 열겠냐.’
심지어 그 개편안의 중심에 태화 의료원이 끼어 있지 않은가.
태화 그룹이 태화 전자와 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의료원은 그중에서도 서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홀대받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파격 대우였다.
이게 다 김다현 이사, 즉 차기 태화 바이오 사장 덕인데 아직은 함구령이 내려져 있었다.
추후 주가 변동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이 둘은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누가 주워들을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는가.
게다가 한편으로는 놀래켜 줄 생각도 있었다.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둘에게는 이득이 되는 방향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혁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이미 어느 정도는 구체적인 안까지 나온 상황이었다.
‘이 녀석이 받느냐 안 받느냐에 따라 달려 있긴 한데……. 뭐 설마 안 받겠어?’
수혁에게 아직 의견을 물은 건 아니지만.
이현종은 확신하고 있었다.
수혁은 무조건 하겠다고 할 것이라고.
그 얘기 나올 때 좋아할 거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했다.
“이 형 말 안 하네. 회의에서 얻은 정보로 투기하나?”
“에이, 아빠가 설마…….”
“원래 늘그막에 욕심이 서는 법이거든. 많이 보잖아. 말년에 추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냐.”
“음…….”
“게다가 이 형 지금 너한테 물려줄 거 하나 없나 맨날 고민하는데, 가능성이 크지.”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고 보니까 요새 부쩍 은퇴하면 휴양지 한 몇 개월 놀러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 나올 돈이라고는 빤한데 그런 말을 어찌하겠어.”
“헐.”
이현종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신현태와 이수혁은 전혀 엉뚱한 모함을 해 대고 있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배은망덕이 이런 걸까?
더 슬픈 건 이현종이 이제 귀가 어두워지기 시작할 나이라 제대로 대화를 듣지도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저 둘이 또 뭔가 둘만의 추억을 쌓는구나 할 뿐이었다.
“야, 잠깐 생각한다고 눈 감았더니 속닥거려?”
“아니, 뭘 속닥거려요. 형. 이제 다 왔어. 내려요.”
“아, 왔구나. 아.”
그러다 갑자기 소아 청소년과 병동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사색이 된 채 슬며시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는다거나 하진 않았다.
명색이 원장이라 그런지 뱉은 말은 지키려고 애썼다.
“응, 왔구나. 이수혁 선생, 마침 MRI 찍고 올라온 참이야.”
그에 반해 이기자 교수는 평소와 똑같은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다른 얘기를 했으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MRI 얘기 때문에 수혁은 다급히 이기자 교수 옆으로 향했다.
“어떤가요?”
무려 다른 과 환자에게 지인이라고 구라까지 쳐 가면서 관여한 마당 아니던가.
경과가 좋다는 것이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확정적인 정보를 알고 싶었다.
“직접 보지.”
이기자 교수는 그런 수혁을 보며 미소를 지은 채 옆으로 살짝 비켜서 주었다.
수혁은 고개를 꾸벅 숙임으로써 감사를 표한 후 영상을 살폈다.
T1이야 전에도 별 의미가 없었기에 T2로 직행했다.
“아……. 괜찮네요. 고강도 음영이 이 정도면 거의 다 호전된 거 같습니다.”
“응. 정상에 비하면 아직 좀 있기는 하지만 이 추세면 앞으로 며칠 안에 없어질 거야.”
“그럼 증상은 남아 있나요?”
“지금 병실에 왔으니까 직접 확인해 봐.”
“아……. 네.”
수혁은 이기자 교수와 함께 병실로 향했다.
신현태도 뒤를 따랐는데, 이현종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기자 교수와 얼굴을 또 마주하는 건 좀 그런 모양이었다.
‘우리 형 불쌍해서 어쩌냐……. 수십 년을 짝사랑하고 있네.’
신현태는 잠시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수혁에게로 갔다.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내 새끼 성과는 성과 아니겠는가.
안 그래도 볼 때마다 이뻐하고 싶은데, 이럴 때를 틈타서 티를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벙어리 냉가슴 앓듯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전에 했던 대로 손 반대편 어깨에 대고……. 옳지. 발뒤꿈치 반대편 발 앞에. 응, 와 잘하네. 전혀 흔들림이 없는데?”
원래 영상보다 증상이 더 빨리 좋아진다고 하지 않던가.
아직 어린 데다가 약이 정확하게 들어가서 그런가 회복이 정말 빨랐다.
아이는 롬버그뿐만 아니라 텐덤 게이트도 무사히 통과하는 기염을 토했다.
수혁과 바루다가 뿌듯해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애들 치료는 또 호전이 빠르니까 이런 묘미가 있군요.]
‘그러게. 왜 소아과 하는지 알겠네.’
[공부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아이야 신경과랑 이어져 있어 진단이 됐지만, 알죠? 소아과학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다른 생명에 대한 의학입니다.]
‘음……. 뭐, 용량 안 모자라?’
[쓸데없는 거 좀 지우면 됩니다.]
‘뭐…… 뭘 지우려고.’
[지우기 전에 컨펌 받을게요.]
해서 소아과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겉으로는 연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기에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이현종 또한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기자 교수가 스윽 그 옆으로 다가갔다.
“원장님, 아들 잘 키우셨네?”
아주 친근하게 말을 걸어 가면서였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현종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는 점이었다.
“어? 어어? 왜, 왜……. 어?”